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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파리 여행

 

                                                                                2009년 5월 5일

 

2006년 9월에 아내와 함께 탔던 파리 행 비행기를 2년 반이 넘어 다시 타게 되었지만, 마음이 설레는 것은 그때나 마찬가지다. 가지고 갈 짐을 챙기느라 새벽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짐을 다 싸놓고도 잠이 쉬 들지를 않아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새벽 4시에 잠이 깨었다.

 

작년부터 불어 닥친 세계경제불황의 한파가 우리 서민들의 삶까지 옥죄고 있는 데다, 또 갑자기 멕시코에서 발생하여 급속히 번지고 있는 신종 독감(Swine Influenza)이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어 모두들 해외여행을 꺼리고 있는 때, 감히 여행을 생각한다는 것이 일면 사치스럽고, 일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때임에도 길을 떠나는 우리 부부를 이렇게 들뜨게 하는 것은, 항공사에 축적된 보너스로 세금만 내는 보너스 항공권을 딸아이가 보내주기도 했지만, 단지 돈 들이지 않고 여행한다는 즐거움보다는 우리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어도 제 힘으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끈기 있게 노력하여 원하던 박사 학위를 받게 된 대견스러운 딸을 만나 직접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은 다른 어떤 부모들도 갖고 있는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아침 7시 10분쯤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을 하다가 부쳐야 할 짐의 무게가 기준을 초과하게 되어 초과한 부분만큼 덜어내 宅配費用으로 거금 14,000원을 들여 처제네 집으로 보내고, 기준에 정확히 맞추고서야 수속을 마친 것은, 초과된 1 KG 당 53,000원씩 추가로 지불을 하고 나면 배꼽이 배보다 훨씬 크게 되는 결과가 될 것 같아서였다. 사실 두 사람의 짐이 3, 4 KG 정도 초과된 것쯤 눈감아 줄 것으로 착각하고, 짐이 기준보다 약간 초과된 줄을 알면서도 그냥 갖고 간 우리의 생각이 잘못이었다. 항공권을 저렴하게 판매하기 때문에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항공사의 방침이 있었던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공항에서 짐을 덜어내고 다시 포장하는 수고와, 불필요한 돈 14,000원은 지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9시 20분에 출발할 에어프랑스 267기는 공항 사정에 의하여 20분쯤 늦게 이륙하였다. 탑승할 때는 몰랐는데 이륙 한 시간쯤 후에 화장실을 가면서 보니 빈 좌석이 너무 많은데 놀랐다. 역시 경제불황에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종 독감(SI)의 영향이 큰 모양이다. 어젯밤의 부족한 잠을 기내에서 보충하려고 했지만, 깊은 잠이 들지를 않는다.

 

비행기가 우랄 산맥을 넘을 무렵 창 밖을 내려다보니 솜털구름 위로 밝게 빛나는 5월의 눈부신 햇빛이 참으로 아름답다. 지난번에는 밤시간의 비행이어서 볼 수 없었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이곳 시베리아의 지상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내게 주어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불구불 산을 휘어 감고 흐르는 강, 곧게 그어진 도로, 균형 맞춰 나누어진 경작지와 도시의 구획이 마치 한 장의 도시계획 도면을 보는 것 같다.

 

11시간을 넘게 비행하여 서울 시간으로 오후 9시가 넘어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낮이 조금 지난 오후 2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이곳은 서머타임을 시행하여 서울과의 시차가 정확히

7시간 차이가 난다. 

 

샹티이 콩데 미술관 & 말 박물관

2009년 5월 8일

파리에 도착하고 보니 출발 전의 수면부족과 비행 중의 피로 때문에 아내나 나 모두 지쳤다. 거기다 도착해서의 시차 극복의 어려움까지 겹쳤으니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틀 동안 겨우 밥만 먹고 계속 잠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더니 피로가 좀 풀렸다. 

 

오늘은 마침 딸아이가 쉬는 날(유럽전승기념일)이기도 하여 아내가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했다. 파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中世의 古城이 있는 샹티이(Chantilly)로 나들이를 하기 위해서다. 말은 하지 안 했지만 어버이날이라고 딸아이가 계획을 세워놨던 모양이다.

 

샹티이(Chantilly)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42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 우아즈 주의 휴양지로  관리된 샹티이 숲 근처에 있는데, 콩데 박물관이 있는 성, 공원, 경마장 등으로 유명한 곳이며 18세기에는 고급 레이스와 아름다운 자기의 생산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늦은 아침을 먹고 11시가 넘어 집을 나오니 공휴일인데도 파리 시내의 교통은 별로 붐비지 않는다. 도심을 빠져나와 푸른 초원과 여기저기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시골길을 40분쯤 달리니 숲 속으로 이어지는 직선의 한가한 도로가 나온다.

 

이곳이 예의 샹티이 숲인 모양이다. 딸아이는 푸른 숲 속으로 난 한가한 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12시가 조금 넘어 드넓은 샹티이 고성에 도착하여 주차장을 찾아 차를 새우려는데, 성 안에는 우리가 주차할만한 빈 공간이 없어 할 수 없이 시내 쪽으로 나가 겨우 차를 세웠다. 나중에 관람을 마치고 나오다 보니 경마장 옆 푸를 잔디밭 위에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하여 특별히 주차를 허용했던 모양인데 아무런 표지가 없어 우린 그걸 몰랐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처음 이곳에 사유지를 만들었던 갈리아의 로마인 칸타리우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4세기에 인공호수 안에 암석으로 된 작은 섬 위에 성을 세웠고, 16세기에 앙리 드 몽모랑시 원수가 1528년부터 1531년까지 피에르 샹비지로 하여금 설계하여 다시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한동안 왕가의 소유였던 것을 17세기 왕실의 세력가이던 콩데家의 소유가 되었고 18세기말 프랑스혁명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19세기에 콩데家의 마지막 계승자인 오말公이 1876년부터 1883년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하였다고 한다.

 

차를 세우고 나오다가 처음 만난 곳이 말 박물관이다. 이 말 박물관에는 말 240마리와 사냥개 400마리 이상을 넣을 수 있는 18세기의 거대한 축사가 현재도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경마장은 1834년 문을 열었으며, 프랑스 자키 클럽의 연례 경마대회가 6월에 열리며,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14유로씩 받고 승마쇼를 관람시키고 있었다. 주변의 숲이 당시 귀족들의 사냥터였던 모양이다. 입장권을 사려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마구간 특유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쇼 관람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를 안는다. 쇼 관람은 포기하고 밖에 있는 드넓은 잔디 깔린 경마코스를 둘러보면서 사진을 몇 장 찍고, 400미터 떨어진  콩데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재 콩데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성은 1886년 소장품, 도서관, 주변 공원 등과 함께 오말公에 의해 프랑스 學士院에 遺贈되었다고 한다. 입장료는 1인당 11유로. 옛날 영화에서 보던 대로 호수에 둘러 쌓인 성은 다리가 앞쪽과 뒤쪽에 두 개 있었다. 그 다리를 통해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었다. 비상시에는 그 다리도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들어 올려버리면 성은 완전히 섬이 되어버린다. 

현재 콩데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성은 1886년 소장품, 도서관, 주변 공원 등과 함께 오말公에 의해 프랑스 學士院에 遺贈되었다고 한다.
콩데 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컷.
박물관 앞 잔디 위에 아내와 함께.
딸과도 함께 한 컷.
말 박물관 앞에서.
인공호수로 해자(垓字)를 삼아 그 가운데 있는 암석으로 된 작은 섬 위에 성을 세웠는데 앞쪽과 뒤쪽에 두 개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통해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었다. 영화에서 보던 대로 비상시에는 그 다리도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들어 올려버리면 성은 완전히 섬이 되어버린다.
박물관의 훌륭한 미술 수집품 가운데는 이태리 르네상스 때의 화가들과 16세기 때 궁정화가들인 장 클루에와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진귀한 초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도서 관에는 1만 9천권의 장서가 4면 벽을 채우고 있었고 중앙에는 당시의 주인들의 필사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내부는 보수한 지 130년이 되었지만 사용한 재료는 말할 것도 없고, 벽에 있는 문양이나 조각품들의 호화로움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당시 귀족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교회의 기도실과 고해성사를 하던 곳은 별로 넓지는 않지만 호화로운 조각작품과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창, 그리고 고급 목재를 사용한 벽에 장식한 정교한 문양들은 사진으로 담아 오고 싶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시골집 같은 작은 카페가 있었다. 여기서도 딸과 함께 한 컷.

 

뱅센느 숲       

2009년 5월 12일

요즘 이곳 파리의 날씨는 아침에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으면 예측을 할 수가 없다. 거의 날마다 흐린 날씨가 많고, 아침에 순간적으로 이슬비가 내리다 또 금방 개이기도 한다. 

 

출장을 가면서 딸아이가 제 출장기간 동안 여행사에 알아봐서 프랑스의 서북쪽 끝에 있는 관광지인 몽생미셸에 단체관광으로 다녀 오시는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떠났는데, 아내는 여행사를 통해서 가는 것보다 TGV를 타고 갔다 오는 것도 괜찮겠다고 한다.

 

몽생미셸까지 직접 가는 기차는 없어서, 르네(Rennes)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또 택시를 타든가 걷든가 하는 복잡한 노정이기는 해도 그런대로 여행의 묘미는 있을 듯하여 노르망디 쪽으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보기 위하여 인터넷에서 여행사 몇 군데를 찾다가 신통치 않아서 기차역에 가서 직접 알아보고, 근처에 있는 뱅센느 숲을 산책할 요량으로 간편한 복장으로 시내 지도를 손에 들고 걸어서 리옹(Lyon) 역으로 나갔다.

 

리옹 역 안내소의 젊은 여직원은 영어로 말하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 우리의 대화가 답답했던지 차표를 예약하러 왔다가 기다리고 있던 한 할머니가 통역을 하신다. '리옹 역에서는 노르망디 쪽으로 가는 기차(TGV)가 없다는 것과, 몽파르나스(Montparnasse) 역에서 르네(Rennes)로 가는 TGV를 타야 하는데, 몽파르나스역까지 가려면 여기서 지하철 6호선을 타야 한다'면서 지하철 6호선을 타는 방법과 몇 정거장을 지나서 내리라는 것까지 아주 세세히 설명해 주셨다.

 

오늘 기차를 타러 나온 것도 아니고 단지, 기차 시간과 요금을 알아보기 위해 나왔었기 때문에 몽파르나스 역에는 다음에 가서 알아보기로 하고, 우리는 뱅센느 숲을 찾아가기 위하여 왔던 길을 되짚어 오는데, 길 가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경찰도 몇 명 있어서 왠일 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경찰들이 천으로 얼굴을 가린 한 사람의 죽은 듯한 노숙자를 들것에 옮겨 싣고 있었다. 서울에도 지하철 역에 노숙자들이 있지만, 파리에는 더 많은 노숙자가 있는 것 같다.

 

노숙자가 죽게 된 원인이 飢餓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고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은 옛말만이 아니고 현대에도 특히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경제 대국들인 OECD 국가들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비극이다.  

 

다시 우산이 없어도 괜찮을 정도의 이슬비가 내리는데, 지도를 보면서 가로수가 덮인 人道를 따라 40분쯤 천천히 걸어가니 비는 그치고 우리가 찾는 뱅센느 숲이 나타났다. 파리 시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옛날 궁중의 사냥터였던 곳인데 14세기 때 샤를 5세 가 궁성을 쌓아 베르사유 궁궐이 완성될 때까지는 왕궁으로도 사용된 곳이라고 한다. 뱅센느 성 건립은 12세기에 뱅센 일대를 뒤덮고 있던 숲에 울타리를 치고 왕실 사냥터로 삼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숲은 동물원·경마장·체육경기장을 갖춘 공원으로 되어 있다.

 

4월부터 5월까지 축제기간이라(어림짐작으로-불어는 영어와 스펠이 약간 비슷한 단어들이 많아서)는 큰 광고판을 보고 숲 속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가니, 아름드리 수목이 울창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나무들엔 예쁜 꽃이 한창이다.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숲 속에 호수도 있고, 그 안에는 섬도 있다.

백조와 오리들이 한가롭게 떠 있는 호수에  빈 보트들이 매어있는 것을 보니 週中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화단이 잘 가꾸어진 호숫가 산책길에는 조깅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가한 노인들이다.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은 따로 울타리가 있고, 각종 놀이시설과 매점들이 들어차 있는데  입장료를 받는지 입구에 관리인들 몇 명이 지키고 있어서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울창한 숲길을 걷기 위해 뒤돌아 섰다.

호숫가를 제외한 다른 숲은 전혀 다듬어 놓지를 않고,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도 들어가 보고 싶어서 호수를 돌면서 다리를 찾아 한참을 돌았는데도 건너 들어가는 다리(橋)를 찾지 못했다. 섬 안에서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분명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으련만, 3시간 이상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늦어서 동물원은 구경도 못하고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오늘은 집으로 돌아왔다.

 

센 강따라 걷기                                                                             

  2005년 5월 14일

 

-언어 장벽-

출장 중인 딸아이 한테서 오전 중으로 택배가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아파트 입구의 이중으로 된 문 중, 밖았 문만 열어주고 '아땅데'라고 말하고 내려가서 택배원이면 안쪽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기에, 인터폰에 대고 그대로 '아땅데'라고 말하고 현관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연장통을 들고 서있는 폼이 아무래도 택배원 같지가 않다. 영어로 우체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봐도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랑스말만 자꾸 한다. 제 나라 사람이 제 나라에서

제 나라말을 하는 것을 탓할 수야 없지만,  언어의 장벽에 의한  답답함은 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나는 영어로 그는 불어로 한 참 소통을 하려고 노력을 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소란하니까 다른

층에서 사람이 나왔지만, 그도 우리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손짓 발짓을 동원한 그가 배전판의

號數를 가리키는 것을 보니 그가 벨을 잘못 누른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층에서 고장 수리를 부탁해서 왔던 모양인데, 그가 잘 못 우리 집 벨을 눌렀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 모양이지만, 그 말마저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멋쩍은 웃음만 남기고 손을 흔들며 올라왔다. 웃음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센 강변의 산책길- 

12시가 넘어도 기다리는 택배원의 벨이 울리지 않아서 12시 30분에 아내와 집을 나섰다. 센강을 따라 걸으면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센강 위의 그 많은 다리들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시내 길도 알아둘 겸, 지도를 들고 집을 나와 강 옆에 있는 '미테랑 국립도서관' 쪽으로 갔다. 다리의 사진을 찍으면서 강변 북로(?)를 따라 1 시간 30분쯤 걸려 '시테섬'까지 걸어서 가는데, 길이 중간중간 막히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여 산책하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돌아오면서 강변 남로(?) 길을 따라오는데, 길가에 화단도 잘 가꾸어져 있고, 넓은 길을 기마경찰이 순시도 하는 것을 보니(이 기마경찰도 관광효과를 노린 하나의 상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산책할 사람은 강의 남쪽길을 택해야 하고, 우리가 갔었던 북쪽 길은 중간에 있는 센강 유람선의 선착장이나, 선상 식당을 이용할 사람들을 위한 주차장 및 도로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시테 섬-

파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섬은 2000년 전 켈트족이 처음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여기 살던 부족의 이름이 '파리시' 였기 때문에 '파리'라는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면적은 훨씬 좁지만 서울의 여의도처럼 센강이 섬을 에워싸고 갈라져서 흐르고, 또 생 루이 섬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요한 23세 광장이 있고,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한 생트 샤펠 대성당, 그리고 최고 재판소와 시에르주 백작의 저택을 감옥으로 사용했던 콩시에르쥬리가 있는 명소이다.

 

2 년 전, 에펠탑 근처에서 출발하는 센강의 유람선을 탔던 때, 이 섬을 돌아가면서 방송으로 강가의 유서 깊은 건물들을 설명하던 기억이 난다.

 

-식물원-

시테 섬에서 센강을 따라 '미테랑 국립도서관' 쪽으로 오다가 자연사 박물관 옆에 있는 식물원에 들렸다.

곳은 옛날 왕립 병원의 정원 주위에 식물 학교와 자연 역사관 약국 등을 지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가장 큰 공원 중에서 하나라고 하는데, 큰 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산책길이 길게 이어져 있고, 각종 예쁜 꽃을 잘 가꾸어 놓았다. 

입구에 많은 스쿨버스들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들어가서 보니, 유치원생들로  보이는 아기들로부터 초등학생, 중등학생들까지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체험학습을 나와서 선생님들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산책을 하면서 예쁜 여러 가지 색의 아네모네와 아이리스꽃 사진을 많이 찍고 집에 돌아오니 5시 30분이다. 오늘도 1 시간정도 앉아서 쉬었던 시간을 제하고도 4 시간은 넉넉히 걸은 셈이다. 

 

-에펠탑, 평화의 문-

2009년 5월 19일

토요일, 우연히 친절한 프랑스 부부(장 폴 과 자클린)를 만나게 되어 일정에 없던 파리 국제교류지역 관광과 오르세 미술관 관람으로 12시간이나 돌아다니고 집에 와서 관광일기를 정리하느라 늦게까지 컴퓨터에 매달려 새벽 3시까지 시간을 빼앗기고 나니 너무 피곤하여 어제 하루를 쉬었지만, 그래도 피곤하여 오늘까지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오전에 날씨가 너무 좋다. 

요즘 거의 매일 흐리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 집에 있기가 너무 아까와서 오후에 시내 구경을 가자고 아내를 꼬드겼다. 12시가 넘어 집을 나와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파리에 처음 왔을 때도 시내 구경을 다니면서 탔던 같은 노선이어서 지나는 길들이 대강 눈에 익었다. 

2년 전 처음 왔을 때, 말로만 듣던 센강 위의 다리들, 바스티유 광장 역사의 현장에서 보던 오페라 극장의 건물, 파리 대학옆에 세워진 철학자들의 동상들을 보면서 아하 이 모든 것들이 여기에 이렇게 있구나 하며 감격하던 생각이 다시 새롭다. 

 

에펠탑 앞 잔디광장(상 드 마리스)은 일부가 보수공사를 하느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평화의 문이 서 있는 부근의 잔디밭은 관광객들과 산책 나온 젊은이들이 들어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둘러앉아 점심을 먹기도 하고 일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우리도 사진을 몇 장 찍고 벤치에 앉아 준비해 간 점심을 먹었다. 

 

-엥발리드-

에펠탑 앞의 상 드 마리스 잔디광장을 지나 평화의 문에서 육군대학 옆을 지나 10분 정도의 거리에 '전쟁기념관'이나 '나폴레옹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앵발리드가 있다.

 

건물 꼭대기에 황금으로 도색을 하였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은 유난히 찬란한 황금빛이 더욱 빛난다. 이곳에는 프랑스가 갖었던 많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지금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 지하에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에서 탈출한 후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하여 1815년 10월에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었다가 1821년 5월에 사망한 후 그곳에 묻혀있다가 1840년에야 영국의 승인을 받아 그 시신이 파리로 돌아와서 그가 생전에 "죽어서라도 개선문을 통과하겠다"던 소원대로 에토알 개선문을 통과하여 거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앵발리드의 지하에 편히 잠들게 되었다.

 

오늘은 대단한 행사가 있고 VIP들이 방문하는 날인 모양이다. 경비가 삼엄하고, 일부는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정문에는 방송국의 카메라가 대기하고 있었고, 경비 경찰들이 촘촘히 서있고 건물 외곽에 기동 경찰차들로 바리케이드를 둘러치고 있기도 하고, 옛날 나폴레옹 군대의 복장을 한 기마병들이 행군해 들어가고 있는 것도 볼 수가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영웅이었던 나폴레옹도 정복을 당했던 당시 오스트리아, 이태리, 스페인 이나 이집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했던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보던 시각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앵발리드의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이 대포들의 모양이 우리나라의 강화도에서 보던 모습과 비슷하지만 우리의 것들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들이었는데 이 대포들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폴레옹은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사망한 후 그곳에 묻혔다가 19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유골이 파리로 돌아와 다시 프랑스의 영웅이 되어 이곳 앵발리드 지하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 로댕 박물관-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 앵발리드 건물을 돌아 로댕박물관을 찾아 가는데 태극기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 있다. 1966년 군인으로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 태극기를 보면서 국내에서 느끼지 못하던 애국심 비슷한 느낌을 갖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대사관이 아닐까 하고 가까이 갔다.

예상대로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사관이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작은 샛문에 벨이 있고 용무가 있는 사람은 벨을 누르고 인터폰을 통해 연락을 하라는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외국 대사관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딱히 용무도 없고 연락할 일이 없어서 아름다운 우리의 태극기만 한 번 더 올려다보고 나오다가 앵발리드의 경비를 서고 있는 경찰에게 로댕박물관의 위치를 물어 앵발리드 건물의 바로 옆 길을 따라가니 가까운 곳에 로댕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이 월요일은 문을 닫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담장 사이로 넓은 정원과 내부에 있다는 전시실 건물이 보일 뿐이다. 밖에서만 둘러보고 외부 건물의 사진만 한 장 찍고 돌아섰다.

 

-알렉상드로3세 다리와 그랑팔레 미술관-

앵발리드 앞 넓은 길을 따라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 그랑 팔레와 푸티 팔레미술관을 지나면 바로 샹젤리제街로 이어진다. 로댕박물관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오늘 VIP 가 이 길을 지나게 되는 것을 이용하기 위한 듯하다. 군중들의 얼굴을 보면 인도 계통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스피커를 들고 선창 하는 사람을 따라 손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폼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호소하고 있다.

 

플래카드에 프랑스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독일 총리와 그 외 유럽의 국가원수들의 사진이 있고, 그 아래 팔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들의 사진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반전시위이거나 유엔과 서방 선진국들에게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 어려운 지역을 지원하는 정책을 요구하는 모양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을 한 다리인 알렉상드르 3세 교의 난간 네 구퉁이에는 아름다운 조각에 황금 도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파리를 찾는 사람들 중 이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한 번씩 이 다리와 그랑 팔레 미술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1892년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국제박람회를 위해 1896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00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리를 건너 그랑 팔레 미술관과 푸티 팔레 미술관이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길을 따라가면서 또 사진을 찍는다. 특히 그랑 팔레의 지붕 네 귀퉁이에 있는 전차를 모는 말의 청동상이 유명하고, 푸티 팔레의 입구 문이 역시 금도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보는 사람마다 경탄하게 한다.

  에투알 개선문 광장 

샤를 드골 광장에 있는 에투알 개선문은 센 강의 우편,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서로 만나는 광장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도 위에서 보면 빛나는 별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선문이 있는 광장을 에투알(별) 개선문 광장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샤를 드골 광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이 에투알 개선문은 1805년 아우스털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이 전투를 끝내면 여러분들은 개선문을 통과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을 하고, 1806년부터 공사를 시작했지만,  사람의 일이란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유럽 천하가 그 이름에 벌벌 떨던 나폴레옹마저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줄을 그 당시에 누가 알았으랴.

 

이 개선문이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 1836년, 그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은 1821년 보다도 15년 후에야  완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어서라도 개선문을 통과하겠다던 그의 소원은 실현된 셈이니, 1840년 그의 유해가 영국의 승낙을 받아 세인트헬레나에서 개선문에 돌아와 거대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고, 앵발리드에 묻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에투알 개선문 광장의 지하에는 여러 전쟁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프랑스혁명 당시의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어서 기념일 때마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엄숙한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콩코르드 광장

1755년에 만들어진 이 콩코르드 광장은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설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파리에서도 가장 넓은 광장이며 당시의 명칭도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그곳에 동상 대신 단두대가 세워질 줄을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프랑스혁명으로 동상이 철거되고 이름도 '혁명광장'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93년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뿐만 아니라, 사촌이던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던 필립 오를레앙, 혁명 지도자였던 당통, 로베스삐에르를 비롯하여 총 1,119명의 사형수가 이곳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다가 1795년 콩코르드(Concorde) 즉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와 화합으로 나아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있는 이름으로 바꾸게 되었다.

 

또 이곳 콩코르드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높이 23미터에 무게가 230톤이나 되는 단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 있던 것을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 프랑스에 선물하였다고 하는데, 옮겨오는데 4년이 걸렸다고 한다. 기원전 12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오벨리스크에는 '람세스 2세'의 치적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파리시의 正 中央에 위치한 이곳이 그 끔찍한 처형 장소에서 콩코르드라는 부드러운 이름을 붙임으로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을 잊게 하려 했다. 지금 이 광장의 상징물인 높이 23미터인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룩소르에 있던 것을 이집트 총독이 루이 필리프 왕에게 선물한 것을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루부르 박물관의 외부 모습
거리의 화가와 사진을!

루브르박물관에서 나와 센강을 따라 걸으면 볼거리가 많다. 강가에 화판은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들도 있고 강가 시멘트벽 난간에 매달린 노점 점포에서 그림이나 골통품, 서적을 팔고 있는 상점들도 즐비하지만 행인들에게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강 양쪽으로 이름 있는 건물들과,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뇌프 다리도, 관광객들을 싣고 다리 밑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유람도 다 이곳의 관광상품들이다.

 

퐁뇌프라는 이름은 '새 다리'라는 뜻을 갖었지만 파리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1578년 앙리 3세가 시작하였으나 1607년 앙리 4세가 완성하고 이름까지 붙였다고 한다.

 

콩시에르주리는 원래 시에르주 백작의 사져였는데, 1391년부터 1914년까지 감옥으로 개조되어 사용했던 것을 지금은 깨끗하게 보수하여 음악회와 포도주 시음회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오후 1시쯤 에펠탑 아래서부터 걸어서 돌아다닌 시간이 4시간쯤 되었다. 시테섬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5시 반이다.

 

파리에서 만난 화가 장 폴과 자클린느 부부

2009년 5월 27일

지난 5월 16일 몽수리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서 생각지도 않았던 시테 앵테르시오날 위니베르시테르(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를 둘러볼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해 주었던  장폴(Allard Jean Paul)과  자클린느(Jacqueline) 부부 생각이 났다.

 

그날 벼룩시장을 구경하려는 우리를 자동차로 태워다 주기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집을 꼭 한 번 방문해 달라고  전화번호와 자기 집을 찾아오는 교통편까지 메모해 주었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 진실된 것 같아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 그들이 그날 밤(5월 16일)이 '미술관의 밤 행사'이기 때문에 전 유럽 42개국 2,750군데의 모든 미술관이 무료로 밤 12시까지 개방한다는 정보도 알려주어서 우리는 15유로(약 27,000원)를 들이지 않고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할 수도 있었다.

 

집에 오기 전에 꼭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그동안 그들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딸에게 다녀왔고, 그 사이  우리는 파리 시내 구경, 지베르니의 모네정원과 오와르의 빈센트 반 고흐가 살던 곳을 다녀왔고, 5월 23일 이후 4일 동안은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어서 오늘에야 전화로 오후 우리의 방문이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환영이란다.  

장 폴씨가 살고 있는 파리 시의 외곽 일드프랑스에 가기 위해 내린 이베트(Gif Sur Yvette) 역사의 모습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파리 시의 외곽 일드프랑스의 이베트 역에서 가까운에 있다. 알이알 (RER)이라고 하는 시내를 관통하여 외곽까지 가는 전철은 메트로라고 하는 시내만 운행하는 전철과 연계되기는 하지만 명칭은 구분되어 있다.  시내버스와 시내 전철을 같이 활용할 수 있는 표가 1.6유로인데 비하여 그 값이 거리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상당히 비싼 편이다. 서울에서 수원정도의 거리에 1인당 4.2유로이니 우리 돈으로 7,500원쯤 하는 셈이다. 1시간 걸려 내린 곳이 Gif Sur Yvette 역이다.   

역에 도착하여 전화를 하면 차를 가지고 나오겠다고 하였지만, 휴대폰을 갖지 않아서 공중전화를 이용하려는데, 공중전화가 카드로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전화카드도 없어 망설이고 있다가 지나가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자기 휴대폰을 사용하라고 한다. 전화를 끝내고, 휴대폰의 사용 요금을 주려고 하는데 한사코 사양을 한다.  고마운 마음만 전하고 보냈다.

 

오래지 않아 나온 장 폴씨의 차가 작은 숲을 지나 역시 숲 속에 있는 마을 그의 집에 도착하여 안내하는 거실로 들어가니, 이건 거실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화랑이다. 눈이 둥그레진 내가 미술관처럼 무슨 그림이 이렇게 많으냐고 물으니,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며 이층에 있는 그의 화실을 보여주는데 또 놀랐다. 내 눈에는 그가 아마추어의 수준을 훨씬 벗어난 중견 화가쯤 될 듯싶다. 한국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면서도 그의 아내를 그리면서 배경으로 한국의 전통가옥을 그려 넣을 만큼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물론 동양에서는 인도를 제일 좋아하여 2년 전 5개월 동안이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스케치도 해 와서 그 후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때 스케치 했거나, 받았던 영감들이라고 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고 해서 은퇴 후, 한가하게 놀고 있으면서 요가로 건강을 지키는 평범한 사람인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그는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예술가들과 일반인들에게 자기의 집을 오픈시켜  자기의 작품을 평가하게 하고, 토론을 즐기는데 금년에도 6월 15일부터 2일간 개방을 한다고 한다. 

 

나는 그의 그림 한 점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가 자기의 그림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느끼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만 멀지 않은 장래에 당신이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해주고, 그때는 나도 당신의 그림 한 점쯤 갖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더니 그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며 환하게 웃었다. 

  

장 폴씨와 자클린느 부부의 다정한 모습
장 폴씨는 한국에 가 볼 기회가 없었다면서도 그의 아내를 그리면서 배경에 한옥을 그려넣었다.
장 폴씨가 가장 좋아하는 인도를 그의 그림에 많이 담았다.
자기의 그림을 설명하면서 포즈를 취해주는 장 폴씨는 마음이 참 부드러운 사람이다.
자클린느는 베트남의 호지밍시에서 태어나 두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파리로 오게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부부가 모두 동양의 종교나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거실과 화실 그리고 2층 화실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도 지하 침실로 내려가는 계단에도 모두 그림들로 채워진 집안은 말 그대로 미술관이다.

집안과 정원까지 보여준 그들은 이제 그들의 산책코스인 마을에 연이어 있는 숲으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해서 기꺼이 따라나섰다. 자동차가 충분히 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마을길,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울타리와 정원들이 모두가 예술적으로 가꾸어 놓은 화원이라고 해야 좋을 듯하다. 조용한 마을을 벗어나 숲 속으로 난 산책길을 들어서니 울창한 상수리나무들이 하늘높이 솟아 있다. 이 마을이 조성된 것이 29년이 되는데, 그들은 그때부터 여기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의 일과 중에 이 산책로를 걷는 것이 그들의 건강 비법이라고 한다.
산책을 하다가 전망이 좋은 곳에서 건너편 숲속의 아름다운 마을을 카메라에 담았다.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마을다운 그림 같은 풍경이다. 숲길을 돌아나오니 한 시간쯤 소요된 듯하다.
그의 거실에서 함께
장 폴씨는 그의 화보집을 아내에게 선물하였다.

다시 그들의 집으로 돌아와 차와 쿠키를 대접받았는데, 우리가 가지고 간 홍삼차를 내왔다. 건강에 좋은 차라고 자랑을 했더니,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홍삼차는 외국인들에게도 홍보가 많이 된 모양이다. 차를 마시는 도중에 인도여행 때 그곳에서 샀다는 한국의 둥굴레차를 보여주면서, 사용설명서나 상품명이 모두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어서 한글을 모르는 자기들은 어느 나라 제품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은 상품 포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Giverny)                  

 2009년 5월 21일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85km쯤 떨어진 곳에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Giverny)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모네((Claude Monet1840-1926)가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하다 이곳을 발견하고 너무 좋아 지금의 집에 세(貰)를 얻어 살다가 얼마 후 매입하고 주변의 땅까지 사들여 오늘의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3살 되던 때인 1883년부터 86살에 생을 마감하던 1926년까지 43년 동안, 정확하게 생애의 절반을 이곳에 살면서 손수 디자인하여 가꾸었던 아름다운  정원은 물론 마을 전체가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곳이다.

그림을 공부하거나 미술품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여행객들도 가 볼만한 곳이라기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딸내미가 가자는 데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시원한 초원과 여기저기 숲이 우거진 시골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목적지는 제쳐두고라도 우선 가는 길이 참 좋은 코스를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후 1시가 넘어 도착했는데, 두 군데나 있는 꽤나 넓은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어 약 30분 동안을 빙글빙글 돌다가, 마침내 빠져나가는 차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차를 세웠다. 우선 배가 고파 주차장 옆 풀밭에서 준비해 간 점심부터 먹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곳뿐만 아니라, 파리시내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관광지의 카페에서 식사를 하려면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부담이 너무 크다. 식사가 1인당 20유로 이상(약 36,000원), 음료수가 3유로(5,400원)씩이니 3명이 한 끼 식사를 하려면 우리 돈으로 최소 12만 원 이상을 써야 하니, 웬만한 사람들은 가능하면 우리처럼 집에서 먹을 것을 준비해 가는 모양이다.

심을 먹고 모네의 정원에 가기 위하여 마을로 들어갔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입장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줄이 약 200미터나 늘어서 있는데 그 줄이 도무지 줄어드는 기색이 없다. 다리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출입구 쪽으로 가 보았더니 입장한 사람들의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의 수만큼 만   입장을 시키고 있었는데 한참을 기다려서 한 두 사람씩 들어가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려 입장을 하려면 어림잡아 4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모네의 집 관람은 포기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아메리캥 지베르니 미술관'과 주변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모네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은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네 역시 젊은 시절에는 그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러던 그가 인상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된 것은 낙선자 전람회(Salon des Refuses)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로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계기로 마네(1832-18830, 드가(1834-1917), 세잔(1839-1909), 시슬레(1839-1889), 르노와르(1841-1919), 등과 함께 새로운 회화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강렬한 빛과 자연을 소재로 한 미술활동을 시작하였다.  1874년 그들의 첫 전람회인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전을  열었고, 이때 출품 된  그의 작품 '해 돋는 인상(Impression Sunrise)의 제명(題名)을 따서 한 미술기자가 '인상파 전람회'라고 조롱 섞인 기사를 신문에 발표함으로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을 골목을 지나면서 사진을 찍는데 지나던 관광객 두 사람이  뒤에서 손을 흔들며 즐겁게 장난을 한다. 이들의 천진스러운 모습도 여행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마을 전체가 정원이고 그림의 소재이며 관광상품이다.  

마을 외곽으로 나가는 곳에 작은 교회가 있고, 옆에 지금 한창 보수공사 중인 모네의 기념관의 외부에 화판을 든 만년의 모습 사진이 걸려있었다. 교회를 안고 뒤로 돌아가면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아래 맞은편에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모네의 가족묘가 있다. 묘 위에는 그가 생전에 가꾸었던 정원의 꽃들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소 좋아하던 자연스러운 꽃들이 피어 있어 그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는 듯하다.

이 마을에는 곳곳에 예쁜 꽃들이 피어있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지베르니 미술관에서
모네 기념관은 보수공사 중이지만 건물 외부에 화판을 든 모네의 모습이 부착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어디에서도 항상 즐거운 모습이다.
모네의 정원 담장 앞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모네의 무덤 앞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잠들어 있는 곳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

2009년 5월 21일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70일간 모든 정열을 불태우며 수많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던 곳,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s Sur Oise)는 지베르니(Giverny)에서 파리 쪽으로 30분쯤 되돌아 달려가다 갈라져 들어간다.

 

오후 5시가 넘어서 고흐의 자취를 찾아가기 위하여 모네의 정원과 그의 무덤이 있는 마을 지베르니(Giverny)를 출발하여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다시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異國의 5월 푸른 초원,  이 무슨 엉뚱한 생각일까? 마치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만 하고  찾아가지 못하던 유년시절의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참 이상하다. 나는 내 생의 4분의 3을 도시에서 살았고 농촌에서 살았던 기간은 그만큼 짧았지만,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그 짧았던 세월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지금도 바보처럼 현재보다는 과거를 안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10 여분을 달려가다 중간에 강과 숲이 아름답고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곳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어 잠시 를 멈추고 고향 같은 그곳의 사진도 몇 장 찍는다. 오베르에 도착하여 처음 들른 곳이 고흐 공원. 그의 사후 1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곳이 고흐 공원으로 명명되고, 동상까지 세워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흐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교회가 그의 하숙하던 집 주면 가까이에 있다.

과 70일을 이 마을에 살면서 72점의 명화를 남겼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유작들을 한갓 이름 없는 가난한 화가의 보잘것없는 습작에 불과한 것들로 생각했을 것이다. 1890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고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충격에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형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동생 태오마저 병사하고 만다.

두 달 사이에 시아주버니와 남편을 잃게 된 태오의 아내는 그의 유품들을 소중하게 정리하여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가족들 마저도 쓸데없는 것들을 내다 버리라고 푸대접을 하지만, 그녀는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전시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일찍이 형의 천재성을 믿고 어려움 속에서도 물질적, 정신적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동생 태오와, 태오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위대한 천재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된 그녀는 형제간에 주고받은 668통의 편지를 모아 책으로 발간하였고,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리지 않았던, 이름 없이 살다가 간 시아주버니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노력한 그녀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지금 세계 미술경매시장에서 사상 최고가에 팔리고 있는 그의 그림들이 어떻게 보존될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가난과 병마와 고독 속에서 37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당시에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동생부부 말고도 그를 치료했던 가셰박사와 편지를 전해주던 우체부, 그리고 고갱과 같은 후기 인상파 화가들 몇 명이 있었지만, 동생 부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아를에 있을 때 그의 권고로 아를까지 내려와 같이 그림을 그리며 서로를 격려하던 친구 고갱도 그의 괴팍했던 성격 때문에 애절한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곁을 떠나버렸고, 그와의 결별이 병세를 더 악화시켜 자기의 귀를 자르게 되는 결과가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가까이 지내며 그를 치료해 주던 가셰박사도 그의 딸과의 관계 때문에 나중에는 경계하며 멀리하게 되었다. 그의 그림 '오베르의 교회'의 실제 모습은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동생 태오는 형의 생활비와 그림 그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하여 갓 태어난 아이의 우유값이 모자랄 정도였고, 조카가 영양실조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된 고흐는 이 모든 것들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루에 한 작품 이상씩 제작하는 바쁜 일정에서 시간이 얼마 없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던 것을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리고 남겨야 할 유산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책을 통해서 그의 이야기를 읽거나 그의 그림을 대할 때마다 생각했었다. 피를 나눈 동생은 동생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지만, 그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을 만도 한 동생 태오의 아내는 어떻게 그렇게 시아주버니의 뒷바라지를 불평 없이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사후 존경과 사랑으로 끈끈하게 이어졌던 우애를 세상에 알리는 일까지 할 수 있었던 그녀가 한없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하숙집을 찾아보고 마을안 에 있는 그가 그렸던 그림의 현장과 그가 거닐었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서 불운했던 한 위대한 예술가가 남긴 유산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동생과 함께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가려다 시간이 늦을듯하여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 돌아왔다.

 

에필로그

5월 30일

며칠간 방안에만 박혀있다가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가봤던 곳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도 있고,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아직 미쳐 가보지 못한 곳들을 찾아가 보고 싶어서 아내에게 함께 나가자고 했더니, 아내는 집에 남아 딸내미 집안청소도 해주고, 밑반찬도 만들어주고 가야 한다며 혼자 나가라고 하여 오후에야 카메라를 들고 혼자서 집을 나섰다.

 

역시 파리의 상징은 에펠탑과 센강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International Herald Tribune)가 횃불을 상징하는 이 기념물을 에펠탑과 사이오궁 사이를 달리는 센강 북변도로 가운데에 세웠다. 이 아래에 있는 지하도에서 1997년 8월 31일 한 파파라초의 추적을 피하려던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녀를 숭배하던 사람들은  이곳에 한동안 조화를 바쳤고, 때문에 사람들은 이 상징물을 보면 헤럴드 트리뷴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마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상징물인 것처럼...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 시내의 도로 중에서 가장 넓은 거리이다.

영화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을 소설가 에밀 졸라와 함께 신문에 발표하여 드레퓌스 사건을 파헤친 언론인 출신 정치가 클레망소의 동상과 <프랑스의 콧대>라고 알려졌던 드골의 동상도 상젤리제 거리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콧대라고 불리는 드골대통령의 동상이 파리의 자존심으로 상젤리제 거리에 서있다.
파리에도 노점상은 있다. 센강을 따라 규격에 맞추어 늘어서 있는 노점상들은 행인들에게 큰 불편을 주지는 않는다. 이름없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비롯해서 각종 기념품들과 고서적들을 팔고 있었다.

 5 월 31일, 현지시간 오후 1시 30분 출발하는 에어프랑스는 11시간을 날아 6월 1일 아침 7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년여 전에 다녀왔던 파리를 두 번째 다녀왔지만, 처음 다녀올 때 구경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보았고, 사진도 많이 남겼다. 무엇보다도 딸아이가 운전하여 다녀온 샹티이, 지베르니, 오베르에서 이름만 듣고 사진에서만 보던, 고흐와 모네가 살았던 마을을 내가 직접 거닐면서 그들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현역 화가 장 폴씨 부부를 만나 그들이 살고 있는 숲 속의 마을에 초대받았던 일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무슨 인연으로 우리는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도 만나 서로가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