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2021-08-30 15:05:42 - 본인의 다음 블로그 운중풍월에서 2022년 10월 27. 옮겨옴.
4. 謙齋 鄭敾
겸제 정선(1676~1759)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동한 화가로,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중대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정선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이 수습되고, 조선 고유의 문화가 꽃피던 때였다. 각 분야에서 조선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회화에서는 조선의 미를 담기 위한 노력이 활발했고, 학문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탄생했으며, 한글 시가 문학의 등장, 조선 한문학, 석봉체 등이 탄생하면서 문화적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정선은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종래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를 답습하던 데서 탈피해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산천을 현실적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닌(이를 따로 실경산수화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조선의 독자적인 사상과 이념, 정취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수를 재창조했다고 평가받는다.
청운동에 있는 경복고등학교 교정에는 謙齋가 그렸던 讀書餘暇라는 自畫像을 세긴 [畵聖 謙齋 鄭敾의 집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서 이곳이 그가 살던 집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선은 1676년(숙종 2) 1월 3일 한성부 북부에서 정시익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39세, 어머니는 33세였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출산이었다. 명문이었으나 증조부 대부터 은거하여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아 아버지 대에는 가문이 매우 쇠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정선이 14세 때 아버지가 죽고, 그해 기사환국1) 이 일어나면서 외가까지 타격을 받자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어린 시절 안동 김씨 일문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문하에서 공부했고, 《중용》과 《대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곤궁하여 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양반이었기 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서른이 될 때까지 가난 속에 살았고, 서른 살 무렵 김창집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김창흡 밑에서 동문수학한 평생의 친구인 시인 이병연(1671~1751)과 겸제는 서로 그림을 그려서 보내면 거기에 시를 지어 보내고, 시를 지어 보내면 거기에 그림을 그려 보내면서 늙을 때까지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친구가 노환으로 와병 중인 때였다. 그림 속에는 친구인 이병연의 집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친구의 병이 비 온 뒤의 인왕산처럼 깨끗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 仁王霽色圖를 그렸다고 한다.
그는 중인 계급인 도화서 화원 사이에서 정치적 대립도, 긴밀한 교류도 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는 데 매진했다. 또한 사대부들과 교류가 잦았고,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김창집이 우의정에 오르면서 화원으로서 순조로운 생활을 했다.
정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11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이다. 스승 김창협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난 금강산행에 동행한 뒤 그린 것으로,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 등 산수 13면과 발문 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필법과 묵법이 서툴기는 하지만, 훗날 진경산수 기법의 기초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듬해 금강산에 다시 다녀온 후 그린 〈해악전신첩〉은 현재 전하지 않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여행을 통해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 정선은 60대 이후 진경화법을 더욱 성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