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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학자(燕巖 朴趾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은 1737(영조 13년)에 태어나서 1805(순조 5년에 죽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북학(北學)의 대표적 학자로, 그의 활동 영역은 소설·문학이론·철학·경세학(經世學)·천문학·병학(兵學)·농학 등 광범위했다.

초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필균(弼均)이며,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다. 그의 가문은 노론(老論)의 명문세신(名門世臣)이었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도 안 되는 밭과 서울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영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척신(戚臣)의 혐의를 피하고자 애썼으며, 청렴했던 조부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처삼촌이며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 경학(經學)·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문재(文才)를 타고난 그는 이미 18세 무렵에 〈광문자전 廣文者傳〉을 지었다. 1757년 〈민옹전 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 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 극히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장년

1759년 어머니가, 1760년에 할아버지가, 1767년에는 아버지가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에의 뜻을 끊었다. 1768년 서울의 백탑(白塔:지금의 파고다 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 주변에 이덕무(李德懋)·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금(柳琴)·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그룹'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文風)·학풍(學風)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유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 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의 베이징[北京]에 갔다.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로서 그의 8촌 형이었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서울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人倫)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 虎叱〉·〈허생전 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1783년 무렵에 일단 탈고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개작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수습은 그가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에는 그에게 자송문(自訟文: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만년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안의현감(安義縣監),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의금부도사·의릉령(懿陵令), 1797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下敎)에 응해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묘는 지금 북한 땅인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만년의 그의 사상은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이었고, 따라서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타협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철학사상

그는 해박한 자연과학 지식의 소유자였다. 홍대용(洪大容)과 더불어 지구설(地球說)·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해 주자성리학에서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그는 세계는 천체로부터 자연 만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결합(凝聚結合)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을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필연성을 가지고 자기운동을 할 따름이며, 그 어떤 목적의지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하늘이 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도 반대했다. 또한 미신적·신비적인 참위설(讖緯說)과 오행상생상극설(五行相生相克說)에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물질적 기(氣)의 일차성을 주장했다. "만물이 발생함에서 무엇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차는 까닭은 이(理)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는 그 가운데 이가 있으며 기로써 이를 싸는 것이 마치 복숭아씨를 품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기론). 만물의 시원은 기이고, 이는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운동변화의 법칙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또 감각의 원천은 객관적 외부세계이며, 감각·의식은 객관적 외부세계의 사물이 감각기관에 작용한 결과 발생한다는 인식론을 전개했다.

 

문학사상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다. 〈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의리 있는 도덕행동과 사리사욕과 명예에 눈먼 양반을 대치시킴으로써 양반의 가식적 도덕을 폭로·비판했다. 〈마장전 馬駔傳〉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한 도덕성과, 고결성이 퇴색되고 비속화된 양반들의 사교를 대비시킴으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비판했다.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嚴行首)의 삶에서, 서민적 덕성(德性)으로서의 건실한 생활철학을 형상화했다. 근로 인민의 도덕이야말로 진실한 도덕이라고 강조하고, 엄행수는 성인(聖人)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년기의 작품인 〈양반전 兩班傳〉은 양반도덕의 허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 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관통되어 있고, 양반 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잇속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농사도 하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고 책 권이나 대충 훑으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는 떼놓았다. (중략) 우선 이웃집 소를 끌어다가 밭을 갈리고 동네 백성들을 끌어다가 김을 매게 한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겠는가.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놈의 코에 잿물을 부어 넣으며 상투를 잡아 휘두르고 귀 쌈을 때린들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 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민군상(庶民群像)과 함께 호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지식인 체질이었으며, 서민군상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주도 층이 될 수 있는 사회 층으로 성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따라서 박지원은 역시 허생(許生)처럼 기재(奇才)를 가지고 고독하게 숨어 살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경제사상

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實用) 임을 강조했다( 실학).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 질 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라고 하면서 학문의 초점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맞추었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 없이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는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생산력을 복구·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도구의 개선과 영농법의 개량, 농업시설의 복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방책을 〈과농소초〉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농사 절기, 전답(田畓)의 구획법, 농기구의 개량, 토지의 경작과 개간 및 수리사업과 그 설비, 토양, 거름, 곡물의 품종, 종자의 선택, 파종, 김매기, 해충구제, 수확, 곡물저장 등의 개선대책을 제시했다. 또한 관개수리사업의 복구·발전을 강조하면서, 저수지를 구축해수차(水車)와 기타 수리시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방책을 제시했다. 수리사업은 국가비용으로써 강력히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생산력을 복구·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도구의 개선과 영농법의 개량, 농업시설의 복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방책을 〈과농소초〉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농사 절기, 전답(田畓)의 구획법, 농기구의 개량, 토지의 경작과 개간 및 수리사업과 그 설비, 토양, 거름, 곡물의 품종, 종자의 선택, 파종, 김매기, 해충구제, 수확, 곡물저장 등의 개선대책을 제시했다.

 

또한 관개수리사업의 복구·발전을 강조하면서, 저수지를 구축해수차(水車)와 기타 수리시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방책을 제시했다. 수리사업은 국가비용으로써 강력히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고르게 나누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그는 국가가 확고한 화폐정책을 실시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과 은(銀)을 화폐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수공업도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므로, 우선 교통을 발전시켜서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광범위하게 수레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상업과 외국무역을 촉진할 것도 제기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그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장 중요시했고, 그것을 위하여 한전법에 의한 농업생산관계의 개혁을 제기했으며 상품의 전국적 유통을 주장했다. 이는 객관적으로는 통일적 국내시장의 형성을 가져올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그는 또 이러한 개혁의 일차적인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덕(德)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 위주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종래의 인륜 위주의 사고방식에 대체함으로써, 한국 사상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출처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