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5일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김일손·권오복·이목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개요
사초(史草)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배경
태종에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 봉건국가 체제는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대와 성종 초년에 걸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척과 정실 등이 벌족을 이루면서 부패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세종대 이후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던 경제적 상황과 훈구파의 권력장악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연원을 갖는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점에서 토지겸병 확대현상을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이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운동과 유향소(留鄕所) 재건운동을 통해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1498년의 무오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전개과정
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문제삼았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과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목·허반 등을 보름간 스스로 신문하여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며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서들이 불살라졌으며,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고 처형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논죄 되었으며, 어세겸·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영향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 사림파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사화로 많은 수의 사림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전횡과 훈구파의 득세로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한편 이 옥사의 주모자 가운데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으며, 이극돈은 잠시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곧 광원군(廣原君)으로 봉해지는 등 훈구파들은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뒤에도 연산군과 중종의 재위 동안 사림파는 잇단 사화를 겪으면서 훈구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사림은 재지(在地)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조선 성리학의 중심을 이루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도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이 지은 제사문으로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의제(義帝)를 추모하는 글이다.
정축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5]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르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간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양흔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옵컨데 영령은 와서 제사음식을 받으소서.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 복위문제로 야기되어 훈구와 사림이 피해를 입은 사건.
성종 때부터 사림이 중앙정치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면서,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훈구들의 비리를 지적하는 등 새로운 정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변화는 홍문관의 언관화에 따른 언권의 강화와 성종이 훈구들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강화되었다. 이런 변화 위에서 사림의 진출이 강화되었고, 훈구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세력보다는 오히려 사림을 더욱 견제했다. 사림 역시 연산군의 정치성향이 성종과는 달리 유교적인 왕도정치에 입각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연산군을 적극 견제하였다. 이와 같이 사림은 훈구와의 갈등관계 위에서 연산군을 견제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고, 결국 왕과 훈구의 결속에 의한 반격인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휩쓸리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고 언론도 위축되었으며 주도권은 왕과 훈구 재상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재상들 사이에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연산군이 언론의 견제가 약화된 상황에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국가재정은 궁핍해졌고, 그 재정 부담을 백성뿐 아니라 훈구 재상들에게 지우자 재상들과 연산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왕과 재상의 갈등이 심화되자 재상들은 궁중의 경비를 절약하고 왕의 방종을 견제하려 했으나, 외척인 신수근(愼守勤 : 연산군의 비인 신씨의 오빠)을 중심으로 임사홍(任士洪) 등이 연산군을 지원하면서, 오히려 사화를 야기하여 훈구 재상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무오사화로 위축되었지만 일정한 기능을 하면서 왕의 방탕을 견제하던 사림이 그 피해에 같이 연루된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갑자사화의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숙의윤씨).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은 1479년(성종 10)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하였다(→ 윤씨폐비사건). 왕과 재상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에 의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지자,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은 귀양보내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追尊)하고 성종 묘에 배사하였다. 연산군은 이때 반대한 언관 권달수(權達手)는 죽이고 이행(李荇)은 유배하였다.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들과 사림들을 제거하려 획책하였으므로 더욱 확대되어 폐위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하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찾아 죄를 묻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윤씨의 사사에 찬성하였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浚)·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 10여 명이 사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이 부관참시되었다. 이들은 훈구 재상들을 거의 망라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홍귀달(洪貴達)·심원(沈源)·이유녕(李幼寧)·변형량(卞亨良)·이수공(李守恭)·곽종번(郭宗藩)·박한주(朴漢柱)·강백진(康伯珍)·최부(崔溥)·성중엄(成衆淹)·이원(李黿)·신징(申澄)·심순문(沈順門)·강형(姜詗)·김천령(金千齡)·정인인(鄭麟仁)·조지서(趙之瑞)·정성근(鄭誠謹)·성경온(成景溫)·박은(朴誾)·조위(曺偉)·강겸(姜謙)·홍식(洪湜)·홍상(洪常)·김처선(金處善) 등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들은 대다수가 사림이었다. 또한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되어 그 피해가 무오사화를 웃돌았다.
폭력적인 사화로 견제세력을 제거한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정당성과 권력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가 심해지고 그 폭정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결속된 반격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성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림은 연산군 때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주도권을 장악한 반정공신들은 연산군 때 악정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사림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세력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사림을 주목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일시 물러났던 사람들이 대거 중앙정치에 등장했다.
이들은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경연을 강화함으로써 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중종을 모범적인 군주로 만들려 노력했다. 또한 기존의 언론기관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권력에 관여하기 위해서 낭관(郎官)에게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부여하여 실무의 결정과 집행과정에서 재상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 천거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사류와 성균관의 학생들을 정치에 참여시켰고, 공론정치를 강화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의견도 정치에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사림은 향촌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향약(鄕約)의 실시로 나타났다.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수용하여 〈언해여씨향약〉을 통해 일반민에게까지 보급했는데, 그들의 호응에 힘입어 단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움직임에 대하여 반정공신들은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낭관권의 형성, 천거제의 시행, 현량과의 실시, 향약의 실시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당하자 사림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림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공신들의 잘못을 탄핵하자 갈등은 점차 심해졌다. 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519년(중종 14)에 다시 가열된 중종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였다. 사림은 일찍부터 이 문제를 주목하여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할 것을 건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힘이 커지면서 1519년에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여 마침내 공신의 3/4에 이르는 76명의 공신호를 삭탈하고 그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게 했다. 중종은 공신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림들을 지원했으나 사림의 독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공신 삭제와 같이 사림의 독주를 허용하는 조처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림의 주장에 밀려 삭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종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사림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했다. 피해를 입은 공신들 역시 사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사림의 탄핵으로 상당수 중앙정치에서 탈락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권력이 위축되어 있던 상황에서 대규모 공신 삭직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심한 위기의식을 가졌다.
김전(金銓)·남곤·고형산(高荊山)·심정 등은 희빈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중심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들은 희빈홍씨를 통해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과장하면서 그대로 둘 경우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趙의 破字)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1519년 11월에 홍경주 등은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자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사림들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가서 사형당하거나 자결했다. 이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이자(李)·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유배·파직을 당했다. 사림들이 언관과 낭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던만큼 피해를 입은 이들 역시 언관과 낭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로 언관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것과 대조가 된다(→ 기묘명현).
사화 이후 공신세력이 요직에 임명되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이들은 사직된 공신들에게 다시 공신호를 반환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면서, 사림의 권력기반이었던 낭관권의 혁파에 노력했다. 이들은 낭관권의 핵심요소인 자천제(自薦制)나 낭관들의 정치적 결속을 문제삼으면서 사림이 강화될 수 있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공신들의 정치적 비리를 공격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당시의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근거 위에서 언권과 낭관권이 서 있었으므로 근본적인 불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재지사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의 중앙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기묘사화는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사림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을사사와 [대소윤의 싸움]
조선 전기에 발생한 4대사화의 하나.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는데,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주로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사화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말이다. 4대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다.
사림파는 기묘사화 이후 중앙정치세력이 거의 없었는데,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고 1543년에는 김인후가 향약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광조의 신원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으며,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빚어졌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미 중종대에 외척 김안로를 축출하면서 다른 쪽 외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외척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것은 예고한 바나 마찬가지였다. 문정왕후는 그의 족질을 시켜 김안로가 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를 하여 김안로를 제거했다.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공신계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외척들이 여기에 가세하여 단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뿐만 아니라 보다 복잡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중종의 제1계비 윤씨가 낳은 원자(元子)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터에 제2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뒤의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두 외척간에 왕위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져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로·윤원형 형제를 소윤(小尹)이라 했다. 대윤과 소윤의 알력 가운데 중종이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인종은 즉위하여 중종 말년부터 진출해 있던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12세의 경원대군이 즉위했다. 모후인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은 핵심 동조 세력과 결탁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양사(兩司)를 통해 제거하려 했다. 당시 양사는 사림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이를 반대하자 이기 등은 중신회의를 통하여 위 3명의 죄상을 아뢰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에서 일단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3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양사의 관원을 파직 시켰다. 또 위의 3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 종친인 계림군도 관련되었다 하여 죽였으며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사림파는 왕위계승 문제에서 대체로 인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했다. 을사사화는 척신인 윤원형이 권신인 이기와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에게 타격을 가한 정치보복이었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일단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했다.
따라서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집단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을사사화의 경우 싸움은 외척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었다. 사화는 대개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지는 지배계급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부분적으로 정치론에서 차이가 나거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려 일어난 사건이었다. 비록 사림파가 화를 당한 것이나 을사사화는 외척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정치적 갈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