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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詩 誕生 이야기

 

 나그네

-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芝薰)에게 -

박목월(朴木月)

()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상아탑] 5(1946 4월호) -

해설

이 시에는 이런 이야기가 얽혀 있다. 1942년 박목월은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문장]지의 추천을 받았던 시인 조지훈의 편지였다. 두 사람은 경주에서 이름을 쓴 깃대를 들고 만난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이후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때 지훈은 목월에게 <완화삼(玩花衫)>(꽃을 취미로 즐겨 구경함이라는 뜻)이라는 시를 써서 준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놀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이 시가 계기가 되어 <나그네>란 시도 세상에 나왔다. <나그네>의 앞 부분에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지훈에게'라는 구절이 있다. 그래 그런지 시 내용도 위의 <완화삼>과 많은 부분 닿아 있다.

'나그네'는 일제 말기 암울한 상황에 처한 우리 민족의 총체적 얼을 상징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 바 있다. 시대 상황과 연결시켜 볼 때, 비난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짧은 시행(詩行), 몇 개 안 되는 어휘로 이만한 작품을 만들어 낸 박목월의 언어 경제는 놀라운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나, 75조를 기조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따라서 민요적인 가락을 지니고 있어 우리의 감각에 익숙하다. 박목월의 초기 시는 주로 이와 같은 리듬과 향토적이고도 자연적인 소재로 형성되어 있어, 소월 시 못지않게 우리에게 친근미를 준다.

 

감상

박목월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상아탑](1946. 4)에 발표되었다. 5 10행 수미쌍관의 짤막한 시형으로 되어 있다. 시속의 나그네는 길은 외줄기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술 익는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방랑의 고독한 운명에 놓여 있다. 이러한 나그네의 고독감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외줄기 길을 정처없이 가야 하는 나그네의 처지와 저녁놀을 배경으로 한 마을의 평화로운 경치가 대조를 이루면서 나그네의 외로움은 더욱 배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는 그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고 있다. 즉 속세에 대한 미련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 없이, 구름 속에 달이 가듯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의 처지는 고독하지만 슬프거나 비참하지는 않다. 여기서 나그네는 자신의 운명에 초연하며 속세를 떠난 이의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는 박목월의 초기시에서 나타나는 자연친화 사상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박목월은 일제 말기의 어둠 속에서 자연에 몰입함으로써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는데, 시 속의 나그네가 마을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박목월의 입장을 연상시킨다. 또한 박목월의 초기시는 시인의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서경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의 시가 풍경화 같은 인상 이상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이러한 서경성이 결국 하나의 서정 속에 용해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한 연에 포인트를 두어 독자의 시선을 유도하고 감동을 응집시킨다. <나그네>의 경우 이 감동은 나그네와 마을을 대비시킨 34연의 긴장에서 나온다. 시인은 이 부분에서 나그네의 고독함을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표현으로 응축시킴으로써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 시의 작가는 소위 청록파라고 불리는 시인군에 속하는데, 청록파 시인들은 일제말기 암흑의 현실을 피해 자연에서 위안처를 구했다. 이 시 <나그네>도 자연과 인간이 조화 일치된 한국적인 고유한 풍물과 정서를 간결한 리듬과 언어의 절약 속에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시의 특징은 제2연과 제5연에서 반복된 자연조화의 시풍과 그 수법에 있다.

아내가 정성스레 다듬어 준 옥양목(?) 두루마기를 가볍게 입고 먼 길의 나그네가 되어 가는 맑은 한국인을 아직은 양복의 멋을 모르는 한국의 모습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간다고 자연에서 터득한 무르익은 수법으로 묘사해 보여 주고 있다. 이 경우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가는 나그네로부터 연상작용에 의해 얻어진 이미지이다.

맑고 가볍게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그저 맑고 가볍게 간다라고만 진술하면, 그 맑고 가벼운 동작이 그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비유를 들어 구름에 달 가듯이라고 이미지로서 보여주면, 그 동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탁월한 이미지의 수법을 이 작가는 의식적인지 자연발생적인지는 모르나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구사하고 있다.

이 시와 이 시가 생산된 시대와를 결부시켜 생각할 때, 이 시는 그 시대의 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 시가 생산되던 1940년대의 전반은 전원이고 도시고 발악적인 전화(戰火) 속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은 그림자조차도 발견학기 곤란하였을 때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한국미에서 추출한 풍물도(風物圖)이지,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서의 산 풍물은 아니다.

 - 김현승 : <한국 현대시 해설>(지학사.1981) -

 

우리나라 민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구름 가네. / 구름 가네 / 그름 속에 선녀 가네. /

그 선녀야, 안 옷섶에 / 울향 냄새 절로 나네.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를 이 민요와 비교할 때, 우리 전래의 민속적 서정과 얼마나 접근해 있는가를 능히 알 수 있다.

강나루와 그 나루 저쪽의 밀밭 사이를, 괴나리봇짐을 지고 스적스적 가는 나그네는 꼭 구름 속의 달 같다. 길은 남도 3백리 외줄기로 잇닿아 있다. 나그네의 길은 멀다. 그러나 나그네는 줄달음질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교통수단은 옛날, 아니 193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가 도보였다. 신발은 주로 짚신이었다. 이 짚신 바닥은 적당히 축축해야만 오래 간다. 그래서 한 5리의 반쯤 가면 길 옆 도랑가나, 물이 질척질척한 곳에 짚신 바닥을 축이는 곳이 있다. 모든 길손은 한겷같이 그곳에서 짚신을 축이고 간다. 습기가 적당한 흙바닥에는 짚신을 축이는 나그네들로 하여 자국이 나 있다.

이처럼 하루에 몇 변씩 짚신을 축여 가며, 또는 괴나리봇짐 뒤에 단 새 짚신을 갈아 신어가며, 나그네는 하루, 이틀, 열흘 길을 간다. 지나는 마을마다 동구 밖에는 주막이 있다. 외진 고갯마루나 마을에서 먼 길모퉁이나, 나루터에도 주막이 있다. 나그네는 목이 마르면 입잔 한 잔으로 목을 축인다. 주량이 있으면 곱빼기로 마신다.

주막 추녀에는 짚신이 걸려있다. 먼 길을 가는 나그네는 짚신이 모자라면 여기서 사서 보충한다. 여기서 파는 짚신은 부지런한 주막집 주인이나, 마을의 부지런함 농부, 또는 머슴이 삼아서 파는 것이다.

술이 잘 익을 때면, 그 집 근처에 가면 술 냄새가 후끈 난다. 그 집이 길가 집이면 지나가는 나그네의 코끝에도 이 향기 나는 술내는 와서 닿아 군침을 돌게 한다. 밀은 자라서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인다. 이 또한 향기로운 술과 인연이 깊다. 밀이 익는 계절은 노을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5월의 꽃구름이란 말도 있다.

시인은 향토적인 자연과 서정을 지순(至純)하고 유미적(唯美的)이며, 애모(哀慕)의 각도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전래 민요의 가락에 실어 노래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오래오래 간직해 온 자연을 보는 눈이요, 느끼는 감정이요, 그리움의 정()인 것이다.

여기에 이 시의 독특한 인생관, 나그네처럼 담담하게, 그리고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달관(達觀)한 인생관이 복합되어 자연과 인생이 혼연하게 동화되어 있다.

- 권웅 : <한국의 명시 해설>(보성출판사.1990) -

 

이 시는 조지훈이 `목월(木月)에게' 라는 부제로 쓴 시 <완화삼(玩花杉)>에 대한 화답시이다. 화답시답게 <완화삼> 중 한 구절인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를 부제로 달았다. 두 시의 주제는 모두 물길을 따라 가듯이, 구름에 달 가듯이 달빛 아래 길을 가는 나그네이다.

나그네는 어느 곳이든 오래 머물러서 살거나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가는 길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끝이 없다. 나그네는 끝도 없고 정해진 길도 없이 밤 하늘에 달이 구름 속을 지나가듯 자연스럽게 지나간다. `강나루'도 지나고 `밀밭길'도 그저 자연스레 지나간다. `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말은 구름이 달을 지나가는 것인지 달이 구름을 지나가는 것인지 모르게 자연스레 지나는 나그네의 걸음과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나그네의 길은 다른 길로 가거나 혹은 가지 않거나 하는 선택이 없는 외길이며 그 한 줄기 외로운 길은 우리의 남도 즉, 충청, 경상, 전라로 향하고 있다.

끝없이 길을 가야 하는 나그네의 고독한 운명이 간결한 두 줄 형식으로 잘 드러나 있는 이 시에는 `강나루', `밀밭길', `남도' 등의 토속적인 시어가 `술 익는 마을'이라는 정감 어린 풍경과 잘 어우러진다. 집에서 담가 익히는 술은 나그네의 음식이 아니다. 몇 달 몇 년을 내다보고 담그고 익히는 술은 농경 정착인들의 음식이다. 아마도 나그네의 고향 집에서도 술을 담곤 했을 것이다. 때문에 술 익는 냄새는 나그네의 향수와 회한을 함께 불러일으키고, 술 냄새와 어우러진 `타는 저녁 놀'은 후각과 시각으로 나그네의 향수와 고독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시를 굳이 일제치하기의 우리민족의 유랑의식과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술이 익는 마을의 풍요와 평화의 정취와 근거지 없이 유랑해야 하는 나그네의 고독과 쓸쓸함은 대비되어 더욱 두드러진다.  

- 이상숙 : <한국의 현대시>(대한교과서.1996) -

 

나그네는 어떤 곳에 마음을 두지 않기에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날 수 있다. 그러기에'흐르는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같은 비유가 적당한 것 같다. 만일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까? 사람을 크게 그리고 강나루나 밀밭길은 작게 그릴까? 우리가 동양화에서 많이 보았던 것처럼 강과 산 길이 있고, 사람은 아주 조그맣게 그릴 것이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는 바로 그런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1연을 읽으면 나그네의 여정을 알 수 있다. 나그네는 강나루를 건너고 밀밭길을 건너서 유유히 가고 있다. 번잡한 도시의 길이 아니다.

2연은 나그네의 모습을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구름에 달가듯 가는 나그네'. 달이 가는 것인지, 구름이 가는 것인지 모르게 두 사물은 자연스럽게 비껴간다.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3연은 나그네가 가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외줄기로 뻗은 먼 길이다. 남도란 경기도 이남의 충청, 전라, 경상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시의 '남도' 꼭 어떤 특정한 지역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쭉 뻗은 시골길'이라 할 수도 있고, '계속 가야 하는 인생길'이라 볼 수도 있다.

4연에서 말하는 술 익는 마을은 어쩌면 나그네가 머물 수 없는 꿈의 마을인지도 모른다. 술 익는 마을, 타는 저녁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인상은 풍요와 따스함이다. 그러나, 그 마을은 나그네의 마음에 잠시 노을처럼 여운을 남길 뿐이다. 4연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제에게 억압받던 당시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주식도 없는 시대에 술 익는 마을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라는 비판도 있기 때문이다.

5연은 3연을 반복하고 있다. 구름에 달이 가는 것처럼 유유히 자기의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명사형으로 끝냄으로써 여운을 두고 있다.

김종길은 이 작품을 한국 낭만시의 정상에 이른 시라고 평을 하고 있다. 이 시 역시 그의 초기 시작의 태도인 향토의 자연과 운율 실험이 행해지고 있는 시이며, 그의 초기의 이러한 향토성은 김동리에 의해 지나치게 편협하고 특이하다고 비판을 받고 있으나, 그 향토성은 정한모(鄭漢模)에 의하면 향토적이면서 향토적인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 있는 상징적인 실재로서의 한국적 자연이라고 한다.

박목월의 자연이 향토적이며 보편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그의 자연이 환상적인 자연이며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자족적(自足的) 자연임은 분명하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은 관념적 풍물도(風物圖)이지 당시 현실의 풍물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시의 최대 과제였던 ()를 어떻게 시로 승격시키는가의 문제가 이 시에서도 제기되어 있으며, 그는 소월과 다르게 간결한 표현, 서술어미나 의미의 적당한 생략에서 오는 여백이 주는 함축을 통해 요()의 단조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 김윤식 : <한국 현대문학 명작사전>(일지사.1982) -

 

<완화삼>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가 이 시에 와서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변화되었다. 박목월은 청록파 혹은 자연파로 불리는 시인으로서 그 유파의 이름에 걸맞게 <나그네>에도 시인 특유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우리는 1940년대의 상황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일군(一群)의 시인들이 등장하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주권을 상실한 민중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주권을 잃고 '나그네'로 전락한 백성으로서 국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한 방편이었을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관심이 이해는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자연'은 생산 현장으로서의 우리 농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관념 속에서 미화(美化)된 이상적인 자연이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이 시는 간결한 언어로써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려내고 있다.

두 번이나 반복된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인간은 자연에 비유되어 행운유수(行雲流水)하는 유유자적함을 보여 준다. 주인의 자리를 빼앗기고 나그네 신세가 되어 떠돌 수밖에 없는 이의 슬픔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강나루를 건너 밀밭 사이로 난 외줄기 길을 삼백 리나 걸어가서 만난 것은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이다. 이 낭만적인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는 하다.

박목월 시인의 언어 경제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다. 잘 익은 술의 빛깔을 연상케 하는 저녁 놀, 그밖에 색채감을 느끼게 하는 어휘들, 명사로 끝냄으로써 연과 연 사이에 여백을 주는 솜씨 등이 돋보인다.

 

김종길에 의해 "우리나라 낭만시의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이 시는 75조의 음절수를 기초로 한 3음보 율격의 민요조 가락과 친근한 우리말 구사, 그리고 간결한 표현 방법을 사용하여, 체념과 달관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많은 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목월의 대표시 중 하나이다.

이 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는 2연과 5연에 반복되는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이다. 본래 '나그네'는 떠도는 구름의 심정으로 여기저기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으로, 구름을 따라 흘러가는 달과 함께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난 동양적 해탈의 경지를 표상한다. 유유자적하고 행운유수(行雲流水)한 서정을 짙게 풍기는 이 '나그네'는 작품이 쓰인 식민지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체념과 달관을 뜻하는 동시에, 현실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인 자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시는 시대 현실을 외면한 도피성의 문학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

강나루를 건너가면 밀밭 사이로 외줄기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고적한 풍경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강의 푸른색과 밀밭의 푸른 색조가 어울려 짙은 색감을 드러내며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리고 외줄기 길에서 느껴지는 나그네의 고독은 삼백 리로 더욱 깊어진다. 여기서 '삼백 리'는 실제적 거리라기보다는 화자가 느끼는 고독한 정감을 나타내는 추상적 거리를 의미하며, ()이란 수() 역시 한국적 정감을 나타내는 친숙한 숫자로 향토적 분위기 형성에 이바지하고 있다. 외줄기로 길게 뻗어 있는 쓸쓸한 황토길을 밟으며 술 익는 어느 마을을 지날 때, 마침 서산 하늘 가득히 타고 있는 저녁 노을이 고독한 나그네의 가슴을 온통 서럽게 불태우고 있다. 이렇게 노래되고 있는 자연 풍경은 분명 한국인의 의식 속에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정감 어린 정경이다.

이 시는 '강나루' '밀밭길' '' '저녁놀'로 시상이 발전되고 있는데, 이것은 술의 재료인 ''에서 실제의 술인 '술 익는 마을', 그리고 익은 술빛을 연상하게 하는 '저녁놀'로 이미지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술 익는 마을'(서정) '타는 저녁놀'(서경)의 조화로 자연과 인간이 동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푸른색과 붉은색이라는 색채의 대비와 함께 후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한층 더 승화된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1연의 '밀밭 길' 3연의 '외줄기 길'로 변형, 발전된 것은 밀밭길의 '아름다움'이 남도 삼백 리로 뻗은 외줄기 길의 '고독'으로 변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고독한 ''과 그 길을 가는 '나그네' 사이에 '저녁놀'이 타고 있는 것에서 나그네의 고독한 길이 단순한 고독으로 그쳐 버리는 것이 아닌, 술과 관련되는 황홀 속에 번져 가는 차원 깊은 고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는 1연을 제외한 나머지 연을 모두 명사형으로 끝맺고 있는데, 이것은 연과 연 사이에 여백을 줌으로써 시상을 함축하여 각 연 사이의 유동성을 막고 감동의 여운을 주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리듬과 향기 빼어난 우리말의 풍요로움

밀밭이 구름이라면 나그네의 모습은 

­­­­마을의 자 운율은 발걸음 리듬과 같아

인간나그네­시간저녁놀­공간마을)3요소의 신비한 결정

한국말 가운데 아름답게 들리는 말은 대개가 다 세 음절로 되어 있다. 거족적으로 치렀던 행사 때마다 새롭게 등장한 조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 올림픽의 호돌이’, 대전 엑스포의 꿈돌이 도우미가 그렇다. 유행가 가사나 시에서 사랑을 받아온 나그네란 말 역시 세 음절이다. 더구나 유음인 자가 앞뒤로 포개져있어 음색도 곱고 부드럽다.

이 세 음절의 미학을 최대한으로 살린 것이 박목월의 <나그네>이다. 그의 시에서는 나그네라는 말이 강나루’ ‘밀밭길과 같은 낱말들과 세 음절을 기저로 한 리듬을 타고 그 말의 아름다움이 더욱 증폭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목월은 나그네를 음악적 휴지부로 삼고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시행에서 나그네라는 말은 맨 마지막 자리에 못 박혀 있다.

그렇다. 나그네는 최종적인 울림으로 못 박혀 있는 종지부다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와 같이 한국말의 종결어미는 모두 로 끝난다. 그래서 현재형이든 과거형이든, 혹은 미래든 글의 끝에 이르면 언제나 다­­다의 기관총 소리를 낸다. 그러니 시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운의 효과와 변화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시는 그만두고 산문이라 할지라도 한국말로 글을 쓰다보면 누구나 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목월은 단조롭고 멋없는 의 종결어미를 그야말로 깨끗하게 종결시켜 버린 것이다. <나그네>의 시행은 총 10행이지만 로 끝나는 행은 단 한 개도 없다. ‘나그네’ ‘삼 백리’ ‘저녁 놀 등 모두가 다 체언으로 끝나 있다. 그래서 시각적 이미지만이 아니라 박목월의 나그네는 의 돌뿌리에 채이는 법 없이 달처럼 조용히 무중력 상태에서 떠서 흘러간다.

시의 음악성만이 아니다. 강나루(강물 밀밭길 술 익는 마을로 이어져 가는 공간의 이미지는 남도 삼백리의 외줄기의 길로 이음새 없이 연결된다. 그리고 타는 저녁놀에서는 아침해가 떠서 지기까지 온종일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의 지속하고 있는 시간이 내일 모레로 순환하는 시간으로 이어져간다.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이음새를 보면 그것을 결코 산문적인 의 종결어로는 아우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을에서 마을로 황혼에서 황혼으로 끝없이 이동하고 지속하는 그 시간과 공간의 궤적(토포로지)을 스냅숏으로 찍은 원거리 풍경. 그러기 위해서는 초점거리는 무한대로 놓아야 하며 셔터는 열려져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땅과 하늘을 나란히 놓은 비유법.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모습이 떠오른다. 밀밭이 구름이라면, 나그네의 모습(둥근 머리)은 달인 것이다. 그리고 달과 같은 나그네의 동작을 유포니(유쾌하고 듣기 좋은 소리)로 나타낸 것이 ’ ‘’ ‘’ ‘’ ‘’ ‘마을과 같은 자로 끝난 시어들이다. 그래서 <나그네>의 음운 조직은 곧바로 나그네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구름에 달가듯)와 부합한다. 나그네의 시적 리듬은 바로 나그네가 길을 걷고 있는 도보의 리듬과 일치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의 음이나 이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의미의 요소이다. 시에 있어서의 소리가 의미의 메아리라면 그 이미지는 의미의 그림자인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그 메아리와 그림자를 가로질러 의미의 심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그네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 본래 나그네라는 말은 나간이’ ‘나간 사람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차원에서 보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나그네를 뜻하는 영어의 트러벨러(traveller)가 고통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나그네는 길고생을 함유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하물며 도보의 여행자, 그리고 농경시대의 정주형 문화 속에서 살았던 나그네의 함축적 의미는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시적 차원으로 보면 그 고통과 외로움과 물질적인 결핍마저도 새로운 의미로 역전된다. 산문적 의미로 보면 김삿갓은 거지이지만, 시적 차원에 놓으면 사랑 받는 방랑 시인이 되는 것과 같다. 나그네는 집을 나간 가출자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가 된다. 나그네의 한발짝한발짝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풍경을 펼쳐가는 보행이다. 운명과도 같은 지평의 둘레는 나그네의 보행에 의해서 변화하고 물질의 결핍은 오히려 가벼운 봇짐이 된다. 멈추지 않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 모든 방향으로 열려진 도주로(스키조라인)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그네다.

쟁기로 굳어버린 흙을 뒤엎듯이 시인은 일상적 의미의 밭을 갈아 새 흙을 들어낸다. 의미의 경작자인 이 시인의 영토에서는 모든 나그네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멀리 보인다. 그것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이며, 그 걸음이 멈춰서는 곳이 저녁놀이 타는 술 익는 마을이다. ‘술익는 마을 저녁놀’, 그리고 나그네가 최초로 하나의 의미 단위로 합성된 것은 시인 조지훈의 <완화삼>에서였다.

그 시는 목월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었고 목월이 그에 화답하기 위해 서 쓴 <나그네>에 되풀이되어 나타난 것이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그 시구이다. 저작권을 두 시인이 공유하고 있는 이 유명한 시구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가 왜 시가 아닌가를 밝혀주는 시론의 좋은 예문이 될 것이다. 동시에 시가 늘 음악적 상태를 동경하고 있으면서도 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가 항상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또 시는 어째서 의미를 창조하면서도 어째서 철학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타는 저녁 놀이 나그네와 결합되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정지된 시간이 되어 그 시적 의미가 한층 더 강렬해지고, 마을과 연결되면 술이 익어가는 평화로운 발효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저녁놀은 잔치날을 위해서 혹은 손님을 맞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정밀한 시간이 된다. 그것은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축 늘어 진 저녁놀’(엘리어트)이 아니라 술에 붉게 취한 주막의 나그네와 농부의 얼굴과 같은 것이 된다. ‘나그네’(인간)­‘저녁 놀’(시간)­‘술익는 마을’(공간) 소리 이미지 의미의 세 가지 요소로 융합한 연금술 속에서 한국말, 한국 마을, 그리고 고통스러운 나그네의 모습은 우리가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신비한 광석으로 결정한다.   

- 이어령: <다시 읽는 한국시>(조선일보.1996. 5.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