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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墓 이야기

2010년 7월 16일

운중풍월

工曹判書 諱 重庚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아서 

며칠 전 參議公 門中 어른들 몇 분의 모임에 참석하여 朝鮮王朝 519년을 통해 唯一無二하게 直系로 連이어 五世六將을 輩出하신 나의 傍系 8代祖가 되시는 工曹判書 諱 重庚 할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할아버님의 묘소가 경기도 동두천시 동안동(창말) 亥坐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일가 어르신들과 함께 성묘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묘소는 駐韓 美軍이 占有한 地域 內에 있어서 後孫들이라도 마음대로 出入을 할 수가 없고, 미리 출입을 하겠다고 通報를 하고 점유자들(주한 미군)이 身分 確認節次를 거쳐 關係되는 勤務者의 引率 下에 출입이 可能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신 起文 淸權祠 諮問委員께서 며칠 전 미리 手續을 마쳐놓으신 狀態였다.  

 

7월 12일 아침 9시 30분, 약속 장소인 전철 1호선 창동역에 약속시간보다 10분쯤 먼저 도착했지만, 起文 大父님께서 筆者보다 먼저 나오셔서 기다리고 계셨고, 廷植 박사님(參議公門中會長)께서도 훨씬 일찍 도착하셔서 驛舍 밖으로 나가 다방에서 모닝커피를 한잔 하시고 오셨다고 하신다.  이어 忠宰(나의 형님), 元宰(청권사 이사) 두분 형님이 시간을 맞추어 도착하셨다. 다시 逍遙山行 전철을 타고 가다가  보산역에서 내리니 오전 10시 30분이다.

 

駐韓美軍 보병제2사단 사령부의 출입 管理室에서 전화로 연락을 하니 한국인 民事官 裵氏라는 분이 나와서 승용차로 우리를 친절하게 案內하였다. 軍部隊의 한 가운데 있는 墓所는 駐屯하고 있는 軍人들이 除草作業도 隨時로 하고, 周邊의 管理도 比較的 잘 하고 있어서 때 이른 省墓를 위해 찾아간 後孫들이 보기에도 滿足스러울 정도였다.  

 

우리와는 價値觀이 사뭇 다를 것으로 생각했던 異邦人들이 墓所가 있는 곳을 兵營으로 사용하고 있는데도 墓域을 조금도 毁損하지 않고 잘 保護 管理하고 있는 것은 바로 祖上을 崇拜하고, 때에 따라 성묘를 하면서 先祖들의 遺德을 欽慕하는 우리의 傳統文化를 그들 역시 尊重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같이 參拜하신 一家 어른들께서도 고맙게 생각하신다.

 

廷植博士께서 준비하신 酒果鮑를 상석 위에 진설 하면서 보니 60년이나 지난 戰爭의 痕迹이 여기저기 상석에 총탄자국으로 남아 있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술을 따르고 인사를 드린 後 墓碑를 살피는데 묘비에는 아무런 傷處가 없어 多幸스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重庚 할아버지께서는 起文 청권사 자문위원님의 直系 6代祖이시며, 나의 8代祖 諱 重燮 할아버지와 6촌이 되시니 나에게는 傍系 8代祖가 되시는 분이다. 

 

할아버지의 字는 白也이시고, 호는 雙湖이시다. 孝寧大君의 12세손이며, 呂陽君의 아들 全城君의 8세손이며, 贈 資憲大夫吏曹判書 錫齡의 아드님이시다. 어머니는 贈 貞夫人 昌原黃氏로 僉正 應老의 따님이고, 配位는 贈 貞敬夫人 大邱徐氏로 贈領議政 貞簡公 宗悌의 따님이시니 貞聖王后(영조대왕의 元妃)의 친 언니가 되신다. 그러니 重庚 할아버지께서 英祖大王의 손 위 동서가 되시는 셈이다.

 

1680년(숙종 6년) 4월 22일에 나셨고, 1757년(영조 33년)丁丑 4월 26일에 수(壽) 78세로 돌아가셨다. 1702년(숙종 28)에 進士를 지내셨고, 1727년(영조 3) 增廣試 丙科에 급제하여 正言, 獻納, 掌令, 執儀, 司諫을 거쳐 承旨에 오르셨다. 1743년(영조 19) 東宮 冠禮 때 傳敎官, 右承旨를 담당 加資(註:正三品 通政大夫 이상의 품계) 되시어 工曹參判으로 승계되시고, 大司諫을 거쳐 都承旨를 역임하신 다음 1756년(영조 32) 工曹判書에 승차 되시고, 다음 해 崇政大夫 左贊成에 追贈 되시었다. 

미군부대의 시설물이 가까이 있고, 상석엔 여기 저기 6.25의 상흔이 총탄자국으로 남아 있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직계 6세후손이신 기문(청권사 자문위원)께서 잔을 올리고
훌륭하신 조상님의 얼을 기리며 인사를 드립니다.
착한 미군들이 묘역관리를 잘 해주고 있으며, 벌초도 후손들보다 더 부지런히 하나봅니다.
인사를 드린 후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뒷편에 멀지 않게 소요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정기가 여기 모였을 것입니다.
원재 청권사 이사님과 충재 필자의 형님께서 묘비를 자세히 읽고 계십니다.

참고로 할아버지 이후 5代를 連이어 大將이 되신 여섯 분들의 系代를  살펴보면 둘째 아드님이신 章吾(대군 13세), 큰 아드님이신 明吾의 3남으로 숙부 章吾께 入繼한 得濟 (대군 14세), 득제의 1남 石求(대군 15세)와 2남 鐵求(대군 15세), 석구의 3남으로 숙부인 철구에게 入繼한 景宇(대군 16세) - 景宇에게 入後한  鳳儀(대군 17세) 까지 이다.

1740년경부터 1910년까지 170년 동안 한 집안에서 여섯 분의 大將을 輩出하여 名門家로서의 위상을 크게 떨치셨다. 淸權祠에서 發刊한 己丑譜와 大同宗約院 홈페이지의 人物 檢索서비스를 통해 알아 본 先祖들의 略史를 簡略하게 여기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대장이셨던 章吾께서는 字 子明 號가 蓮溪이며 1714년(숙종 40년) 정월 16일에 태어나서 壽 68세로 1781년(정조 5년) 6월 19일에 돌아가셨다.  1741년(영조17) 進士였으며, 1745년(영조 21) 承旨가 되고, 1747년(영조 23) 全羅左水使, 忠淸兵使, 右籩捕盜大將을 역임한 다음 1755년(영조 31) 統制使로 특제 되었고, 1766년(영조42) 平安兵使가 되었다. 다음해 摠戎使를 거쳐 禁衛大將이 되었으며 1768년(영조 44) 隆武堂에서 실시한 射試에서 과녁에 的中 시켜 加資 되었다.

 

그 후 訓練大將, 刑曹判書를 거치셨다. 공은 활 솜씨가 뛰어나 60대 후반에도 모화관까지 나아가 활을 쏘아 날아가는 고니를 명중시켜 상으로 궁시를 하사 받은 일이 있다. 墓所는 충남 공주시 우성면 대운리에 있다 참판 중복이 지은 표석이 있다.

 

두 번째 대장이셨던 得濟께서는 字가 汝楫, 시호는 直翁, 1743년에 태어나서 1819년 卒 하셨다. 大君의 14세손이며, 知中樞 明吾의 셋째 아들이다. 叔父인 지돈영 章吾에 入繼 되었다. 武科를 거쳐 宣傳官으로 재직 중 1775년(영조 51) 承旨에 특제 되었다. 1780년(정조 4) 忠淸道 兵馬節都使, 1794년(정조 18) 三道水軍統制使, 右捕盜大將, 壯勇將別將, 1799년(정조 23) 京畿水軍節都使, 御營大將, 1800년(순조 원년) 右捕盜大將, 禁衛大將, 軍營大將을 역임, 1803년(순조 3) 御營大將, 1812년(순조 12)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訓練大將과 刑曹判書를 兼任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고상면 진촌에 있다.

 

세 번째 대장이셨던 石求께서는 字가 柱卿, 호는 杞園, 諡號는 伯彪(백표)이다. 1775년에 나셨고, 1831년 향년 68세로 卒 하셨다.

大君의 15세 孫이며, 贈 左贊成 得濟의 첫째 아드님이다. 1791년(정조 15) 壯勇衛에 뽑혔고, 다음 해 壯營試射에 入格 하여 宣傳官이 됐다. 1794년(정조 18) 합이경 정시 武科에서 壯元을 하여 司甕院 注簿에 제수, 1796년(정조 20) 都摠府 經歷(都事), 訓練院 副正을 거쳐 訓練院 正이 되었다. 1800년(정조 24) 司憲府 監察을 거쳐 1802년(순조 3)에는 試射에 뽑혀 堂上인 절충에 올라 內禁將이 되고, 1804년부터 1808년까지 2년 간격으로 경흥부사, 장단부사, 및 영종첨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1809년(순조 9) 忠淸道 水使를 거쳐 京畿道 水使를 지낸 다음 嘉善에 올랐으며1812년 御營中軍 都摠府 副摠官으로 임명 되었다.

 

다음해 都監中軍이 되고 이어 禁軍別將, 捕盜大將, 黃海兵使를 역임했다. 1824년(순조 24) 禁衛中軍이 되고 다음해에는 統制使를 거쳐 1827년(순조 27) 摠戎使, 捕盜大將을 역임했다.  墓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酉坐였으나 도시개발에 의해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상태이다. 

  

네 번째 대장이셨던 鐵求께서는 1787년에 贈 左贊成 得濟의 2남으로 태어나서 1836년 49세에 돌아가셨다. 字가 빈경, 號는 葵園 이고 贈 兵判 石求의 아우이기도 하며 大君의 15세손이다.

 

1806년(순조 6) 別薦으로 入侍하여 司僕寺 內乘에 특제 됐으나 闕內 試射에서 入格 했다. 다음 해 式年 殿試에 급제하여 參上인 무 경 별군직인 宣傳官 都摠府 都使에 제수 되었다. 1808년(순조 8) 宮中 試射에서 優等하여 堂上인 절충에 오르고 羽林將 위원군수가 되고 1810년(순조 10) 에는 內乘 파주목사를 거쳐 2년 뒤 全羅左水使가 되었다. 1814년(순조 14)에 行 首席宣傳官에 이어 1819년(순조19) 정주목사, 1822(순조22) 회령부사를 거친 후 교동수사 때 嘉善으로 승자됐다. 羽林將),

 

1824년(순조 24) 禁衛營中軍 복병사가 되고 1826년(순조 26)에는 五衛都摠府 副摠管 訓練院 都正, 捕盜大將이 됐다. 다음해 영변부사를 거친 후 平安兵使에 옮겼고, 1830년(순조 30)에 楊州牧使를 지냈다. 그 후 禁軍別將, 承政院 左承旨를 거친 다음 禁衛大將이 되고 1833년(순조 33) 刑曹參判에 이어 동지의금부사와 漢城判尹이 됐다. 1835년(헌종 1) 훈련원 경 도정이 되고 다음 해 지훈련원사로 있다가 별세했다.  領議政에 贈職되고 원흥군에 봉군 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축좌에 있다가 도시개발에 의해 옮겨졌다.

 

다섯 번째 大將이셨던 景宇께서는 1801년 生父 石求의 3남으로 태어나 叔父 贈領議政 鐵求의 繼子가 되었고, 1887년에 卒 하였다. 字는 聖瑞, 號는 雲皐, 초휘는 景純이며 大君의 16세손이다.

別薦으로 宣傳官을 거쳐 장연, 창성, 진주, 선천, 양주 등 지방 首領을 역임하였다. 1849년(헌종 15) 御營大將에 이어 1852년(철종 3) 訓練大將에 임명되었다. 그 뒤 摠戎使, 左邊捕盜大將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862년(철종 13) 刑曹參判시 加資되어 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左邊捕盜大將으로 방화범을 잡지 못한 문책으로 전라도에 유배되었다가 高宗太皇帝가 卽位한 뒤 判義禁府事, 工曹判書, 刑曹判書, 摠戎使 등의 직을

번갈아 역임한 다음 1886년(고종 23)에 親軍別營使가 되었으며 완릉군에 봉군 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계좌에 있다가 도시개발에 의하여 이전 되었다. 

 

여섯 번째 大將 鳳儀께서는 1839년 全羅南道 靈光郡 大馬面 섬암에서 贈吏曹判書 泰純의 아들로 태어나서 判書 景宇의 繼子가 되었고, 1919년 卒 하였다. 字는 善翼, 號는 松皐, 초휘는 志謙이며 大君의 17世孫이다.

 

1854년(철종 5) 別薦으로 宣傳官에 임명된 다음 순천, 남양, 창성과 1869년(고종 6) 楊州牧使를 역임한 다음 1877년(고종 14) 京畿道 水軍 節都使가 되었다. 그 후 1879년(고종 16) 忠淸道 兵馬節都使를 역임한 후 1883년(고종 20) 左邊捕盜大將에 임명되고 1885년(고종 22) 漢城府 判尹으로 발탁되었다. 1891년(고종 28) 綏陵 山陵親祭 때 別軍職을 맡아 加資되고, 다음 해 右邊捕盜大將이 되었으며 1894년(고종 31) 漢城府判尹 겸 統禦使와 經理使를 겸임하였다.  같은 해 刑曹判書에 임명되었다가 곧 警務使를 겸한 摠禦使로 전보되었으며 다음 해 중추원 1등의관에 勅任官 2등에 서용 됐다.

 

1897년(광무 1) 因山時 陪王大將으로 차출되었고 宮內府 특진관 때 서훈 4등에 올라 八卦章을 받았다. 그 후 警務使 및 憲兵司令官, 陸軍參長에서 副將으로의 승진과 동시 元帥府 會計局總長, 勅任官 1등에 오르면서 軍部大臣. 元帥府 軍務局總長, 議政府 찬정, 護衛隊 摠官, 元帥府 事務總長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 9)에 加資 되고, 다음 해 太醫院卿 때 훈3등 太極章을 받았으며, 같은 해 9월 판동녕사사에 올라 勅任官  1등이 되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省墓 後 同行했던 宗賢님들과 함께 동두천 시내에 들려서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오늘 하루가 얼마나 뜻 깊은 날이었나를 생각한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훌륭한 先祖들의 行跡이나 業積을 크게 자랑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의 삶이 그 조상들의 名譽를 오히려 失墜시키는 점이 허다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훌륭한 祖上의 後孫임을 矜持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 後孫들이 이 時代에 어떤 姿勢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