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야산 - 우중에 되돌아온 밤줍기 산행 -
9월 24일 수요일 아침 친구 達和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년 이맘때에 같이 갔던 화야산행을 다시 한번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週末의 혼잡을 피해서 週中의 한가로운 가을 산행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친구의 제의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후 4시 잠실에서 만나 양평 문호리의 친구집에서 하룻밤 쉬고 아침 일찍 출발하자는 약속을 하고, 시간에 맞춰 지하철 잠실역에 도착해 보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깜박 잊고 雨備를 갖추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도 빗줄기가 가늘어서 가로수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으니 병원에 들렀던 친구가 차를 갖고 나왔다. 작년 화야산행 때에는 더위가 체 가기 전이어서 꾀나 땀을 흘리며 올라갔던 기억이 새로운데, 금년은 일기예보에 내일 오전까지 전국적으로 비가 올 것이라 했지만, 우중의 산행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아 강행하기로 했다.
화야산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과 가평군 외서면, 설악면에 걸쳐 있는 해발 775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북한강과 청평호의 풍광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이 아름다운 산이다. 문호리 친구집에 들렀다가 초가을의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 아래 넘실대는 북한강의 물줄기와 강가에 세워진 멋진 집들을 바라보며 청평 쪽으로 달리는 한가한 강변도로를 달리던 기억, 큰 골 쪽 삼회 1리 마을회관을 지나고, 강남교회기도원을 조금 더 지나 주차장에 차를 새워 두고 운곡암과 절골의 운곡산장을 지나면서 등산로 주변의 숲 속에서 떨어진 알밤을 주으며 풍성한 가을 산행을 즐기던 기억, 5 시간 가까운 산행과 차를 세워 둔 주차장에서 6 킬로미터나 떨어진 사기막골의 삼회 2리 마을회관 쪽으로 하산하여 일부러 택시를 타지 않고 한 시간 반을 걸어서 차를 세워두었던 주차장까지 갔던 총 6시간 반정도의 산행을 했던 지난해의 기억이 어제처럼 새롭다.
승용차로 양수리까지 가는 동안 오다 그쳤다를 반복하던 가을비가 서종면소재지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시간을 즐기기 위하여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문호리의 친구집에 도착하니 비는 그쳤지만 잔뜩 흐린 날씨 탓에 오후 6시도 되기 전에 벌써 어둡다. 절기상으로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추분이지만 낮의 길이가 이렇게 빨리 짧아진 것은 아니리라.
친구는 잠실의 아파트와 이 집을 왕래하면서 살기 때문에 이 집은 가끔씩 비워두는 때가 많다. 며칠간 비워두었던 집의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놓고 정원의 외등에 불을 밝히니 거실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밤의 산속 신비스러움이 밀려오는 듯한 감상에 가을의 정취가 더해진다. 작은 소반에 막걸리 한 병을 놓고 아내가 집에서 간식용으로 준비해 준 호박부침과 친구의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싱싱한 열무김치를 안주로 차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 11시에 자리에 들 때까지 춥지도 덥지도 않은 佳節의 자연을 벗하며 陶淵明의 詩 "飮酒"의 한 구절 "山氣日夕佳"를 몸으로 느끼며 산속에서의 호젓한 밤을 즐겼다.
아침 6시 이전에 일어날 것을 약속하고도 잠자리에서 더 이야기를 하다 12시가 넘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새벽 3시쯤 빗소리에 잠이 깨서 한 시간여 동안 나를 쉽게 다시 잠들 수 없게 하였다. 계절 탓일지 아니면 도시를 떠나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친구와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한 때문일까? 가을은 나에게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고 또 나는 그런 季節病 같은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6시 전에 일어난 친구는 늦게 다시 잠이 들어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깨우지 않았던 모양 세수를 다 마치고 나의 기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강변길을 따라 지난해 갔던 길을 그대로 가서 7시가 되기 전에 강남교회기도원 뒤쪽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우산을 받고 차에서 나오니 여전히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우리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호젓한 등산로를 따라 운곡암을 지나고 불어난 계곡의 개울을 몇 번 건너면서 1시간 만에 화야산장에 닿으니 비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큰골로 들어가 지난해에 알밤을 줍던 밤나무를 살펴보니 금년에는 해갈이를 한 듯 밤이 열리지 않았다. 빗속에 미끄러운 길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조금은 위험할 듯하여 화야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포기를 하고 다시 내려가 작년에 하산하면서 쏟아진 알밤을 줍던 삼회 2리 마을회관 쪽으로 방향을 수정하여 산 중턱에서 밤이나 줍기로 했다.
차는 도로변에 세워두고 야트막한 밤나무가 많은 산 중턱으로 올라가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데도 다시 떨어진 자잘한 산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순식간에 비닐봉지가 무겁도록 주웠다. 아침 9시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세워둔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준비해 간 음료와 간식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주은 밤은 배낭에 두고 빈 비닐봉지를 들고 우리는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12시가 되도록 푹신푹신한 부토에서 풍겨주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밤 줍는데 정신이 팔려 이리저리 산을 헤맨 거리가 가히 화야산 정상에 다녀온 거리만큼은 될 성싶다.
비가 그친 오후 2시쯤 주은 알밤으로 두 사람의 배낭과 한 개씩의 비닐봉지까지 채우고, 서종면소재지에 돌아와 늦은 점심으로 쑥해물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다시 문호리 친구집에 돌아왔다. 비록 화야산 정상은 오르지 못했을망정 자연이 주는 가을의 풍요를 우리가 다 얻은 듯 마음이 뿌듯하고, 이런 행복한 시간을 제공해 준 친구의 고마운 마음을 오래 간직하게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