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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학자(磻溪 柳馨遠)

반계 유형원은 1622(광해군 14) 서울에서 태어나 1673(현종 14) 전북 부안에서 죽은 조선 후기 실학의 개척자이다. 종래의 정통주자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국가를 제조(再造)하려 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이며 호는 반계(磻溪)이다. 

생애와 저술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흠( )이고, 어머니는 우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처는 부사 심은(沈誾)의 딸이다. 이원진(李元鎭)·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했다. 2세 때 아버지가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다. 1653년(효종 4) 가족과 함께 선대의 사패지지(賜牌之地)인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으로 이주했다. 1654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고금의 전적 1만 여 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악습을 제거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실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종래에 소홀히 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어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경제 문제의 연구에 힘썼으며, 국방을 위해 군사학도 연구했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철학에 관련된 것으로는 〈이기총론 理氣總論〉·〈논학물리 論學物理〉·〈경설문답 經說問答〉·〈주자찬요 朱子纂要〉가 있고, 지리학에 관련된 것으로는 박자진(朴自振)과 함께 〈동국지지 東國地志〉에 관해 토론한 후 1656년에 저술한 〈여지지 輿地志〉와 〈군현지제 郡縣之制〉·〈기행일록 紀行日錄〉이 있으며, 역사학에 관련된 것으로는 1665년에 편찬한 〈동국사강목조례 東國史綱目條例〉와 〈동국역사가고 東國歷史可考〉·〈속강목의보 續綱目疑補〉·〈동사괴설변 東史怪說辨〉이 있다.

 

군사학에 관련된 것으로는 〈무경사서초 武經四書抄〉·〈기효신서절요 紀效新書節要〉가 있고, 어학에 관련된 것으로 〈정음지남 正音指南〉이 있으며, 문학에 관계되는 것으로 〈도정절집 陶靖節集〉·〈동국문초 東國文抄〉가 있다. 이외에 명의 멸망에 대한 복설지책(復雪之策)을 논한 미완성의 〈중여위략 中與偉略〉이 있다. 이 저서들은 영조 때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주저(主著)로서 26권 13 책으로 되어 있는  〈반계수록 磻溪隨錄〉은 전면적 개혁에 의한 국가재조책을 제시한 저술로, 전제(田制:토지제도, 재정·상공업 관계) 4권, 교선지제(敎選之制:향약·교육·고시 관계) 2권, 임관지제(任官之制:관료제도의 운용 관계) 1권, 직관지제(職官之制:정부기구 관계) 2권, 녹제(祿制:관리들의 보수 관계) 1권, 병제(兵制:군사제도의 운용,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2권과 각권의 고설(攷說)을 비롯해 속편(의례, 언어, 노예, 적전[籍田] 기타)과 보유(補遺:군현제)로 구성되어 있다.

 

사상과 개혁론

유형원은 특정의 학파·교설(敎說)을 추종하거나 거부함이 없이 비판적·객관적인 방법으로 고문(古文)·육경(六經)이나 고제(古制)에 접근해 갔다. 즉 사물의 실제·실상에 나아가 이를 실사(實事)로서 직시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경험사실의 가치를 고전(古典)에 근거해서 확인했다. 결국 고전은 현실을 정당하게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한 근거·수단으로 원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제에의 부단한 접근자세로 인해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뛰어넘어 실리(實理)를 궁극적 원리로 착안하게 되었다.

 

그는 이기를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로 인정하고 사회·정치 운영에 관한 근거논리를 이것으로부터 이끌어오는 점에서는 정통주자학파와 일치했으나, 그것을 구체적인 사물·현상 등 실사의 원리로 보고 이를 실리로 대치시킴으로써 유자·식자에게 사회적 과제의 실천궁행을 요구하는 도리(道理), 그리고 경제·법제 등 사회제도를 변혁하는 원리라는 2가지 의미, 즉 도덕(道德)과 공리(功利), 이론과 실천을 포괄하는 사회법칙, 사회변혁의 이론 근거로 만들어갔다.

 

이에 그의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 사회사상은 조선 전기의 법전질서를 극복하는 수준, 즉 변법적(變法的) 차원에서 삼대지법(三代之法), 정전제(井田制) 원리의 재현을 추구했다. 즉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한 제도적인 개혁에 전제를 두고, 그 방법으로 우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에게 최소한의 경작농지를 확보하게 하고 이를 통해 자영농민을 육성할 것과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는 일정량의 경작지만을 나누어주는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할 것을 제시했다.

 

다음으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제 개혁, 즉 부병제(府兵制)의 실시를 주장했다. 이와 함께 국가재정의 확립을 위한 세제와 녹봉제(祿俸制)의 정비를 주장했는데, 세제는 조(租)와 공물(貢物)을 합하여 수확량의 1/20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농업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상업과 수공업을 장려하며, 과거제도의 폐지와 공거제(貢擧制)의 실시로 신분제도를 개혁하고, 관아를 정비할 것 등을 주장했다.

 

그는 토지소유가 공정하게 되면 모든 일이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모든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일치되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 경제 개혁론은 곧 신분·관직·토지소유의 세습제도를 폐지하고 이에 상응해서 균전제에 기초한 농본주의·병농일치를 실현함으로써 사민(四民)으로 하여금 항산(恒産)·항업(恒業)과 '각득기분'(各得其分)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농민의 균산(均産)을 전제로 한 사회·경제 운영방안으로서 국가의 수취체계를 전적으로 '토지를 근본으로 하는' 원리로 운영함으로써 부세제도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하여 소농경영을 중핵으로 하는 농업체제를 재건하고 이 기반 위에서 자유로운 계약노동 관계로의 이행, 봉건적 신분관계의 점진적 해체, 상공업·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한편 정치운영론에서는 개혁의 실질적인 주체는 군주이며 군주의 결단과 신료군(臣僚群)의 협찬으로 개혁이 추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권의 존중·강화를 강조해서 존군비신론(尊君卑臣論)을 전개했는데, 강화된 왕권을 통해 방만해진 양반집권층의 탈법 비리, 병권장악, 지주제의 확대를 견제함으로써 국가 공법질서를 정상화하고 농민층의 재생산기반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토지개혁론과 군주중심 정치운영론은 개혁적·농민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 시기 서인을 비롯한 정통주자학파가 제기했던 개량적·지주적 입장의 부세제도 이정론 및 신권중심 정치론과는 대립되었으므로 당대에는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理想論)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기호남인(畿湖南人)을 통하여 계승되어, 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의 실학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753년(영조 29) 사헌부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에 추증되었으며, 1768년 판중추부사 홍계희(洪啓禧)가 찬한 묘비가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에 의해 세워졌다. 1769년 영조의 명에 의해 경상감영에서 〈반계수록〉이 간행되었다. 1770년에는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에 추증되었다.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 되었다.

출처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