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9일
운중풍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1번지, 청와대의 담장 서쪽에 있는 칠궁(七宮)에는 조선 후기 왕실의 후궁들 가운데 왕이나, 추존(追尊)된 왕의 생모(生母) 일곱분의 신위(神位)가 봉안(奉安)되어 있으며, 매년 10월 제 4 월요일에 향사(享祀) 한다. 1966년 3월 22일 이 칠궁은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 10월 25일 필자는 이 향사에 제관으로 봉무하게 됨을 계기로 칠궁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칠궁이 이곳에 합사된 유래, 그리고 여기 그 위패를 모신 분들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되었다.
이곳은 원래 1725년 (영조 1) 영조가 즉위하면서 생모(生母)를 기리기 위하여 묘(廟)를 지었는데, 지을 당시에는 숙빈묘(淑嬪廟)라고 했으나 1744년(영조 20)에 육상묘(毓祥廟)로 개칭하였고, 1753년(영조 29)에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1882년(고종 19) 8월 불이 나서 궁이 소실되자 이듬해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1908년(융희 2) 7월 23일 예절이 번거로우면 본뜻을 잃는다는 황제의 조칙(詔勅)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궁들을 이곳에 합설(合設)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의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후편 회현방(會賢坊)에 있던 선조의 후궁이며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묘인 저경궁(儲慶宮), 현 종로구 낙원동의 경행방(慶幸坊)에 있던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景宗)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묘인 대빈궁(大嬪宮), 경복궁 북쪽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영조의 후궁으로 진종(眞宗)을 낳은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묘인 연호궁(延祜宮),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영조의 후궁으로 장조(壯祖)를 낳은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묘인 선희궁(宣禧宮), 그리고 종로구 계동 휘문고교 자리인 양덕방(陽德坊)에 있던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純祖)를 낳은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묘인 경우궁(景祐宮) 등 5궁의 신위(神位)를 육상궁(毓祥宮)에 함께 봉안 하면서 육궁(六宮)이라 하였으나, 1929년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영친왕(英親王)을 낳은 순빈 엄씨(淳嬪嚴氏)의 신위를 모신 덕안궁(德安宮)을 중구 태평로 1가에서 이곳에 옮겨 봉안함에 따라 칠궁(七宮)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칠궁과 위패가 거기 모셔진 일곱 분들의 기록을 시대 순으로 살펴보자.
1. 인빈 김씨(仁嬪金氏)와 저경궁(儲慶宮)
인빈 김씨(仁嬪金氏 1555-1613)는 제 14대 선조(宣祖)의 후궁으로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원종(元宗:定遠君)을 포함한 4남 5녀를 낳았다. 1555년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따님으로 태어나서 명종(明宗)의 후궁인 숙의 이씨(淑儀李氏)의 외종(外從)으로 궁중에서 자랐는데, 열 네 살이 되던 해에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추천으로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천성이 온화하고 부덕(婦德)이 있어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광해군을 몹시 두려워했으나 광해군도 인빈 김씨 앞에서는 공손하였다고 한다. 1613년에 승하하였고, 영조 때 시호를 정하고 궁을 저경궁(儲慶宮)이라 하였다. 능인 순강원(順康園: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은 사적 제 356호로 지정되었다.
저경궁(儲慶宮)은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인 추존왕(追尊王) 원종(元宗)의 구저(舊邸)이자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로, 지금의 중구 남대문로 3가에 해당하는 남부 회현방(會賢坊) 송현(松峴)에 있었다. 이름 역시 송현궁(松峴宮)이었는데, 1755년(영조 31) 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김씨(敬惠裕德仁嬪金氏)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하면서 저경궁으로 고쳤다. 그러다 1870년(고종 7) 경우궁(景祐宮)의 별묘로 위패를 이안(移安)하였다가, 1886년 경우궁(景祐宮)이 옥인동(玉仁洞)으로 이건(移建)되면서 함께 옮겨졌다. 1908년(순종 2) 다시 인빈(仁嬪)의 위패를 궁정동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으로 이안(移安)하였는데, 이후 궁의 원래 건물은 1927년까지 남아 있었는데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를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궁의 정문과 하마비(下馬碑)는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뒤뜰에 보존되어 오다가 1933년 정문은 철거되고, 하마비만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2. 희빈 장씨 (禧嬪張氏)와 대빈궁(大嬪宮)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리며 여러 차례 사극(史劇)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던 희빈 장씨는 1659년에 나서 1701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던 숙종의 빈(嬪)이자 왕비로,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전하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후실인 윤씨이고, 역관 장현(張弦)의 종질녀이다.
조선 19대 왕인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禧嬪張氏)는 조선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출신으로 왕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자의(自意)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당쟁과 환국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게 되었고, 권력의 중심에서 영화를 누리고 친정집을 다시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그 권력에 대한 욕심때문에 1701년(숙종 27) 사약을 받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종숙부인 장현에게 의지하고 살았지만, 종숙부마저 경신환국(庚申환국)에 휘말려 죽게 되자 장옥정은 서인들과 권력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조사석(趙師錫)과 종친인 동평군(東平君)의 입궁제의를 받고 입궐하여 남인들의 후견자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莊烈王后:仁祖의 繼妃)를 모시게 되었다.
이때 인경왕후(仁敬王后)와 사별한 20세의 젊은 숙종과 연을 맺어 정인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의 후견인이었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는 남인이 입궁 시킨 장희빈을 싫어하여 궁에서 쫓아내었다. 이에 자의대비가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崇善君=동평군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그녀를 보호하게 하였다.
1683년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明聖王后金氏)가 승하(昇遐)하자, 자의대비(莊烈王后)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설득하여 장옥정을 재입궐시킨다.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86년(숙종 12) 숙종은 그녀에게 종4품 숙원(淑媛)의 후궁으로 봉하여 신분을 보장해주었고, 창경궁의 취선당(就善堂)을 처소로 내려주었다. 남인인 숙원장씨는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와 늘 대립하였는데, 인현왕후는 숙원을 후덕한 성품으로 감쌌으나 교만한 숙원의 훈계를 위해 회초리를 드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688년 소의(昭儀:내명부 정2품)로 승진되어 왕자(뒤에 景宗)를 낳게 되자 숙종이 기뻐하여 빈(嬪:내명부 정1품)으로 승격시키고 희빈(희빈)으로 봉하고, 아들인 왕자를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仁顯王后 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왕자 윤(윤)을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張昭儀)는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
이에 서인 세력은 남인인 희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었을 때 후일을 염려해 책봉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숙종의 분노를 샀을 뿐만 아니라 남인들에게 서인들을 탄핵할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다. 남인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윤빈(尹彬)등이 서인들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을 파직시켜 제주도에 유배하여 사사케 하였으나 중로 정읍으로 이배 되었다가 사약을 받게 하였다. 권력은 남인들에게 넘어갔고, 남인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등이 등용되었으니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이후 서인에게서 남인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여파로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는 폐비가 되고, 장희빈(張禧嬪)은 왕비가 되었으며, 그 부모들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追崇) 되었으며, 오빠 장희재는 포도대장, 총융사, 한성부 좌윤 등 고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흐르자 남인들의 횡포가 점점 심해진다. 이때 숙종의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폐비 사건의 옳지 못함을 깨우치기 위해 김만중이 쓴 소설 ‘사씨남정기’를 읽은 숙종은 후회하게 된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등이 반대당인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범위를 확대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에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남인의 민암(閔黯)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權大運),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 박세체(朴世采), 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환국이라 한다.
이미 죽은 송시열, 김수항 등은 다시 복작(復爵) 되고, 남인들은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장희재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章)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 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결국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그 부모에게 내려졌던 부원군과 부부인의 호가 박탈되고, 희빈의 처소 또한 대조전에서 과거에 사용하던 창경궁의 취선당으로 옮겨졌다.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승하하였다.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희빈이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신당을 왕에게 고하였고, 마침내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여기 관련된 장희재가 처형되었고, 취선당의 궁인, 무녀(巫女) 등도 참형에 처해진다. 이사건을 무고의 옥(巫蠱의獄)이라 하는데, 이때 희빈의 처우에 대해 관대하게 처우하자는 당시 영의정인 최석정은 부처되고, 같은 이유로 남구만, 유상헌(柳尙憲)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 하였다. 무덤은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1960년대 도시화 개발로 옮겨졌다. 그녀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대빈궁은 1722년(경종 2)에 지금의 낙원동에 해당하는 중부(中府)경행방(慶幸坊)에 건립되었다. 1870년(고종 7)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1887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가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으로 옮겼다.
3. 숙빈 최씨(淑嬪崔氏)와 육상궁(毓祥宮)
역시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淑嬪崔氏)에 관한 이야기도 T. V. 드라마 [동이]로 최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 리에 방영되었었다. 숙빈 최씨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따님으로 1670년에 태어났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처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 서인이 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된 이후 숙빈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받고 1693년 4월에 숙원(淑媛)이 되었다. 숙종19년(1693년)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왕자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의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으니 이는 후에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이다. 같은 해인 1694년 최씨는 숙의(淑儀)가 되었다. 최씨는 숙종 21년(1695년)에 귀인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에는 조선 제 6대왕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淑嬪)으로 봉해졌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희빈 장씨(禧嬪 張氏)가 중전일 때는 그녀에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인현왕후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위 되자 평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숙종이 장희빈의 일이 재발할까 염려되어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도 숙빈 최씨는 왕후가 될 수 없었다.
1718년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선원록(璿源系譜紀略) 등에 의하면 영수 왕자와 영조의 아래에도 조졸(早卒)한 왕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英祖)이다. 영조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29년(1753년) 육상궁 (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육상궁은 현재 칠궁의 연호궁내에 합사되어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묘소 또한 영조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또한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 일에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
4. 정빈 이씨(靖嬪李氏)와 연호궁(延祜宮)
정빈 이씨(靖嬪 李氏(1693년~1721년)는 조선 제 21대 왕 영조(英祖)의 첫 번째 후궁으로 1719년에 낳은 영조의 원자 효장세자(敬義君, 훗날의 진종) 의 어머니이다.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이었고, 영조가 아직 연잉군이었을 적에 그의 첩이 되었다. 이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으나, 1721년에 28살의 나이로 급작스레 훙서하였다.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내명부 정 4품 소원(昭媛)에 추증 되었으며, 1725년에 경의군이 세자가 되자 정빈(靖嬪)의 봉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법적 부친인 효장세자가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되자,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연호궁은 칠궁의 하나이며 육상궁과 같은 건물에 신위를 모셨다.
5. 영빈 이씨(暎嬪李氏)와 선희궁(宣禧宮)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 1764년)도 정빈 이씨(靖嬪 李氏)와 마찬가지로 영조의 후궁이다. 본관은 전의(全義)로, 증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김씨 사이의 딸이다.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친할머니이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5녀를 두었다. 1701년, 궁녀로 입궁하여 영조의 승은을 입었고 이후 1726년 내명부 종 2품 숙의에 책봉되었다. 1728년에 귀인이 되었다가 마침내 1730년,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되었다. 슬하에 화평옹주(和平翁主), 화협옹주(和協翁主), 화완옹주(和緩翁主)에 조졸한 옹주 둘을 포함한 5녀와 1남(사도세자), 모두 여섯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와,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는 병을 얻어 숨졌다. 고명 아들인 셋째 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노론 벽파 신료들과 친동생인 화완옹주, 영조의 후궁이던 문숙의까지 나서서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모후인 영빈까지 단죄를 간하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참척(慘慽)하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리었으나,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을 잃었으며, 말년에는 정조의 즉위와 함께 유배에 처해져 정처(鄭妻)로 격하되기도 했다.
자식들과 손주들(의소세손, 화완의 딸 등)의 죽음을 지켜보던 그녀는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가 죽은 지 2년 후 사망하였다. 영조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렸다. 뒷날, 고종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며, 수경원(綏慶園)의 원호를 받았고,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
그녀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은, 그녀가 죽은 1764년에 건립되어 의열묘(義烈廟)라 불리우다가 1788년 (정조 12년)에 비로소 선희궁이 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해당하는 곳에 있었으나, 1870년 (고종 7년)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 (순종 2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기는 등 변동이 잦았다.
6. 현목유비 박씨(顯穆綏妃朴氏)와 경우궁(景祐宮)
조선왕조 제 22대 정조대왕의 후궁이엇던 현목유비 박씨는 1770년에 좌찬성 박준원의 따님으로 태어났으며 정조 11년 수빈(綏嬪)이라는 빈호와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아 음력 2월 12일 가례를 치렀다. 평소 예절이 바르고 사치를 멀리하였으며, 성품 또한 온화하여 어진 후궁이라는 뜻으로 현빈(賢嬪)이라 일컬었다.
1790년에 정조의 2남인 순조를 낳았고 다음해에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후에도 당시의 왕비인 효의왕후를 위로하며 공경하였고,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아첨하는 무리들이 재물을 보내다가 그 무리들이 의금부에 잡혔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보위에 오르고 나서도 당시 대왕대비 김씨와 혜경궁 홍씨, 그리고 왕대비 김씨를 늙어서까지 봉양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유빈은 순조 20년(1820) 12월에 서거하였으며, 그 다음해 신주를 창경궁내 전각에 봉안하여 현사궁(顯思宮)이라 하였다. 순조 24년(1824) 5월에 별묘가 세워지고 같은해 12월에 경우궁으로 명명되었으며 순조 25년 2월에 경우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건립한 터는 구 용호영의 터였으며 그 위치는 북부 양덕방(종로구 계동으로 현 휘문고교 운동장)에 있었다. 건립 후 성일각에는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는 육상궁의 냉천정에 아들 영조의 어진을 함께 봉안한 예와 같다.
사후 현목(顯穆)의 시호를 받아 현목유빈(顯穆綏嬪)이라 하였으며, 대한제국이 개창된 후에 남편 정조가 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1901년(고종 38년)에 그녀도 비(妃)로 높여져 현목유비(顯穆綏妃)가 되었다. 다음해인 1902년(고종 39년)에 특진관 이주영 등이 그녀를 황후로 추존하기를 청하였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되었다.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이 경우궁에 이어하여 혁신내각을 이곳에서 조직, 하루를 묵고 다음날 18일 이재원의 집 계동궁에 이어하였다가 창덕궁에 환어한 사실이 있다. 이일이 있은후, 경우궁을 이건하는 의논이 있어 고종 23년에 양덕방에서 인왕동(현 옥인동 45-46번지 일대로 중부병원 자리)으로 이건하였고, 다시 융희 2년에는 제사친묘를 합사하는 조치에 따라 저경궁·대빈궁·연우궁·선희궁 등과 더불어 경우궁도 육상궁내에 이안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嚴氏)와 덕안궁(德安宮)
조선왕조 제 26대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嚴氏)는 1854년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으며, 을미사변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의민황태자)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1910년 이후 한일합방 이후 귀비로 불렸으며 1911년 사망 후 '순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와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세웠다. 1911년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영월이다.
덕안궁(德安宮)은 광무 원녕(1897)엄비가 황자를 출생하면서 경운궁 내 구 명례궁터에 거처할 궁을 건립하고 경선궁이라 불렀고, 1911년 엄비의 사후 덕안궁으로 개칭하였다. 1913년에는 현 태평로 1가 61번지에 신궁을 영조하여 엄비의 묘우로 하였으며 그 궁명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1929년 7월 11일에는 덕안궁을 육상궁 내로 이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