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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개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것으로서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조정에서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실록에는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과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두 실록은 1927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황제•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들에서 왜곡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도 맞지 않는 점이 많다. 그러므로 고종•순종실록의 역사는 참고하거나 인용하는 데에 주의가 필요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실록으로 약칭하기도 하며, 이들 중에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와 같이 ‘일기’라고 한 것도 있지만, 그 체제나 성격은 다른 실록들과 똑같다. 대부분 왕대마다 1종의 실록을 편찬하였지만, 선조실록, 현종실록, 경종실록은 후에 수정(修正) 실록 혹은 개수(改修) 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광해군일기는 인쇄되지 못한 정초본 (正草本: 鼎足山本)과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이 함께 전하는데, 중초본에는 최종적으로 산삭한 내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대부분 목활자로 인쇄한 간본(刊本)으로 되어 있지만, 정족산본(鼎足山本)의 초기 실록 및 두 본의 광해군일기는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료하였다. 이 국역본은 신국판(新菊版) 413책으로 간행되었으므로 이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를 보다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1995년에 서울시스템(2003년에 솔트웍스로 개칭)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가 전질을 전산화하여 CD-ROM으로 제작 보급하였다. 한편, 북한의 사회과학원에서는 적상산본 실록을 이용하여 1975년부터 1991년까지 국역사업을 추진하여 총 400책의 국역실록을 간행하였다. 오대산본 실록의 경우 일제 강점기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가 대부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으나 일부(27책)가 이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어 국내에 잔존해 있었으며, 일본에 남아있던 실록이 2004년(47책)과 2018년(1책) 환수되었다. 또한 2017~2018년 조사 결과, 정족산본 7책, 적상산사고본 4책과 함께 어람용으로 제작된 봉모당본(奉謨堂本) 6책이 추가 확인되었다.
 
 
현재 남한에서 소재가 파악된 조선왕조실록은 총 2,219책으로서, 이 가운데 정족산본 1,187책과 낙질 및 산엽본 99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밖에 태백산본 848책이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오대산본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적성산본 4책과 봉모당본(奉謨堂本) 6책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 편찬의 유래

실록(實錄)은 황제나 국왕과 같은 제왕이 조정에서 일어나거나 보고되는 일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로서, 일종의 연대기(年代記)에 해당한다. 그 기원은 황제의 측근에서 매사를 기록하던 한대(漢代)의 기거주(起居注)에서 시작되지만, ‘실록’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6세기 중엽 양(梁) 무제(武帝) 때 주흥사(周興嗣)가 편찬한 황제실록(皇帝實錄)이 처음이다. 이후 당(唐)•송(宋) 시대를 거치면서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지속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중세 이전의 것으로는 당대(唐代)에 한유(韓愈)가 편찬한 순종실록(順宗實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근세의 실록인 명실록(明實錄 : 大明實錄 혹은 皇明實錄) 2,909권과 청실록(淸實錄 : 大淸歷代實錄) 3,000여 권이 전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처럼 내용이 풍부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연대 미상)부터 사관(史館 : 후에 예문춘추관으로 개칭)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였다. 태조∼목종의 7대에 걸쳐 차례로 편찬된 실록은 1011년(현종 2) 거란족의 침략으로 궁궐•사관과 함께 소실되기도 하였다. 이후 현종이 1022년(현종 13) 황주량(黃周亮)•최충(崔沖)•윤징고(尹徵古) 등에게 《칠대실록(七代實錄)》을 복원하도록 명하여 1034년(덕종 3)에 완성하였다. 이를 이어 후대의 왕들도 실록을 편찬하였고, 조선왕조도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1398년(태조 7)에 공민왕 이후 고려말기 왕들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실록은 태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의 실록들 뿐이다. 태조실록은 1408년(태종 8)에 태조가 죽자, 태종이 편찬토록 명하였으나 하륜(河崙) 등이 3대가 지난 후에 편찬할 것을 주장하여 중지되었다가, 1410년(태종 10)부터 춘추관(春秋館)에서 편찬을 시작하여 1413년(태종 13)에 완성되었다. 뒤이어 세종대에는 정종실록(定宗實錄 : 본래 이름은 恭靖王實錄)과 태종실록(太宗實錄)이 편찬되었다.
 
정종실록은 1426년(세종 8)에 변계량 등에 의해 완성되었고, 태종실록은 1431년(세종 13)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도전(鄭道傳)의 난(王子의 亂)과 박포(朴苞)의 난에 관련된 기사에 착오가 있어 1442년(세종 24)에 태조실록과 함께 부분적으로 수정되었다. 이들 실록은 처음에는 2벌씩 작성되어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소장하였다. 그러나 멸실의 염려 때문에 1439년(세종 21)에 사헌부의 건의로 2벌씩을 더 등사하고 전주와 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하여 봉안하게 하였다. 이것이 조선초기의 사대사고(四代史庫)이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대대로 실록을 편찬하였고, 편찬이나 관리에 엄격한 규례를 적용하였다.
 
아래 표는 역대 국왕들의 실록에 관한 기초적인 사항을 정리한 것이다.

※ 실록에 관한 기초적인 사항

순서(왕대)표제권수책수편찬완료원제/비고
1 태조실록 15 3 1413(태종 13) 太祖康獻大王實錄
2 공정왕실록 6 1 1426(세종 8) 恭靖王實錄
3 태종실록 36 16 1431(세종 13) 太宗恭定大王實錄
4 세종장헌대왕실록 163 67 1454(단종 2) 世宗莊憲大王實錄 * 志 36책 포함
5 문종대왕실록 13 6 1455(세조 1) 文宗恭順大王實錄 (단, 제11권은 소실)
6 단종대왕실록 14 6 1469(예종 1) 魯山君日記 * 附錄 있음
7 세조혜장대왕실록 49 18 1471(성종 2) 世祖惠莊大王實錄 * 志(樂譜) 2책 포함
8 예종양도대왕실록 8 3 1472(성종 3) 睿宗襄悼大王實錄
9 성종대왕실록 297 47 1499(연산군 5) 成宗康靖大王實錄
10 연산군일기 63 17 1509(중종 4) 燕山君日記
11 중종대왕실록 105 53 1550(명종 5) 中宗恭僖…誠孝大王實錄
12 인종대왕실록 2 2 1550(명종 5) 仁宗榮靖 欽孝大王實錄
13 명종대왕실록 34 21 1571(선조 4) 明宗大王實錄
14 선조소경대왕실록 221 116 1616(광해군 8) 宣宗昭敬大王實錄
"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 42 8 1657(효종 8) 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
15 광해군일기(중초본) 187 64 1633(인조 11) 光海君日記(태백산본)
" 광해군일기(정초본) 187 40 1653(효종 4) 光海君日記(정족산본)
16 인조대왕실록 50 50 1653(효종 4) 仁祖大王實錄
17 효종대왕실록 21 22 1661(현종 2) 孝宗大王實錄
18 현종대왕실록 22 23 1677(숙종 3) 顯宗 彰孝大王實錄
" 현종대왕개수실록 28 29 1683(숙종 9) 顯宗 彰孝大王改修實錄
19 숙종대왕실록 65 73 1728(영조 4) 肅宗顯義…元孝大王實錄 * 卷末에 補闕正誤篇 附錄
20 경종대왕실록 15 7 1732(영조 8) 景宗…宣孝大王實錄
" 경종대왕개수실록 5 3 1781(정조 5) 景宗…宣孝大王改修實錄
21 영종대왕실록 127 83 1781(정조 5) 英宗…顯孝大王實錄
22 정종대왕실록 54 56 1805(순조 5) 正宗…莊孝大王實錄
23 순조대왕실록 34 36 1838(헌종 4) 純宗…成孝大王實錄
24 헌종대왕실록 16 9 1851(철종 2) 憲宗…哲孝大王實錄
25 철종대왕실록 15 9 1865(고종 2) 哲宗…英孝大王實錄
  합계 1894 888   태백산본 실록 전체는 총 1,707권, 848책
26 고종실록 52 52   高宗…太皇帝實錄
27 순종실록 22 8   純宗…孝皇帝實錄
  합계 74 60   태백산본 실록 전체는 총 1,707권, 848책

※‘…’는 생략 표시임. 《영종대왕실록》의 정식 명칭은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실록(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實錄)》이다.

 

실록의 체제와 기술내용

1.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실록이래 대체로 일정하게 이어져 내려온 편찬의 체제와 격식이 있다. 이들을 정리해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실록의 권별 편성 체제는 1년치 기사를 한 권으로 편성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6개월, 2개월 혹은 1개월 단위로 권차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하나의 예로 성종실록은 기사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1개월 치를 1권으로 편성하였기 때문에 그 권수가 대단히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2. 대체로 실록의 첫머리에는 인물 정보를 기록하였다.
당해 국왕의 성명, 자호(字號), 부모와 출생 연월일 및 성장과 교육과정, 세자로의 책봉, (입후된 왕의 경우) 친생부모와 입후의 과정 등 인물정보를 비교적 간략히 기록하였다.

 

3. 실록 본문의 편찬체제는 기사와 사론(史論)을 연월일의 순서대로 나열하여 서술하는 편년체 역사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실록의 이러한 형태는 전형적인 연대기(年代記) 자료와 같이 보이지만 단순한 일기나 일지류의 사실 기록이 아니라 기록자 혹은 편찬자들의 비판적 안목과 사관이 많이 가미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편년체 기사와 별도로 지(志)를 붙인 것은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에만 있고, 단종실록에는 위호(位號) 복위 과정과 관련된 문헌을 부록으로 붙이기도 하였다.

 

4. 기술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매 권마다 첫줄 상단에 “○○大王實錄 卷之○○” 로 권수를 표기하고, 다음 줄부터 연월일을 적고 그 순서에 따라 본문을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연월일의 표기는 왕의 연도(年度), 계절, 달, 날짜(간지)의 차례로 쓴다. 왕의 연도는 대체로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따라 당해 왕의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쓰지만, 세조(世祖)나 중종(中宗), 인조(仁祖)와 같이 전왕의 정통성을 부인할 경우에는 즉위년부터 바로 원년으로 쓴다. 왕의 연도 표기 아래에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세주로 표시하였다. 초기의 실록에는 “春正月” “夏四月”과 같이 계절을 기록하였지만, 후기에는 대체로 생략하였다. 날짜가 바뀌거나 기사의 내용이 다른 경우에는 ○표를 넣어 문단을 분리하였다.

 

5. 본문은 큰 글씨로 빈틈없이 쓰지만, 왕이나 선왕의 어휘(御諱)나 그들의 행위를 뜻하는 용어 앞에는 한자를 띄어서 쓴다.
특별히 설명을 요하는 주석 부분에는 작은 글씨로 세주(細註)를 붙였다. 대체로 "史臣曰"로 시작되는 사관들의 논평 즉 사론(史論)은 문단 전체를 상단으로부터 한 자씩 내려서 썼다. 논평을 세주에 기록한 경우도 많다.

 

6. 당해 왕의 훙서(薨逝)로 실록이 끝난 후에는, 부록을 기록하였다.
그 부록으로 그 왕의 행록(行錄)•행장(行狀)•시장(諡狀)•애책문(哀冊文)•능지문(陵誌文) 등의 전기류 자료들을 수록하였다.
실록에 수록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정보, 외교•군사관계, 국정의 논의과정, 의례(儀禮)의 진행, 천문관측자료, 천재지변기록, 법령과 전례자료, 호구와 부세(賦稅) • 요역(役)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동향, 계문(啓聞) • 차자(箚子) • 상소(上疏)와 비답(批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실록의 찬수 때마다 일정한 범례를 만들어 기사의 취사선택에 관한 기준을 정하기는 하지만, 국정의 운영이나 사회의 동향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들이 실록에 수록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초기의 실록에는 유교적 규범의 관점에서 수록하기 곤란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실록의 기사가 정치적 내용에 치우쳐 다양성을 잃게 되고 기록이 빈약하게 되었다.

실록에서 어떤 내용을 어떤 방법으로 기록하는가의 원칙은 찬수범례(撰修凡例)로 정해진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효종실록》 편찬 때의 찬수 범례를 들 수 있다. 실록에 수록되는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효종실록 찬수범례(實錄纂修凡例)

사관들의 시정기(時政記), 주서의 일기(注書日記) 및 내외 겸직 사관들의 기록(內外兼春秋所記) 외 비변사의 장계축(狀啓軸), 의금부 추안(推案), 형조의 중요문서(刑曹緊關可考文書), 사변추국 주서의 일기(事變推鞠注書日記)도 가져와서 참고하여 수록한다.

 

1. 사관들의 시정기(時政記), 주서의 일기(注書日記) 및 내외 겸직 사관들의 기록 內外兼春秋所記 외 비변사의 장계축(狀啓軸), 의금부 추안(推案), 형조의 중요문서 刑曹緊關可考文書, 사변추국주서의일기(事變推鞠注書日記)도 가져와서 참고하여 수록한다.

 

2. 명신(名臣)은 ‘졸(卒)’이라고 적는다. 그들에 관한 자료가 소략한 경우에는 일반의 공론(公論)에 의거하거나, 문집(文集)•비지(碑誌)를 취하여 자세히 보완해 적는다.

 

3. 매일(每日)은 갑자(甲子)만 적는다.

 

4. 무릇 재이(災異)에 관한 것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초록한 것을 고찰하여 하나하나 갖추어 적는다. 외방의 풍우•지진과 같은 각종 재이도 반드시 그 당시의 계문(啓聞)을 고찰하여 갖추어 적는다.

 

5. 무릇 관직 임용은 한직•잡직•용관(冗官)•산직(散職) 외에는 이조•병조의 인사 문서를 다시 고찰하여 자세히 기록한다.

 

6. 대간(臺諫)이 아뢴 것 가운데 초계(初啓)의 경우는 긴요한 말을 모두 적으며, 연계(連啓) 의 경우 ‘連啓’ 라고만 적되 혹 중요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는 역시 초록한다.

 

7. 대간이 아뢴 것은 ‘憲府’, ‘諫院’ 이라고만 적고, 아뢴 사람의 성명은 적지 않는다. 그러나 초계인 경우는 성명을 갖추어 적고, 크게 시비가 되는 문제의 경우에는 발론자(發論)와 반대자를 적어야 한다. 어사(御史)들의 성명 및 출척(黜陟)•병폐처리 등도 자세히 기록한다.

 

8. 소장(疏章) 중에 긴요한 것은 자세히 모두 적되, 그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내용은 삭제해도 무방하다. 의례적인 사직 소차(辭職疏箚)는 다 기록할 필요가 없으나, 거취의 시비(是非)가 정사에 관련이 있는 경우는 적어야 한다.

 

9. 각 년의 등과인(登科人)은 ‘취기등기인(取其等幾人)’ 이라고 적는다.

 

10. 군병의 수와 경외법제(京外法制)와 호구수(戶口數)는 해당 문서를 서로 고찰하여 자세히 적는다.

 

11. 무익하고 번잡한 내용은 참작하여 삭제해서 간략하고 무게 있게[簡重]되도록 힘쓴다.

 

12. 조정의 길흉제례(吉凶諸禮) 가운데 법도(法度)에 관계되어 후세에 보여줄 만한 것은 글이 비록 번잡하더라도 갖추어 싣는다.

 

13. 관원들의 출척(黜陟)과 공사시비(公私是非)는 반드시 그 요점을 추려 적는다.

 

이상을 보면 조선시대 실록 편찬에서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내용들과 그것을 어떻게 정리하여 기록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실록 편찬과 관리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역대 임금들의 실록을 합쳐서 부르는 책 이름이다. 즉 태조강헌대왕실록으로부터 철종대왕실록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하여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대 조정에서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실록 편찬은 한 왕이 승하하고 다음 왕이 그를 계승하여 즉위한 후에 시작된다. 즉 어떤 왕의 실록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정에서 실록 편찬의 결정이 이루어지면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고 총재관(總裁官) 이하 도청(都廳)과 각 방(房)의 관원들이 임명된다. 실록청은 총재관 아래 도청과 1•2•3의 방(房)으로 나누어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해 왕의 재위 연수가 길어 편찬 분량이 많은 경우에는 방을 늘려 6방까지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 방은 순서대로 1년씩 맡는 식으로 재위 연수를 분담하여 편찬하였다. 실록청의 당상이나 낭관들은 춘추관의 사관(史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의 관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편찬할 분량이 많은 경우에는 전 조정을 망라하여 학문과 문장에 조예가 있는 관원들이 수찬관•기사관 등으로 임명되었다.

 

실록의 편찬이 공포되고 실록청이 설치되면 전국의 관원들에게 사초납부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 납부령이 내려지면 이전에 전임사관이나 겸직 사관을 역임하면서 사초(史草)를 작성하여 보관하고 있던 관원들이나 그 가족들은 모두 정해진 기한 내에 실록청에 그것을 납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수합된 사초들이 실록 편찬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체로 3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첫째 단계는 1•2•3의 각 방에서 춘추관의 시정기 등 각종 자료들 중에서 중요한 사실을 초출(抄出)하여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도청에서 초초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는 동시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초(中草)를 작성하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의 잘못을 재수정하는 동시에 체제와 문장을 통일하여 정초(正草)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 정초는 바로 인쇄의 대본이 된다. 실록 편찬에 이용되는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을 연월일순으로 정리하여 작성해 둔 춘추관 시정기(春秋館時政記)와 전왕 재위시의 사관(史官)들이 각자 작성하여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사초(史草)를 비롯하여, 《승정원일기》•《의정부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들이 동원되었고, 후세에는 〈조보(朝報)〉•《비변사등록》•《일성록》 또한 중요 자료로 추가되었다. 또 개인들의 일기나 문집 자료들이 수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록 편찬 자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관들의 사초였다. 사관은 전임사관으로 일컬어지는 예문관의 봉교(奉敎, 정7품) 2인, 대교(待敎, 정8품) 2인, 검열(檢閱, 정9품) 4인이 중심이 되었지만, 홍문관과 승정원, 규장각의 전 관원 및 6조의 각 부서에서 지명되는 1명, 8도의 도사(都事) 등 많은 문관(文官)들이 겸직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전에 입시하여 기록한 것이나 각 관아에서 수집한 자료들이 사초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사초는 임금의 언행을 비롯하여 조정에서의 국사 논의와 집행, 정사(政事)의 득실(得失), 풍속의 미악(美惡), 향토(鄕土)의 사정(邪正) 등을 보고 들은대로 직필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들 중에서 일상적인 정무와 관계되는 것은 시정기로 작성되어 춘추관으로 보내지만, 관원들의 시비•포폄 등 기밀이나 보안을 요하는 자료들은 사관들이 개별적으로 보관하였다.

 

사초는 그 내용이 보안을 요하기도 하지만, 그 것을 기록한 사관들의 신분보장을 위하여 국왕을 포함 그 어느 누구도 열람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초를 기록하고 보관한 사관 자신들도 그 내용을 누설할 경우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사초의 내용이 누설되어 참혹한 필화를 초래한 일도 없지 않았다.

 

실록의 편찬 과정에서도 사초의 관리는 매우 엄격하게 유지되었고, 편찬 당사자들도 사초나 실록의 내용에 대한 기밀 유지와 공정하고 정직한 직필(直筆)의 의무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관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직필을 기피하거나, 또는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 개서(改書)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초기부터 사초의 내용에 책임을 지게하기 위하여 그것을 작성한 사관의 성명을 기입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인종대에는 한 때 사초에 성명을 기입하지 말도록 했으나, 명종대에 그 폐단이 재론된 후 성명 기입이 규칙화되었다.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하였던 기본 자료들인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초와 중초 등은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초(洗草)되었다. 세초는 조선초기에 종이를 재생하기 위하여 사초 등의 자료를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巖) 시냇물에 담구어 씻어 내고 재활용한데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부터 종이의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세초는 대부분 소각처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완성된 실록은 특별히 건축 관리되는 사고(史庫)에 비장하였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3년에 한번씩 꺼내어 포쇄(暴灑)하였다. 이때에도 전임 사관 1인이 파견되어 일정한 규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포쇄의 과정에서도 실록의 내용이 공개되거나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조선시대의 실록은 오랫동안 심산유곡의 격리된 사고에 비장되었고,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다. 이는 국왕이나 대신들도 사사로이 열람할 수 없었으며, 오직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로만 활용되었다. 실록을 고증할 필요가 있을 때는 특별히 사관을 사고에 파견하여 현안과 관련된 부분만을 등사하여 오도록 하였다. 실록은 당대 정치의 잘잘못과 왕과 신하들의 선악•간위(奸僞) 등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그 편찬과 관리가 이처럼 엄격하였다.

 

조선시대의 실록은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이어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1431년에 《태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태종실록》 편찬 직후 조정에서는 그 보관의 중요성을 느껴 이 3종의 실록을 고려시대의 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충주사고는 민가가 밀집한 시내에 위치하여 화재의 염려가 있었으므로, 1439년 6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1445년 11월까지 3부를 더 등사하여 모두 4부를 만들어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하였다. 또한 《세종실록》부터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정초본(正草本) 외에 활자로 3부를 더 인쇄, 간행하여 위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나누어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족산본의 《태조실록》•《정종실록》•《태종실록》은 세종 때 등사하여 전주사고에 봉안했던 것으로서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으로 전해진 것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과 충주•성주 사고의 실록은 모두 병화(兵火)에 소실되었다. 다행히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전주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1592년 6월에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를 털어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모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가며 지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1593년 7월에 내장산에서 실록을 넘겨받은 정부는 이를 해주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왜란이 평정된 뒤, 국가의 재정이 궁핍하고 물자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실록의 재출판 사업을 일으켜,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인쇄, 출판하였다. 이 때 출판한 실록은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재출판시의 교정본(校正本)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갖추어졌다. 그래서 1부는 국가의 참고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의 춘추관에 두었다.

 

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깊은 산속이나 섬을 선택하여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을, 마니산에는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다.

 

그 뒤부터 실록은 5부를 간행하게 되었는데, 광해군 때 《선조실록》을 5부 간행하여 5사고에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있던 춘추관 소장의 실록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그 뒤 다시 복구되지 않아 춘추관에서는 실록을 보관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인조 이후에는 4부를 간행하여 4사고에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이 4대 사고 가운데 묘향산사고의 실록은 1633년에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後金)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가자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크게 파손되어 낙권(落卷)•낙장(落張)된 것이 많았는데, 현종 때 이를 완전히 보수하고, 1678년(숙종 4)에는 같은 강화도내의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그 뒤 철종까지의 실록이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20세기 초 조선의 마지막까지 온전히 전해져 내려왔다.

 

실록은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면서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해갔다. 그 뒤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해 간 오대산사고본은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인해 대부분 불에 타고 말았으며, 다행히 화를 면한 74책 가운데 27책(중종실록 20책, 선조실록 7책)은 1932년 5월 28일에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나머지 47책(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은 2006년 7월 7일 동경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74책을 보관하고 있다.

한 편, 태백산사고본 848책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다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1954년 다시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1985년 3월 22일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와 문화재관리국 및 서울대학교의 합의로 1985년 3월 22일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현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로 옮겨졌다. 적상산사고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그대로 소장되었으나 광복 직후의 실록 도난 사건으로 낙권이 많이 발생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소재가 불분명하게 되었는데 북한 측에서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실록은 권질(卷秩)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사회•풍속•천문•지리•음양•과학•의약•문학•음악•미술•공예•학문•사상•윤리•도덕•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