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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글과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 호머 헐버트
그는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는데,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88년 9월 미국에 일시 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하여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육영공원 교수로 계속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 속을 피해 사전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891년 최초의 순 한글 지리 사회 총서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는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했고, 《사민필지》 서문에서 조선의 지배층이 한자만을 고집하고, 한글을 업신여긴다는 기록을 했다. 육영공원(育英公院) 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 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 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논문 〈한글〉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사에서 빛나는 업적이라고 칭송했다.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며,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영어 알파벳보다 우수하다"라고 결론을 밝혔다. 이후 한국의 금속활자, 거북선 등에 대한 한국문화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고,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을 저술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파송 준비과정을 마치고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성부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 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다. 그 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고종황제의 최측근으로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했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으로 고종황제로부터 세번이나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대한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돕고 그 또한 특사가 되어 직접 헤이그로 가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하는 등 대한제국을 위한 눈부신 활동을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 독립성을 호소하였으며,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 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 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 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 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2014년 10월 9일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했다.`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미국인 訖法(Homer Bezaleel Hulbert)이 자기 나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우리나라에서 십팔 년을 머물렀다. 한문을 익히고 우리나라의 公私 문자를 사 모아 태조 때부터 금상 을미년(1895, 고종32년)에 이르기까지 편년사 다섯 권을 저술하여 [大東紀年]이라고 했다. 상해의 美華書館에서 간행하여 우리나라에 싣고 와서 팔았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사보았으나 문장이 아주 속되고 비루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대동기년]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알선으로 윤기진이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사다. 당시까지 역사책으로 [國朝史乘], [國朝寶鑑], [朝野會通]이 있었으나 그 뒤 현종, 철종, 고종 대의 일을 한눈에 볼 수 없어 편찬했다. 한일 관계사에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지만, 종래의 시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사건 비중에 대한 배려를 결여했으며, 인용 사료가 미비하여 단순한 개략 사서에 그친 점이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