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관악구분원장, 전 서울시지원 제2문화이사)
-영조(英祖)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彰義宮) 터 이야기-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4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 쪽으로 걷다보면 고궁박물관 정문이 보이고 그 길 건너의 통의동 35번지 일대가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이 있던 곳이다. 창의궁이 있기 이전에는 이곳에 효종의 딸인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1696)가 우의정 정유성의 손자 정제현과 1653년(효종 4년)에 혼인하면서 효종이 매우 크고 화려하게 집을 지어 살게 했다. 숙휘공주((淑徽公主)는 현종의 누이동생이자 숙종의 고모로 아버지인 효종과, 오빠인 현종과, 조카인 숙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불운했던지 남편과 아들을 먼저 잃고, 1696년(숙종 22년)에 50대 중반의 나이에 그녀마저 죽게 된다.
창의궁(彰義宮)과 양성헌(養性軒)
숙종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3명은 일찍 죽고, 세자(경종)와 연잉군, 그리고 연령군만이 남았기에 숙종의 자식 사랑은 지극했다고 한다. 특히 연잉군의 관례와 가례가 극히 호화스러웠다고 한다. 연잉군은 1703년 10세에 관례를 올리고 1704년 달성 서 씨와 가례를 올렸으나 한동안 집을 구하느라 궁궐에 머물기도 했다. 연잉군은 어머니인 숙빈 최 씨 소유의 이현궁을 함께 쓸 수도 있었으나, 숙종은 연잉군에게 따로 궁을 마련해 주기 위해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중 숙휘공주의 집을 당시의 돈으로 거액인 2,000냥을 주고 사들였다. 연잉군은 혼례를 올리고 8년 후인 1712년 2월 12일 거처를 사제(창의궁)로 옮겼다. 그리고 숙종은 특별히 창의궁의 집 이름을 ‘양성헌(養性軒)’이라 했다.
영조의 호가 ‘양성헌’인 것은 이 때문이다. 연잉군은 경종의 왕세제가 되는 1721년 8월까지 9년 반을 이곳에서 거처했다. 창의궁에 사는 동안 연잉군과 부인 숙빈 서 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후실 정빈 이 씨에게서 요절한 큰딸 화덕 옹주와 1719년 경의군(효장세자)과 1720년 화순옹주를 얻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화가 영원하지 못하듯이 인간을 위하여 지어진 궁궐의 운명도 인간의 영화와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이 현실인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수없이 보아왔다. 오직 후세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기고, 그곳에 표석을 세워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게 할 뿐이다. 이렇듯 창의궁도 1900년에 폐궁 되었고, 1908년 일제가 그곳에 동양척식회사의 사택을 지었다. 다시 1949년에 필지가 분할되어 태창산업주식회사가 들어서기도 했으며, 총면적은 21,143평방미터, 즉 6,396평이 2011년 현재 108개 필지로 분할되어 창의궁 터의 흔적은 그 모습을 온전하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월성위궁(月城尉宮)과 천연 기념물이었던 백송이야기
연잉군은 이곳에서 평범한 왕자로 살았으나 경종이 후사가 없어 왕세제가 되었고, 따라서 궁궐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 뒤로 연잉군의 집은 창의궁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연잉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잠저(潛邸)가 되었다. 영조는 조선의 왕 중 장수한 왕으로 꼽히며, 51년 7개월 동안 재위하며 오랫동안 권좌에 있었다. 궐 밖 출입도 많이 했는데, 특히 어머니 숙빈 최 씨가 그리울 때는 창의궁에 나와 어머니를 추모하기도 하였고, 1732년(영조 8년)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혼인한 화순옹주를 2년 동안 궁에서 머물러 살게 하였다가 1734년(영조 19년) 창의궁에 따로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 이른바 월성위궁이다. 이때 이곳에 당시로서는 희귀한 중국에서 들여온 백송을 심게 하였다고 한다. 이 백송은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소유주는 최창학으로 그 손자 최동진이 백송과 주변 터 약 129㎡(39평)를 1975년 문화재관리국에 기증했다. 1990년 7월 17일 백송이 강풍을 동반한 벼락을 맞고 쓰러져 ‘백송회생대책위원회’까지 조직되어 살리려고 애를 썼으나, 1992년 고사하여 1993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지금은 죽은 그 백송 그루터기 옆에 세 그루의 2세 백송들이 자라고 있다. 백송이 고사한 후 ‘나이테 측정 방식’을 사용하여 백송의 나이를 측정한 결과 백송의 나이는 약 300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백송은 1690년에서 1700년대 초반에 중국에서 3년 정도 자라다가 조선에 들어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성장해 300여 년을 창의궁의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한 것이다. 이곳에서 연잉군이 살기 시작한 것이 1712년이니 백송은 그 이전인 숙휘공주가(家)이던 시기에 이미 이식되었거나, 연잉군의 궁이 되고 난 뒤에 이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창의궁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뎌냈을 백송은 현재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300개의 나이테가 역사의 기억을 소리 없이 말해주는 듯싶다. 참고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증손자가 되며 추사도 젊은 시절 이 월위궁(月城尉宮)에서 살았다.
그러나 화순옹주는 1758년(영조 34년) 월성위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슬퍼하며 곡기를 끊었고,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아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여러 자식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사랑하던 자식을 잃은 영조의 비통한 심사와 군주가 취할 도리가 <화순옹주 졸기>와 옹주의 상(喪)에 가서 예조판서의 정려(旌閭) 요청을 거절한 대목에서 잘 나타나 있어 여기 옮겨본다.
<화순옹주 졸기>
화순옹주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바로 임금(영조)의 첫째 딸인데 효장세자의 동복누이동생이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시집가서 비로소 궐문을 나갔는데, 심히 부도(婦道)를 가졌고 정숙하고 유순함을 겸비하였다. 평소에 검약을 숭상하여 복식에 화려하고 사치함을 쓰지 않았으며, 도위(都尉) 김한신과 더불어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항상 깨끗하고 삼감으로써 몸을 가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진 도위(都尉)와 착한 옹주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 고 하였는데, 도위(都尉)가 졸하자, 옹주가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그 집에 친히 거동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곧 토하니, 임금이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돌아왔는데, 이에 이르러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되어 마침내 자진(自盡)하였다.
화순옹주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이때 예조판서 이익정이 옹주의 절의를 기리고자 정려(旌閭) 할 것을 청하자, 부인으로서의 정절을 지켰다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불효하였므로 도리에 어긋난다며 청을 거절하였다.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 앉아서 자식의 죽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거듭 타일러서 약을 먹기를 권하니, 옹주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시니 어찌 억지로 마시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며 조금씩 두 차례 마시고는 곧 도로 토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을지라도 결심한 바가 이미 굳어졌으니, 차마 목에 넘어가지 아니합니다.’ 하기에 내가 그 고집을 알았으나, 본심이 연약하므로 사람들의 강권을 입어 점차로 마실 것을 바랐는데, 끝내 어버이의 뜻에 순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마침내 이로써 운명(殞命)하였으니 정절(情節)은 있으나 효(孝)에는 모자란 듯하다. 그날 바로 죽었으면 내가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마는 열흘을 먹지 않아 내 마음이 많이 괴로웠다. 아까 예조 판서가 정려 하는 은전을 실시하라고 청하였는데, 그 청함은 잘못이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 하는 것은 자손에게 법을 주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뒤에 폐단 됨이 없지 아니하다.” 《영조실록》 91권, 영조 34년(1758년 청 건륭(乾隆) 23년) 1월 17일 (갑진)
효장묘(孝章廟)
1712년 연잉군은 세제로 책봉된 후 장자 경의군과 달성군부인(정성왕후) 등 가족과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3년 후에 경종이 죽자 즉위하여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첫째 아들 경의군은 세자(효장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효장세자가 영조 즉위 4년 후인 1728년 10세로 요절한다. 1729년 효장세자가 어린 시절에 살던 창의궁에 그의 사당 '효장묘(孝章廟)'를 세웠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소묘(懿昭廟)
효장세자 사후에 1735년(영조 11)에 영빈 이 씨에게서 왕자 선(愃, 사도세자)이 태어났는데, 그날로 내전(정성왕후)의 아들로 취해 원자로 봉했다. 그리고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는 1750년(영조 26) 의소세손 정(琔)과 1752년(영조 28) 훗날의 정조가 되는 산(祘)을 낳았는데, 장자인 의소세손이 3세에 죽었다. 영조는 원손의 시호를 ‘의소(懿昭)’라 하고 몸소 행록과 지문을 지었으며 재실(梓室)의 상(上) 자와 묘표(墓表) 앞, 뒷면을 모두 손수 썼다. 앞면에는 ‘조선의소세손지묘(朝鮮懿昭世孫之墓)’라 썼으며, 뒷면의 어제문(御製文)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즉조 26년 경오 8월 27일에 탄생하여 임신 3월 초 4일에 졸하니, 아! 나이 겨우 세 살이다. 5월 12일에 양주의 안현 남록 사향원에 장사 지냈다. 아! 이것이 우리 세손의 생 졸이다. 전면의 대자(大字) 후면의 음기(陰記)를 모두 손수 썼다. 모든 의물을 수효도 줄이고 제도도 줄였으니 뒷사람으로 하여금 내 손자를 위하여 묘를 보고 눈물을 흘리게 함이다.”
영조는 세손의 장사를 지낸 후, 창의궁 효장묘(廟)에 거동했다. “때가 되면 의소묘(懿昭廟)를 여기에 세워야겠다. 3년 뒤에는 먼저 그 궁의 정당(正堂)에 들게 했다가 사당으로 들어간 뒤에는 전사청(典祀廳)과 여러 대청을 모두 겸용하게 할 터이다. 사당을 지을 처소를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살펴본 뒤에 도면을 그려 뒤에 참고가 되도록 하라.” 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豊沛-고향)와 같은 곳인데, 아들과 손자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더욱 처량하구나.” 그리고 영조는 효장묘의 1/5로 축소된 규모와 비용으로 의소묘를 영건하도록 지시하였으며 9월 29일 완공했다.
영조 사후에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의 아들로 왕이 되었다. 정조는 등극 후 양부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숭하고 창의궁에 있던 효장묘를 종묘로 이전했다. 그리고 효장묘 자리에 의소묘를 옮겼으며 고종 때인 1870년에는 의소묘를 '영소묘(永昭廟)'로 고쳤다.
정조(正祖)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문희묘(文禧廟)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1782~1786)가 5세에 죽자 묘(廟)를 ‘문희(文禧)’로, 묘(墓)를 ‘효창(孝昌)’이라고 했다. 효창묘(墓)는 처음에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사적 제330호) 자리인 율목동에 있었다. 문효세자의 생모 의빈 성씨 역시 아들의 죽음을 상심하다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 효창묘 왼쪽 언덕에 묻혔다. 효창묘는 고종 7년에 ‘효창원’으로 승격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문호묘
1830년에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시호(諡號)는 ‘효명(孝明)’, 묘호(廟號)는 ‘문호(文祜)’, 묘호(墓號)는 ‘연경(延慶)’으로 하여 양주 천장산 좌측 유좌(酉坐)로 향한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연경묘는 의릉 왼쪽 언덕(현재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 종합학교)에 있었다.
이렇게 창의궁은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 손자 의소세손, 증손자 문효세자와 고손자 효명세자의 사당이 되었다. 이후 효장세자와 효명세자는 왕으로 추존되면서 신주를 종묘로 이전하여 창의궁에는 의소묘와 문희묘만 남아 있다가 1900년에 영희전으로 옮기면서 창의궁은 폐궁되었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만 그 흔적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