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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사에서 배워야 할 이야기들

2010년 7월 1일

하(夏) 나라와 은(殷) 나라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와 달기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 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 나라에 복속(服屬)됐던 은(殷)나라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기서 중국 고대 역사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1) 선사시대 (기원 3,000년경) - 중국 문명의 발생(황하유역 중심으로 화북지방)
     삼황(三皇) : 복희씨(伏羲氏) - 여와씨(女 氏) - 신농씨(神農氏)
     오제(五帝) : 황제(黃帝) - 전욱( 頊) - 제곡(帝 ) - 제요(帝堯) - 제순(帝舜)

(2) 하(夏)왕조 계보(400여년)


    1)  우(禹) - 2) 계(啓) - 3) 태강(太康) - 4) 중강(中康) - 5) 상(相) - 6) 소강(少康) - 7) 저( ) –

    8)  괴(槐) - 9) 망(芒) - 10) 설(泄) - 11) 불항(不降) - 12) 경( ) - 13) 근( ) - 14) 공갑(孔甲) –

    15) 고(皐) - 16) 발(發) - 17) 걸(桀)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은(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 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인 무왕(武王)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3) 은(殷) (기원 1,500년경) - 현재 유적이나 사료(은허 유적지)에 의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

최초의 왕조. 은의 시조는 '설'로서 그의 어머니는 유융씨의 딸 '간적'이다. 간적은 어느 날 세 사람의 친구와 강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제비가 날아오더니 알을 떨어뜨리고 가 버렸다. 간적은 무심코 알을 집어 깨어 먹었는데 그러자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 설은 우(禹)를 도와 치수 공사에도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14대손 천을(天乙)이 덕이 높기로 이름 높은 은의 탕왕이다.

은허 안동현 소둔촌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은 왕조를 중흥시킨 반경이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긴 은이 멸망할 때까지 2백 수십 년 간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이 곳이 구갑(거북 껍질)과 수골(길짐승의 뼈)에 새겨진 글자를 비롯해 당시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은허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사기]에 기록된 은왕조의 역사 등이 모두 가공적인 것이라 여겼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천 수백 년 전의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30왕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으며 은허에서 출토된 복사(점장이가 쓴 점의 기록)에 기록된 왕의 대조해 볼 때 몇 사람의 이름과 계통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마천의 사기의 신빙성을 재인식시키고 그 가치를 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4) 주(周) (기원 1,100년경) - 무왕 때 은을 멸망
     춘추시대 (기원 770-403) - 춘추오(5)패( 진晋 포함 )
     전국시대 (기원 403-221) - 전국칠(7)웅( 진秦 포함 )

     제자백가의 활동 --- 제자백가(諸子百家)

가렴주구(苛斂誅求) 

아무리 영웅호색(英雄好色)이요, 군주무치(君主無恥)라고는 하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통치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먼 훗날인 춘추시대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한 고사를 한 토막 살펴보기로 한다.

공자가 태산의 곁을 지나려는데 마침 어떤 부인이 새로 생긴 봉분 앞에 엎드려 곡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공자가 조용히 이를 들으시더니, 마침 옆에 있는 제자 자로(子路)로 하여금 그에게 물어 말하되 "그대의 곡성은 한결같이 거듭 근심이 있는 것 같으니라." 이에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옛적에 나의 시아버지도 호랑이한테 죽고, 나의 남편도 또 그것에게 죽고, 이제 나의 아들이 또 그것에게 죽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되 "그러면 어찌하여 이곳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여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되 "제자들아 이를 들어라. 가혹한 정치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니라."

(孔子가 過泰山側 할새, 有婦人이 哭於墓者而哀어늘 夫子가 式聽之하시고 使子路로 問之曰 "子之哭也는 壹似重有憂者로다." 而曰 "然하다 昔者에 吾舅死於虎하고 吾夫又死焉하고 今에吾子又死焉이니라." 夫子曰 "何爲不去也오." 曰 "無苛政也니라." 夫子曰 "小子아 聽之하라 苛政이 猛於虎야로다.")

앞에 든 걸왕과 주왕 두 임금은 그 둘다 지용(智勇)을 겸비하여 초기에는 현주(賢主)소리를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제각각 말희(女+末喜)와 달기(女+旦 己)라는 희대(稀代)의 요녀독부(妖女毒婦)에게 눈이 멀어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과 함께 나라마저 망치고 말았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호화롭고 사치스런 주연(酒宴)을 비유하는 말인데 동의어로 육산주지(肉山酒池)또는 육산포림(肉山脯林)이라는 말도 있다.

고대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매진하여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더니 제각각 그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 되고 말았다.

하(夏)나라 걸왕은 비록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면은 있었으나 남다른 힘과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걸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마침내 나라마저 멸망케 만든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말희(女+末 喜)이다.
 
말희는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정복한 오랑캐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쳐진 진상품 중의 하나였는데 마치 몽고침입 때의 고려 공녀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걸왕은 말희를 보자마자 넋을 잃고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걸왕의 총애를 얻게 된 말희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녀는 우선 궁궐을 다시 짓게 하고 거대한 궁궐이 완성되자, 요대(瑤臺)라고 이름 붙인 누각에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비단옷을 입은 3천 궁녀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면서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잔치를 벌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싫증이 난 말희는 걸왕에게 새로운 주청을 들인다.

"이렇게 3천 궁녀들에게 일일이 음식을 나눠주고 술을 따르게 하는 것은 너무나 지루하옵니다. 차라리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마시고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폐하?"

그러자 걸왕은 애첩이 사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투로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멋진 잔치를 벌여본 제왕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오." 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우선 궁정(宮庭)의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그곳에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우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는,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북소리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거워 하였다.

그러나 말희는 겉보기와는 달리 허영심으로 가득찬 단순한 여인은 아니었다. '내 조국이 이 자의 칼 아래 유린당하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한낱 노리개가 되어 붙잡혀 있는

신세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 한이 없구나.'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 범여(范여)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는 서시의 애국심을 말희에게서 언뜻 볼 수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주지육림의 공사가 완성되자 연못가에서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북소리에 맞춰 안주를 먹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걸왕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라고 호소하는 충신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 나갔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자 날이 갈수록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게 되어 이리하여 마침내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은(殷)나라의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하나라는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이끄는 군대에 멸망당했으며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은(殷) 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대에 이르러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가 나타나니 그녀 역시 주왕이 정벌한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던 것이다.

 

장야지음(長夜之飮) 

달기에 빠져버린 주왕도 역시 걸왕처럼 모든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활惚境)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는데 이는 하나라의 걸왕과 다름이 없었다.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 당하게 된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탐사팀이 1999년 발견한 허난성(河南省) 옌스(偃師)의 은나라 유적지를 다시 정밀 답사한 결과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터임이 확인됐다고 공식 발표(2004. 7. 27)한 적이 있다.

길이 130m, 너비 20m, 깊이 1.5m의 규모로 밝혀진 이 터에선 하 왕조를 망친 걸왕이 밤마다 말희(末喜)와 더불어 주지에 배를 띄우고 술 잘 마시는 자들을 뽑아 멍에를 걸어 배를 끌게 했는데 술에 취해 익사하면 말희는 손뼉을 치고 즐거워했다고 '열녀전'은 적고 있다.

그곳이 미녀 달기(女+旦 己)에 빠져 이궁에 못을 파 술로 채우고 인근 나무들에 살코기를 매달아 숲을 이룬 속에 남녀로 하여금 벌거벗겨 포르노를 실연시키며 밤새워 즐긴 현장이라니, 이 환락에마저 권태를 느끼면 주왕은 곁에서 귀찮게 간(諫)하는 숙부 비간(比干)을 대령시키고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고 들었는데 한번 확인해보자." 며 그 자리에서 해부시켜 심장을 들어내 보았다고 '사기(史記)'는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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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세상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