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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촌(上村) 탐방기

 (2023년 3월 5일)

종로구 자하문로 17길 12-11에 있는 상촌재는 장기간 방치된 한옥을 종로구에서 배입하여 복원 개관한 우리 문화 공간이다.

 

매천 황현이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기술했듯이 조선 후기 때부터 청계천과 종로 위쪽에 있는 마을을북촌’, ‘우대’[上垈] 혹은상촌’(上村), 남쪽을남촌혹은하촌(下村)’이라고 했다.

 

상촌(上村) 서촌(西村)과 북촌(北村)으로 나뉘는데,  동쪽의 경복궁과 서쪽의 인왕산 사이와 남쪽의 사직로와 북쪽의 창의문과 북악산 아래에 있는 통의동, 청운효자동, 통인동, 옥인동, 필운동 등의 마을을서촌(西村)’으로 불렀으나, 흔히 장의동(藏義洞壯義洞)이나 장동(壯洞)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안동(安東) ()씨들이 60 세도정치를 하고 있을 그들이 대를 이어 이곳에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안동김씨라고 부르기 보다는 장동(壯洞()씨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기도.) 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서는 세종마을(世宗마을) 불리고 있다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이곳에 문인과 예술인들이 많이 자리 잡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종로구 안국동송현동계동가회동재동화동, 삼청동 북쪽의 마을을북촌(北村)’이라 했다. 당시서촌북촌 아우르는상촌에는 왕족이나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비해,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 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후에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어, 조선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북촌과 일본인 중심의 거주지역으로서의 남촌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종로구 북촌로 11길에 있는 한옥마을은 옛 우리의 주택문화가 재현되어 있다.

 

내가 북촌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몇 년 전부터 조선 시대 이후 상촌에 살던 사람들 중에 우리 역사에 긍정적인 면에서 이거나, 부정적인 면에서, 그리고 예술 문화적인 면에서 크고 작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남긴 희미한 흔적에서 나마 그들의 삶을 만나보려고 했었다. 그래서 2018년 가을, 먼저 서촌지역을 10여 차례탐방하면서 이완용이나 윤덕영같은 거물 매국노들과, 500년 조선왕조시대를 통해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해 낸 장동 김씨 가문의 김상용, 김상헌 형제들과 많은 그 후손들도 만나보았고, 겸제 정선과,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천경자 등 이곳 서촌(西村)마을을 잠시라도 거처간 화가들과, 윤동주, 이상, 노천명 등 시인들도 만나보았다.

 

그러다가  북촌(北村) 지역을 둘러보려고 하던 차에  COVID-19 팬더믹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2년이 넘도록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어 외출을 삼가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만 있었기 때문에 나의 북촌 탐방계획이  오늘까지 미루어져 왔었다.  아직도 코로나 19와 싸우느라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는 의료진들과 행정당국에 대한 미안스러운 마음을 약간은 느끼면서도 3. 1. 절 103주년을 넘긴 3월 첫 번째 일요일인 2023년 3월 5일 아침, 마침내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하고 몇 가지 자료를 메모한 노트를 손에 들고 북촌(北村) 탐방길을 나섰다. 지하철 안국 역에서 내려 먼저 헌법재판소를 찾았다.

서울특별시 북촌로 15(제동 83)에 지금은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현대식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로 그 이름만큼의 무게로 자리잡고 있다.

종로구 북촌로 15(재동 83)에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현대식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로 그 이름만큼의 무게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1949년부터 1989년까지는 창덕여고가 이곳에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에는 실패한 개혁가 충민 홍영식(忠愍 洪英植 1855~1884)의 집을 헐고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맨 처음 지어졌던 곳도 이곳이었다. 나는 그곳 뒤뜰에 있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기도 하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1827~1830) 동안 세자가 동궁과 그의 집을 주야로 왕래하며  자주적 근대화를 함께 의논했던 개화 사상가 환재 박규수(桓齋 朴珪壽1807~1877)의 집터와 홍영식의 집터 표지석에서 그들의 개혁의지와 혁명정신을 보았고, 그리고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인 재동 백송의 몸통을 만져보면서 긴 세월 동안 험난했던 우리 역사를 지켜보았던 백송의 안타까웠을 마음도 읽었다. 또 앞 담장 옆에서 비록 자기 집은 아니었지만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을지라도 그의 흔적이 배어 있는 집터 표지석에서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 在(1851~1927)의 청렴한 삶과 애국심을 만났고, 이 주변에서 살았다지만,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3. 1. 독립운동 민족대표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고우 최린(古友 崔麟 1878~1958)의  3. 1. 정신과, 곧바로 이어진 자신의 영달을 위한 친일 반민족 행위의 보상으로 얻게 된 화려했던 삶이 과연 진정 그를 행복하게 했을까를 생각을 하면서  해방 후, 그가 반민족행위자로 재판받던 중에 같이 재판받던 이광수나 최남선이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는 식의 변명으로 일관하던 진술을 비웃으면서 "입 닥쳐"라며 벽력같이 소리치며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달라"고 했다는 그의 참회의 말을 생각하게 했다.

 

종로구 율곡로 3길 4(안국동 175-15)에서

종로구 율곡로 3길 4(안국동 175-15), 이곳은 주시경(周時經1876~1914) 선생과 뜻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1908년에 국어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한 국어 연구학회의 맥을 이은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뒤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이곳은 조선어학회 터(朝鮮語學會址)이다. 헌법재판소에서 나와 큰 길에서 헌법재판소의 북쪽 울타리를 따라 들어가는 북촌로 5길 골목길로 들어서 몇 발짝 가다 율곡로 3길(윤보선 길)로 접어들어 남쪽 방향 세 갈레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조선어학회 터(朝鮮語學會址)라는 검은 표지석을 찾았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일제의 우리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주시경 선생을 주축으로 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민간 학술단체다. 그 명칭은 [국어연구학회(1908)],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1911)], 다시 [한글모 (1913)], [조선어연구회 (1921)], 또 다시 [조선어학회 (1931)]로 이름을 고쳐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다시 [한글학회]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지금은 종로구 새문안로 3길 7, 501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곳 조선어학회 터(朝鮮語學會址)야말로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던 시기에 갖은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꿋꿋하게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어찌 보면 우리말과 글의 성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과 여기에 연루되었던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감옥살이하던 33인의 회원들과, 감옥에서 옥사한 이윤재, 한징 등  2명의 회원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분들의 우리말 발전을 위한 꾸준한 노력과 희생에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 사업, 일제에 빼앗겼던 원고를 해방 후 서울 역의 창고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일, 해방 후의 혼란과 6.25의 참상 속에서도 편찬사업을 계속하여 시작한 지 28년 만인 1957년에 마침내 [우리말 큰사전]으로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그분들의 노고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선어학회 터(朝鮮語學會址), 지금은 비록 작고 초라해 보이는 건물 앞에서 나는 선각자들의 우리글 사랑정신과, 특히 일제와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한글 전용가로 쓰기통일된 표기법을 통해 우리글 발전에 큰 획을 그었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의 위대한 정신을 만났고, 또 육영공원(育英公院)과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주시경 선생에게 한글연구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한국인 보다 한글을 사랑했던, 고종황제의 친서를 들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다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배신(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실패한 후, 자기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더 헌신했던,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리하여 지금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잠들어 있는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외국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한글과 한국사랑의 따뜻한 우정과도 만났다.

 

종로구 안국동 8-1(종로구 윤보선길 62)에서

이 집은 고종(高宗) 때인 1870년경에 민영익의 아들 민규식이 지었으며, 안채, 안사랑채, 바깥 사랑채(산정채), 대문채, 별당, 광채, 부속채 등을 포함한 민가로써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대 저택으로 건축되었다. 이후 고종이 민규식의 집을 매입하여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1861-1939)에게 하사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후 한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10년대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 1871~1944) 선생이 매입하여, 이후 4대째 윤 씨 일가가 살고 있으며 현재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이 거주하고 있다.

 

나는 이 집이 비공개 사유재산으로 되어 있어서 집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못하고 대문 밖에서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1897~1990) 선생의 삶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낸 분이다. 해위(海葦)라는 그의 호는 그가 상해에서 활동할 때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바닷가의 갈대처럼 약해 보이지만 억센 파도에도 꺾이지 않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친일 하는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유학에서 중도 포기하고 돌아와 상해로 가려는 그의 의지를 가족들에게는 숨겨야 했다. 가족들에게는 상해를 통해 미국으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속이고 상해로 갈 수밖에 없었다. 상해에서 그는 여운형, 신규식, 신익희, 이시영, 이동녕,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한 그들의 권유로 영국 유학길을 떠나기도 한다. 그의 호가 해위(海葦)여서였을까?  그는 이승만 정부의 상공부장관을 하기도 했으나, 그의 배척을 받아 장관직을 물러나 야당의 길을 가게 된다.  4.19 혁명 후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5. 16 군사혁명으로 대통령직을 물러나 군사정권에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했는가 하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또 다른 군사정권에는 그의 부인이자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던 공덕귀 여사와 두 아들의 반대설득에도 불구하고 [국정자문위원]으로 협력하기도 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종로구 북촌로 5 48 (화동 2) 정독도서관에서

종로구 안국동 율곡로 3길(윤보선 길)에서 나와 북촌로 5길로 나오니 북쪽으로 곧바로 서울시교육박물관 건물이 보인다.  서울시립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의 부속시설로 교육자료들을 수장, 전시하는 시설이다. 박물관에는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 도서관으로 들어가니 넓은 운동장 뒤편으로 옛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그대로 도서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보인다. 19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4년제 관립 한성중학교(漢城中學校)로 시작되었던 현 경기고등학교가 1976년 강남으로 이전됨에 따라  1977년부터 학교 건물을 서울시가 인수받아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살던 김옥균의 집을 먼저 찾아보기로 하고 교육박물관 뒤 그의 집터 표지석을 찾는다. 갑신정변의 주인공들이 이곳에 있던 김옥균의 집에 모여 비밀리에 개혁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서재필, 김홍집의 집도 김옥균의 집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는데 그 표석은 찾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던 '을사5적'의 한 사람인 박재순의 흔적만 입구에서 발견한다. 그의 집은 도서관의 본 건물과 가까이 있었다는데, 그 우물돌을 정문 쪽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운동장 가운데쯤에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년~1759년)의 '인왕제색도' 그림을 크게 확대하여 세워놓았다. 이곳이 이 그림과 무슨 관계되는 사연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정독도서관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다 입구에서 성삼문의 집터였다는 표석을 또 만나게 된다. 나는 이곳에서 찾은 그들의 흔적에서 그들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본다.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1418~1456)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히는 인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옥중에 갇혀 불에 달군 쇠로 다리에 구멍을 뚫고, 팔을 자르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는 그분이 감옥에서 썼을 이 시조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암송하던 몇 시조 중의 한 시조였지만, 지금은 잊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분의 집터 표석에서 성삼문이라는 이름을 보자 퍼뜩 이 시조가 떠올랐다. 

1456년 대역죄인으로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지만,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직, 홍섬, 이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육신 전〉 으로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후 이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사후(死後) 235년,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 하는데, 현재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 그곳이다. 나는 "금일의 역적이 훗 날 충신이 될 것이다"는 말을 떠올리며 당시 그가 살았던 집의 정경을 상상해 본다.

 

겸재 정선(謙齋 鄭歚 1676년~1759년)의 인왕제색도가 정독도서관의 운동장에 세워져 있는 사연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그의 삶의 한 부분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교정)에서 몰락한 양반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더구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처지였기에 그는 화가로 생계를 이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양반(노론) 집안이어서 어린 시절에 같은 마을 노론 집안의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년)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고, 장성하여서는 김창흡의 형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도움으로 도화원 화가로 시작한 벼슬길에도 오르게 되어 영조의 신임까지 얻게 되었다. 

 

1751년 당시 75세였던 겸제는 인왕산 기슭 취록헌(翠麓軒)에 살던  60년 지기 절친인 시인(詩人)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이 병석에 눕자 그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와 병석의 친구가 비 갠 인왕산의 산뜻한 모습처럼 병을 떨쳐내고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그린 그림이 바로 인왕제색도인데, 인왕산의 모습을 가장 좋은 장소에서 바라보기 위하여 찾은 곳이 바로 지금의 정독도서관 앞 운동장의 중간쯤 되는 곳이어서 그가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위하여 인왕산의 모습을 오랫동안 서서 바라보았던 곳에 그림을 세워놓은 숨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인왕제색도를 완성한 4일 후에 친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돈독한 우정을 이어가며 시와 그림을 주고받으면서 그의 그림에 이병연이 시를 썼고, 친구의 시에 정선은 그림을 그려주면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북송 때의 화가 곽희(郭熙 1023~1085)의 명언을 실현하며 서로의 재능을 알고 아껴주던 우정의 흐름은 거기까지였고,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창시자 정선도 그 8년 후 수많은 명작들을 우리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