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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에서의 단상

2010년 4월 16일

-꽃 이야기-

국립현충원의 벚꽃이 아직도 지지 않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서 나는 슬픔을 느낀다. 지난 3월 26일 서해에서 침몰한 해군 함정 천안함의 참사가 온 국민들을 참담함속에 잠기게 하고 있다. 아직 그 침몰  원인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20여일 만에야 38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8명의 젊은이들은 그 시신마저 찾지를 못하고 있다. 함수를 아직 인양하지 못하고 있으니 찾지 못한 시신들이 그곳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현충원의 벚꽃처럼 활짝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져 버린 꽃들을 애도한다.

 

국립묘지 가까운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마치고, 갑자기 국립묘지를 다녀오고 싶어졌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데도 아직 한 번도 참배한 일이 없었던 죄스러움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였을까? 정문을 들어서니 묘지쪽으로 가는 길가에 무심한 벚꽃이 때를 알고 활짝 피어 있었다. 평소에 바쁠 것도 없으면서 계절이 건너 뛰어 지나가 버린 듯,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도 모르고 뒤늦게야 아! 벌써 계절이 이렇게 되었나? 하고 아쉬워 하던 때가 많았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일이 드문 것도 꼭 바빠서 만은 아니듯, 나도 해마다 여의도의 벚꽃이 언제쯤 만개하리라는 것을 생각했다가도 꽃구경 한 번 제대로 한 기억이 없다. 더구나 금년 봄 같은 해에 꽃구경을 생각이나 했으랴!

  

-건망증(健忘症) 이야기-

건강보험공단에서 매 2 년 마다 실시하는  건강검진을 받기 위하여 집사람과 함께 아침식사를 거른 채 병원에 갔다. 한 달쯤 전에 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엊그제 형님께서 창릉(昌陵-예종대왕과 안순왕후 한씨의 능) 기신제(忌辰祭)에 같이 참반하자고 하셨을 때, 병원에 예약했던 것을 깜빡 잊고 같이 참반하겠다고 말씀 드렸다가 뒤늦게야 생각이 나서 다시 형님께 혼자 다녀오시라고 전화를 드렸었다.  

 

위(胃)내시경검사를 포함한 건강검진을 끝내고, 병원에서 응답을 요구한 설문지의 물음에 “그날의 날짜를 깜빡 잊는 일이 있느냐”, “약속한 날자를 가끔 잊는 일이 있느냐”는 항목에 그렇지 않다고 답한 것이, 다시 생각하니 거짓으로 답한 꼴이 되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나이는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나는 시기인 모양인데, 나는 아직도 스스로 젊고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나의 뇌세포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하며 편하게 살아야 겠다.

 

-창빈묘(昌嬪墓) 이야기-

국립묘지에 들어서니, 어디부터 갈 것인가도 생각하지 않고 온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표지판을 따라 가다가 매점에서 창빈묘와 전직 대통령들의 묘 위치를 물었다.

이곳은 창빈 안씨의 묘역이다. 창빈 안씨(昌嬪安氏)는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1488-1544)의 후궁으로 14대 임금인 선조(1522-1608)의 할머니가 되는 분니다. 1499년 7월 9일 출생하여 아홉 살 때인 1507년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1518년 중종의 총애를 받았고,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둘째 아드님이 선조 임금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1568년 덕흥부원군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 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1577년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향사되었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묘소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 석등, 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1683년 숙종 때 건립된 신도비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우리 대통령들 이야기-

519년을 이어오던 조선왕조가 1910년 일제의 침탈에 의하여 국권을 빼앗기고,  왕조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나라 없는 설러움 속에서 일제의 갖은 핍박을 받으며, 우리 말과 우리의 글까지 쓰지 못하던 36년간의 암혹 속에서도 민족혼을 잃지 않고 잘 견디어 왔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 우리는 연합국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1948년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해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 후 제2, 제3, 제4, 제5, 제6 공화국을 거치는 동안, 현재의 17대 대통령을 선출할 때까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현 이명박 대통령까지 12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다. 오늘 이곳 국립묘지에서 내가 찾아가 참배를 한 전직 대통령 세분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

황해도 평산 출생. 조선, 대한제국의 근대화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이며 대한민국의 제 1, 2, 3대 대통령이다. 한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탄행당하여 사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임기중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4.19 혁명 직후 사퇴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통합 대한민국입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김구 등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 1948년 5월 30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 7월 24일부터 1960년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초대. 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0년 4대 정. 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으나 3.15 부정선거로 퇴각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처음 이름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에 의해 설정된 수역(水域)의 경계선. '한일 양국의 평화 유지'를 근본 취지로 삼고 있다고 하여 '평화선' 또는 '리 라인'(Rhee Line)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에 인접한 해붕(海棚) 및 해양의 광물과 수자원을 보호·이용하기 위하여 한국이 주권을 보지(保持)·행사한다고 선언된 이 수역은 해안으로부터 평균 96㎞(약 53해리)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 수역 내에서의 수산업과 어업은 한국정부의 관할·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울러 이 선은 일종의 방위수역의 성격도 겸하는 것이었다. 이 선을 선언하게 된 배경으로는 한일간의 어업 격차가 큰 실정에서 일본과의 어업분쟁을 예방하고 어업 및 대륙붕 자원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했으며,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인접 해양의 주권적 전관화 추세 속에서 기존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선은 일본을 비롯해 미국·영국·타이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어오다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부의 묘
이승만 대통령의 묘역에 목련이 눈부시게 피었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 대한민국의 군인. 교육인. 정치가이며 5.6.7.8.9대 대통령이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이후 만주국 장교였다. 호(號)는 중수(中樹),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 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집권기간동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며 산업화를 일궈냈으며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을 시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으로 야당 및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기적을 이뤄내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특히 도시화와 다르게 새마을운동은 농촌발전에 대한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평가 등에 대해서 1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한편 친일파 행적, 남로당과 관련된 공산주의 활동 등과,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초헌법적 인권 탄압, 노동운동 및 야당 탄압 등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별도로 독도밀약을 채결하면서까지 한일협정을 타결 한 것에 대한 찬반 논란과 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그의 핵개발 추진과 암살당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혹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박정희 부부의 묘

김대중(金大中 1924-2009)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 DJ, 대한민국의 정치인, 사업가이다. 1998년부터 2003년 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 6.7.8.13.14대 국회의원(5선)을 지냈으며, 군사정권의 위협으로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국내외에서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납치사건 등 으로 인해 국내 외에 충격을 주었다. 6월 항쟁 이 후에는 평화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그는 민주화의 선구자라는 평가와 함께 해외에서는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號)는 '후광(後廣)이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라 비유되며 불려졌다. 일제하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일본어 豊田大仲),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이다. 연설에 능하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남북공동선언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나 발표하였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IMF 관리체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개혁 등의 정책을 펴서 IMF에서 빌린 부채를 예정보다 앞선 2001년 전액 상환하였다.

 

한편,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 확대, 경의선·동해선 연결 및 민간 통일운동의 활성화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화해·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여성부 신설, 정보통신(IT)산업 기반정착 등 인권과 복지분야에서 개선을 이룩해냈으며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민주당에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제를 도입해 젊고 개혁적인 정치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대한민국 제 15대 김대중 대통령의 묘; 이 묘역은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묘역에 비해 매우 협소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