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儀軌)
世宗實錄 10년 9월 4일 기사 중에 의궤(儀軌)는 단지 한 때에만 행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만세(萬世)에 걸쳐 행해지도록 만든 것이다. (儀軌 非但行之一時 實萬世通行之制也)라는 대목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렇듯 왕실이나 국가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 준비과정, 의식절차, 진행, 행사, 논공행상 등에 관하여 당시에 행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여 후에 참고로 활용하기 위하여 책으로 남겼다. 이러한 책은 조선 건국 당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많은 관련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1601년(선조 31년)의 것으로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의궤는 보통 필사하여 제작하였으므로 소량을 제작하여 특별 제작한 1부는 어람용(御覽用)으로 왕에게 올리고 나머지는 의정부, 예조, 춘추관, 강화부,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적상산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함께 의궤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귀중한 조상들의 문화유산이 잦은 외침(外侵)으로 소실되거나 탈취당하여 오롯이 보존하고 있지 못한 것은 우리 민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깊이 연구하고, 잃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학자들과 세계에 자랑할만한 소중한 유산의 가치를 인식한 통치자의 외교력 덕택에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에 약탈당했던 강화도의 외규장각 의궤 297 책이 145년이 지난 최근(2011년)에 임대형식으로라도 우리 품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일본이 오대산 사고에서 약탈해다가 궁내청에 소장하며 돌려주지 않고 있는 의궤가 총 81종 167 책인 것으로 2010년 공개되었지만, 아직도 반환하지 않고 있는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우리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의궤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에 의하면 세자, 왕비의 책봉행사, 세자나 왕의 결혼, 국장(國葬), 산릉(山陵)의 책조(策造), 왕후의 존호 및 선대왕과 왕후의 시호를 올리는 행사, 건물의 축조, 공신의 책봉행사, 어실의 개조, 어용(御容)의 도사(圖寫), 친경행사(親耕行事) 등이 있을 때는 그 행사를 주관하는 임시관청으로 도감(都監)을 설치했다고 한다.
각 도감에서 행사를 치른 과정 일체를 날짜순으로 기록한 등록(謄錄)을 만들었다가 후일에 참고하기 위해 이 등록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정리한 것이 의궤이다. 대개 도감에서 행한 행사명에 따라 의궤의 구체적인 명칭을 개별적으로 붙였다.
의궤도 [儀軌圖]
조선시대 의궤청(儀軌廳)에서 편찬한 각종 의궤에 수록된 그림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일정한 격식에 맞게 그려진 도상적인 그림을 모두 지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조정의 국가적인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임시관청으로 의궤청을 설치하여 그 행사의 시말(始末)을 항목별로 상세히 기록한 의궤를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필요에 따라 각종 기용(器用), 복식, 건물 등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면을 그려 부수(附隨)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이 일반적인 의미의 의궤도이며 이것을 그리는 것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의 의무였다. 그러나 모든 의궤에 의궤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며, 중요도에 따라 채색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했다. 의궤도는 행사 시에 필요한 기물의 배치, 인물의 반차(斑次), 방향, 위치 등을 사실 그대로 그려 글로써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하여 후세에 참고하게 하기 위해 제작된 기록화적인 그림이므로 꼭 필요한 특징만을 요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일정한 형식의 틀 속에서 제작되어야 했던 의궤도는 순수한 회화작품다운 맛이 적고 도식적·일률적인 표현의 한계를 지닌다. 표현기법은 목판인쇄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기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묘사했으나 점차 부분적으로 목판채색법을 절충하다가 후기에는 목판채색법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표현형식은 개별적인 기물이나 건물의 그림, 행렬반차도(行列班次圖), 행사도(行事圖) 형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행렬반차도는 배경이 완전히 배제된 가운데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했으나 실제로 인물과 말 등의 묘사에는 측면관·정면관·후면관의 몇 가지 형태가 혼용되었다.
이러한 행렬반차도는 조선시대 최고(最高) 의궤도는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1795)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그림을 권수(卷首)에 따로 묶어 도식(圖式)으로 분류했고 이전의 단순한 기용도(器用圖)와 행렬반차도 외에도 중요한 행사장면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회(圖繪)했다.
이러한 형식은 그 이후에 출간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와 각종 진작(進爵)· 진연(進宴)· 진찬(進饌) 의궤에 큰 영향을 미쳐 계승되었다. 의궤도는 의궤의 기록을 통해 제작연대와 화원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화적인 성격이 강한 그림이므로 조선시대의 회화는 물론 복식·음악·무용·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사료적인 가치가 크다.
사수도(四獸圖)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조성한 기록인 산릉도감의궤에는 사수도가 수록되어 있다. 사수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뜻한다. 의궤에 기록된 사수도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사신도의 오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수도는 산릉조성 당시 동원된 화원 화가가 그렸고, 의궤에 수록되어 제작연대를 알 수 있으므로, 시대에 다른 양식적 변천에 대한 파악뿐만 아니라 동시대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된다.
죽은 자의 수호신(守護神) 사수도(四獸圖)
사수(四獸)에 속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 죽은 자의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되었다. 청룡은 동쪽, 백호는 서쪽, 주작은 남쪽, 현무는 북쪽을 상징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강서 대묘와 같이 무덤 내부 벽의 동서남북 네 벽에, 고려시대에는 석관의 바깥쪽 네 면에 십이지상과 함께 사신도를 그리거나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신(四神)보다는 사수(四獸)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묘제(墓制)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벽화가 불가능한 구조였고, 주로 목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수도(四獸圖)의 전통이 이어졌다. 즉, 관을 임시로 모셔두는 집 모양의 구조물인 찬궁(攒宮) 내부의 네 벽에 그림을 그려 붙였던 것이다. 찬궁은 장례를 마친 후 태워버렸기 때문에 실제 장례에 사용되었던 사수도는 남아있지 않으며, 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된 사수도만 남게 되었다.
사수(四獸)의 모양과 특징(特徵)
의궤의 사수도는 기본적으로 청룡은 청색, 백호는 흰색, 주작은 붉은색, 현무는 남색이나 검은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몸의 무늬나 여백의 문양 등은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하였다. 청룡은 상상의 동물로 사지를 갖춘 뱀의 몸통에 사슴의 뿔, 말의 얼굴, 물고기의 비늘 등 여러 동물의 특징이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구도는 일자형, 말발굽 형, S자 형 등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도상에 큰 변화가 없다.
백호는 일반적으로 얼룩무늬에 화염문 갈퀴를 단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시기에 따라 현실적인 흰 호랑이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또 모습, 자세, 머리와 꼬리의 방향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 사수 중 가장 변화상이 많다. 주작은 전통적으로 봉황의 모습과 유사하게 표현되었지만, 의궤에 수록된 주작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주작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세 개씩 달리고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도상이다. 현무는 대체로 거북의 몸을 뱀이 휘감은 형태로 그려졌다.
四獸圖의 變遷
현재 남아 있는 사수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30년의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에 수록된 것이다. 1776년의 <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까지는 사수도가 의궤의 첫 부분에 그려졌고, 그 이후부터는 책 중간에 있는 [조성조]의 ‘도설’ 부분에 그려졌다.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의 사수도는 조선 초부터 17세기 초반까지의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룡과 백호는 가로로 긴 화면에 일자형으로 그렸는데, 청룡은 우향, 화염문 갈퀴를 단 백호는 좌향 한 모습니다. 삼두삼족의 주작과 거북과 뱀이 얽힌 모양의 현무는 세로로 긴 화면에 그려져 있다. 또 여백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도상에 몇 가지 변화가 생기는데, 우선 청룡은 일자형에서 말굽형의 자세를 취해 세로로 긴 화면에 알맞게 배치되어 훨씬 역동적인 느낌을 주며, 여백은 구름과 화영보주 등의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백호 역시 세로로 긴 화면에 맞게 배치되었는데, 화염은 갈퀴가 없는 현실적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태와 머리를 왼쪽으로 두고 어깨에 화염은 갈퀴가 있는 호랑이의 형태 두 가지가 모두 나타난다.
18세기 이후에는 백호가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자세가 일반화되었으며 화염문 갈퀴는 남아 있다. 주작은 전체적인 틀은 유사하되 날개의 줄무늬나 꼬리 등 세부 표현이 간략화되었으며, 현무는 기본 도상에서 큰 변화가 없다. 1720년의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에 나타난 사수도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났다.
사수도 전반에 걸쳐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1757년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와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이다. 두 의궤의 사수도는 거의 유사한 양식을 보이는데, 청룡은 S자 형식으로 바뀌어 움직임이 훨씬 강조되었으며 색채나 문양이 더욱 화려해졌다. 백호는 등에는 변화가 없으나 양 어깨의 화염문 갈퀴가 사라져 신비함 대신 현실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주작은 삼두삼족의 형태에서 붉은색을 띤 참새와 같은 모양의 날아가는 새로 표현되었다. 현무는 본체의 몸을 휘감고 있던 뱀이 사라져 거북과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즉 추상적이고 신비한 요소를 제거하고 보다 현실적인 도상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사수도의 양식은 이후 제작된 의궤의 사수도에서도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