2015년 5월 24일 정오, 초여름의 화창한 날씨에 맑고 신선한 기운이 감도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번지에 있는 휘경원에서 현목유비의 193주기 제향이 올려졌다. 제향은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주관하에 관악구분원의 휘경원봉향회에서 섭행하여 거행 된다.
휘경원(徽慶園)은 조선 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의 후궁이자 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의 사친(私親)인 현목유비(顯穆綏妃) 박씨의 원소(園所)이다. 현목유비 박씨(1770. 6. 1. ~ 1823. 2. 5.)는 반남인(潘南人)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의 6남 5녀 중에 3녀로 태어나셨고, 1887년 18세 때 삼간택으로 입궁하여 정조와 가례 후 네 번째 후궁으로 가순궁(嘉順宮)에 봉해지셨으며,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으시고 유빈(綏嬪)이 되셨다가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 5년(1901년) 정조대왕이 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빈(嬪)께서도 비(妃)로 추존되었다.
휘경원(徽慶園)은 처음 양주 배봉산 묘좌(동쪽) 언덕에 모시고 원호(園號)를 휘경(徽慶)이라 하니 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의 동명이 여기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그 후 1855년(철종6)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양주 순강원(順康園) 뒤 산등성이 간좌(북동) 언덕으로 천봉(이장)하였고, 1864년(철종14) 양주 달마동(현위치) 임좌(북북서) 언덕으로 재천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임원들, 서울특별시지원의 임원들, 휘경원봉향회 회원들, 각 능, 원, 묘의 봉향회 임원들, 각 파종회에서 참반하신 분들과 현목유비의 친정 집안인 반남 박씨문중의 임원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약 120 여명의 참반원들이 더운 날씨에도 제향이 시작 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 한다.
본 봉향회 강진 부회장의 집례로 제향이 12시에 시작되어 본 봉향회 순배 부회장이 초헌관, 반남 박씨 종중의 박찬성 감사가 아헌관으로, 인릉 봉향회 주관 봉향회장이 아헌관으로 각각 작을 올리고 본 봉향회 재호 이사가 대축으로 독축을 하였으며, 여타 제관들은 본 봉향회 임원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위원들, 반남 박씨 종중의 박찬구 이사 등 여러분들이 제관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주었고, 종약원의 호욱 전례위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해설을 해주어서 제향의 분위기를 더욱 경건하게 하였다. 오후 1시에 제향을 마치고 휴재 봉향회장의 인사와 내빈 소개가 있었고, 기념 촬영 후 음복 장소로 이동하여 간단한 음복, 준비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함께하였다.
祭官 分榜記
解 說 李 鎬 昱 |
謁 者 李 柱 燁 |
園 司 朴 贊 龜 |
典 祀 官 李 義 基 |
齋 郞 (外) 李 康 在 |
祝 史 (外) 李 厚 源 |
齋 郞 (內) 李 相 周 |
祝 史 (內) 李 明 承 |
大 祝 李 在 鎬 |
贊 者 李 康 振 |
監 察 李 贊 鎬 |
終 獻 官 李 周 官 |
亞 獻 官 朴 贊 星 |
初 獻 官 李 淳 培 |
휘경원 주변에 광릉과 순강원이 있고, 광릉의 원찰로 세워졌던 봉선사가 가까이에 있다.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인 현목유비의 원소이다. 처음에는 동대문구 휘경동에 원소를 조영하였다가, 순강원 옆을 거쳐 세 번째로 옮겨온 곳이 이곳이다. 현재 동대문구 휘경동의 동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현목유비는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았는데, 당시 정조에게는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고, 의빈 성씨에게서 문효세자와 한 분 옹주가 있었으나, 문효세자는 5세에 홍역을 앓다 사망했고, 옹주는 첫돌이 되기 전에 조졸 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었다. 현목유비가 후궁으로 들어와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으므로 왕실에 큰 영광을 안겨주신 분이지만, 조금도 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고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시 할머니인 영조의 계비), 헌경왕후 홍씨(시어머니인 혜경궁),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정비) 등을 늙어서까지 극진히 모시는 현숙한 분이셨으며, 아드님이 보위에 오른 후에도 늘 검소한 생활을 하시어 현빈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순종황제 때 정조가 황제로 추봉됨에따라 현목유빈 또한 현목유비로 승격되었다.
휘경원은 아직 제실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여서 봉향회에서 임시로 설치한 불편한 천막 안에서 제관들이 환복을 할 수밖에 없지만, 제관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다. 조상의 제향을 올리는 정성스러운 마음이 중요하지 조금 불편한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러한 정신문화가 온 국민들의 일상에까지 확산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제향에 참반한 분들은 얼마간의 헌성금을 내게 된다. 봉향회에서는 이를 접수하고, 영수증을 발부한다.
제향의 경비를 제하고, 다른 능, 원, 묘의 제향에도 접수한 만큼의 헌성금을 내게 되는 것이 상례이다.
각 파종회에서 오신 분들이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오래만에 만나서 서로간의 정담을 나누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제향 참반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돈목의 계기이기도 하다.
관세위는 제관들이 목욕재계를 하였을지라도 다시금 손을 씼으면서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한 번 더 마음까지 씼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정자각 안에 차려진 제상은 검소하면서도 정갈하게 준비한다.
전례위원들이 대축이 독축할 자리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있다.
준소상에는 초헌, 아헌, 종헌이 헌주할 각각 다른 준통이 마련되어 있으며, 용작 또한 각각 사용하게 된다.
제관들이 습의를 통하여 실수하지 않고 제향을 모실 수 있게 한다. 숙달되지 않은 후손들도 조상의 제향에서 제관으로 봉무하고 싶어하는 것이 또한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충심인지도 모른다.
현재 휘경원은 제실, 수라간, 수복방이 복원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진선을 하기 위하여 임시로 찬막단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정자각 앞 홍살문 안쪽의 신로에 전향상을 마련하였다. 이 곳에서 전향례를 행한 후 대축이 향을 받들고 정자각 제상 앞에 마련된 향상에 향을 모신다.
제향이 시작되기 전에 참반원들이 헌성금을 접수시키고 있다.
제향 후 참반원들이 음복할 장소가 없어서 봉향회에서 마련한 도시락과 제수를 여기저기 흩어져 각각 음복을 하였지만, 지금은 천막을 설치하고 탁자, 의자까지 마련하여 편안한 자리에서 음복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불편함이 크게 개선되었다고 하겠다.
매년 휘경원 제향일에는 조금씩일지라도 비가 오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아주 청명한 가운데 초여름의 햇살이 참반원들에게 더위를 느끼게 한다. 비가 오는 제향일에 사람들은 현목유비께서 비와의 인연으로 입궁하셨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 불편마져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는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박준원이 홍수로 집과 재산을 떠내려 보내고 살길이 막막하여 친척 형님인 화평옹주의 부마 박명원의 도움을 청하려 갔다가 후궁이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한 이야기이다.
부원군 댁 반남 박씨 종중 대표들과 기념촬영
휘경원 봉향회 임원들과 함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갔던 조선 왕실의궤가 2011년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것 중에서 현목유비의 천장 반차도(班次圖)를 당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시던 본 봉향회 고문이신 이정주 교수께서 사비를 들여 복사, 제작하시어 휘경원 봉향회에 기증하였었는데, 해마다 제향을 봉행할 때면 이를 전시하는데 고문님께서 직접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휴재 봉향회장의 인사와 제관 및 내빈 소개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