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2021-08-29 14:43:49 e
3. 仙源 金尙容의 집(淸風溪) 다음 블로그 [운중풍월]에서 2022. 10. 31. 옮겨옴
서촌(西村)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개천들이 복개되어 길이 되거나, 복개된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백악산 줄기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하여 백운동천(白雲洞天)을 이루며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와 인왕산 수성 계곡에서 흐르는 옥류동천(玉流洞天) 사이에 있어서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경복궁 바로 옆이라는 점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일반인은 거의 살지 않았고, 왕족의 주거지, 세력가들의 경승지,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관련된 관서, 그곳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주거지가 전부였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사대부(士大夫), 중인(中人)들도 모여 살게 되었고, 문화 예술인들도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 지방 사족(士族)들도 서울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되었으며, 계유정난으로 좌익 원종공신이 되어 한성 판관이 된 김계권(金係權 1410년~1458년-김상용, 김상헌의 5대조부)이 이곳에 터를 잡아, 장동 김문(壯洞金門)이라는 번성한 족벌(族閥)을 이루기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당시에는 한성부 북부의 순화방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으로 불리다가 후기에 들어 우대(上垈), 또는 상촌(上村)으로도 불렸고, 대한제국 시대에 이르러 서촌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행정동으로는 청운효자동이며, 법정동으로는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그리고 세종로를 어우르며, 동쪽 경계는 경복궁,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사직로, 북쪽은 창의문과 북악산이며, 남쪽의 경계는 인왕산 필운대(弼雲臺)에서 동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인 청풍계는 조선 때 인왕산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특히 이 일대에 조선 후기의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가운데 서울 서촌에 살았던 일파)의 시조라 할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형제 가운데 형 김상용이 살았다. (동생 김상헌은 길 건너편 장의동에 살았다. 장동 김씨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역사 깊은 골짜기는 일제강점기에 시냇물을 덮어 길을 내고 주변을 주택지로 개발하면서 이젠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맑은 바람 시내’(淸風溪)라는 말이 무색한, 범상한 주택가 골목이다.
주희의 글씨라고 알려진 이 백세청풍(百歲淸風-영원한 맑은 바람, 즉 충절을 의미)이 새겨진 바위가 김상용의 집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당시 인왕산으로부터 흘러내리던 맑은 시내 청풍계가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고, 그 도로 옆 現代家 앞 작은 공터 철재 울타리 안에 남아있으나, 송시열이 썼다는 대명일월(大明日月-명나라는 해와 달처럼 영원하다는 의미)이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는 일제 때 공사중 파괴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선원(仙源) 김상용 (金尙容1561~1637)은 병자호란 때 왕족을 호종하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자살하였고, 그의 아우 청음 김상헌은 척화파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6년만에 풀려난 후 인조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 후 그들의 집안에선 무려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가 나왔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한집안에서 낸 가장 많은 정승, 판서다.
그의 시조는 김선평(金宣平)이다.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안동)의 성주로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년)에 권행(安東權氏의 시조), 장정필(安東張氏의 시조)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되고 벼슬이 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김상용의 부친)를 중시조(1세)로 하고 있다.
선원 김상용의 선계와 후손들을 간단히 살펴 보면, 시조 김선평의 10대손이 처음 서촌에 자리 잡은 김계권(金係權 1410년~1458년-김상용, 김상헌의 5대조부)이고 그에게는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학조대사(김영형)이고, 둘째는 김영전, 셋째가 김영균, 넷째가 김영추, 다섯째가 김영수인데, 풍수지리에 밝았던 학조대사가 그의 막내동생에게 청풍계 터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김영수의 증손자가 김극효이며 김극효의 아들이 김상용과 김상헌이다. 김상헌의 증손자가 김수항이며 김수항의 아들들이 그 당시 유명했던 육창(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종, 김창현)이다. 그리고 김창집의 4대 손이 바로 조선 후기 60년 세도정치의 시발이 된 김조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