程明道(1032-1085),
閑來無事不從容(한래무사 부종용) 한가로워 무사하나 차분하지 않으니
睡覺東窓日已紅(수각동창일이홍) 잠을 깨면 동창에 해는 이미 붉었구나.
萬物靜觀皆自得(만물정관 개자득) 만물을 자세히 바라보면 모두 분수를 따르고
四時佳興與人同(사시가흥 여인동) 사계절의 아름답고 흥겨움은 인간과 같은 것이라.
道通天地無形外(도통천지 유형외) 도는 천지의 형체 없는 것에도 있으니
思入風雲變態中(사입풍운 변태중) 생각은 풍운의 변화 속에서 얻어진다.
富貴不淫貧賤樂(부귀불음 빈천락) 부귀에 마음 흐트러지지 않고 가난해도 즐거워 하니
男兒到此是豪雄(남아도차 시호웅) 남아가 여기에 이르러면 영웅 호걸이 아니랴.
이 시는 북송(北宋)의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 불리우는 정호(程顥)의 칠언율시이며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지방관으로 지냈다가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지은 것으로, 가을이 되어 만물과 자신을 돌아보며 빈천을 즐기며 사는 삶이 영웅호걸의 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호는 주돈이의 사상을 이어받아 천지의 움직임을 '역'(易)에 기초하여 '생생'(生生)이라고 보고, 만물은 모두 천지의 생의(生意)를 받은 '일체'라고 하는 만물일체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 시에서의 ‘靜觀自得(정관자득), 즉 차분한 마음으로 사물을 볼 때 세상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라는 말이 주요한 핵심이다.
○ 정호(程顥, 1032~1085) : 중국 송(宋)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 시호(諡號)는 순공(純公). 명도선생(明道先生)으로 호칭되었다. 대대로 중산(中山)에 거주하였으나 후에 하남(河南)에 이주하였다. 부친 향(珦)은 지방관이었을 당시 주돈이를 알아 정호, 정이 형제를 그에게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진사에 급제한 후 지방관으로 활약하였다. 1070년 경에 여공저(呂公著)의 추천으로 중앙정부에 들어갔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거론되자 의견을 달리하여 직을 떠나 지방관으로 지냈다. 그 성격은 온후 관대하여 동생 이천이 이론적이며 준엄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명도사상(明道思想)의 특색은 인설(仁說)·성론(性論)인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역적논리(易的論理)의 전개로서의 형이상적 사유이다. 한 살 어린 아우 정이(程頤)와 더불어 이정자(二程子)라 일컫고 그들의 학설을 ‘정학(程學)’이라 부르며 주자(朱子)의 학설과 함께 ‘정주학(程朱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종(仁宗) 명도(明道) 원년(元年)에 나서 신종(神宗) 원풍(元豊) 8년(1085)에 54세로 죽었다.
○ 정이(程頤,1033~1107) : 伊川先生(이천선생). 중국 북송(北宋)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북송오자(北宋五子) 중에 한 사람이다. 자(字)는 정숙(正叔)이고 이천백(伊川伯)에 봉해졌으므로 이천선생(伊川先生)으로 불리었다. 하남(河南) 낙양(洛陽) 출신이다. 정호(程顥; 程明道)의 아우로서 정호와 함께 이정(二程), 또는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오랜 기간 낙양에서 강학하였으므로 그들의 학문을 '낙학(洛學)'이라고 한다.
[고문진보후집]124.四勿箴(사물잠) - 程頤(정이:正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