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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稷大祭

2009년 9월 30일

이 제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고 추수에 감사하는 제례이다. 즉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드리는 제례이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전부터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것이 조선왕조시대에 전통 유교 예절로 정착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는 '사직이 곧 국가'로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국가 행사였으나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사직대제도 폐지되었었고, 그 제단도 대부분 허물어 없애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거나 다른 시설물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 각 지역에 사직이라는 이름을 한 공원 또는 운동장이 1910년 이전에는 우리 조상들이 땅과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평안과 추수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던 사직단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사직단은 보통 도성의 서쪽에 위치하며,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은 서쪽에 설치했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직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앞서 말한바와 같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도 991년(성종 10)에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2)에는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었다. 그 이듬해에 사직의 터를 잡았는데,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정했다. 1395년 사직단의 축조공사가 시작되어 단의 설치가 완성된 이후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사직단은 정4각형의 평면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2장 5척 즉 25척, 높이는 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단의 사방 중앙에는 3층의 섬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단과 직단 사이의 간격은 5척으로 되어 있다.

 

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臘日:동지 뒤의 셋째 成日)이 되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대향사(大享祀)를 지냈으며,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행했다. 이러한 각종의 제례와 관리를 위해 1426년(세종 8)에는 사직서(社稷署)를 담장 밖 북쪽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1908년 칙령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사직단에서 국가제사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사직단은 담만 남고 나머지 부속물은 거의 파괴되어 사직과 종묘의 신주를 함께 옮기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옮겨진 바 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圜丘壇)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황제위(皇帝位)로 나아간 고종은 사직단의 지위도 올려 태사(太祀)·태직(太稷)으로 고쳤다. 그러나 사직단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대신 일제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와 관련된 부속건물들을 철거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학교부지로도 분할되었다. 1960년대에는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그 부지의 축소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1970년대에는 도서관·수영장·동사무소·파출소 등이 건립되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맥이 끊겼던 사직대제가 복원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서울시와 종로구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문화행사로 사직대제를 열어달라고 전주 이씨 대동종약회에 의뢰한 데서 시작되었다. 제례의 복원을 위하여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그 전수를 필생의 사업으로 살아왔던 고(故) 이은표씨와 그의 제자 이건웅씨의 공로로 그 전통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니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들의 공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가행렬의 재현에 필자가 대사간으로 참여했다.
어가행렬에서 大司諫으로 참여한 필자( 행렬을 시작하기 전 덕수궁의 중화전 앞에서).
우의정, 좌, 우 승지들로 참여한 종친들과 함께
조선시대 어가행렬(御駕行列)에는 전부고취(前部鼓吹)와 후부고취(後部鼓吹)가 있는데, 전부고취는 취고수(吹鼓手)라 하고 후부고취는 세악수(細樂手)라 한다. 이 세악수가 오늘날의 삼현육각에 해당한다. 서울여상의 취타대가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문을 나선 어가(御駕)가 사직단을 향해 행렬을 시작하기 전 교통 통제를 기다리고 있다.
전부고취의 뒤를 이어 문무백관이 어가의 앞에서고 어가의 뒤에 호위무사들의 뒤에 후부고취가 따른다.
제례악과 제례무를 담당한 국악예술고등학교 학생들과 제례악 연수생들.
헌관과 찬의가 제례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제 집사와 헌관이 제단에 오르기 전 손을 씻게(세흘)  하기 위하여 마련된 관세위.
집례와 찬의가 제단의 봉부위치로 나아가는 취위(就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