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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리철학사(韓國性理哲學史)

한국성리철학사(韓國性理哲學史) - 오병무 저
순천대학교인문학부철학전공동양철학연구실

1. 유교의 한국 유입과 전개
우리나라에 유교(儒敎)의 유입(流入)과 그 전파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이 따로 없다. 유교의 한국 유입에 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다. 문헌상에 나타난 바 우리나라에서 유교식 학교가 처음 세워진 해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372)이다. 이때 서울(平壤)에 '태학(太學)'이, 각 지방에 경당(?堂)이라는 학당(學堂 : 학교)이 세워졌다. 백제에서 학당을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 신라는 이보다 훨씬 뒤인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648) 김춘추(金春秋)가 중국 당(唐) 나라에 건너갔는데 그는 그때 그곳 태학원(太學院)에서 석전제(釋奠祭)의 의례(儀禮)를 견학한 바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에 서는 신문왕(神文王) 2년(682) 예부(禮部)의 소관(所管)으로 '국학(國學)'이라는 유교의 교육 기관을 설치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 16년(717) 당나라로부터 공자(孔子)를 비롯한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칠십이현(七十二賢)의 화상(畵像)을 모셔다가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묘(文廟)' 설치의 시초라 하겠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 국학에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교 '삼과제(三科制)'에 의한 수업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삼과(三科)란 일과(一科)에 《예기(禮記)》·《주역(周易)》·《논어(論語)》·《효경(孝砶?)》, 이과(二科)에《좌전(左傳)》·《모시(毛詩)》·《논어(論語)》·《효경(孝經)》, 삼과(三科)에 《상서(尙書)》·《논어(論語)》·《효경(孝經)》·《문선(文選)》으로 구분하는 수업 방법이다. 원성왕(元聖王) 4년(788)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정하여 이를 수료한 사람에게만이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과거 제도(科擧制度)의 효시(嚆矢)라 하겠다. 이러한 내용에서 통일 신라 이후 전국에는 이미 유교가 유포, 많은 유생(儒生)과 유학자(儒學者)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유학(儒學)은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과거(科擧) 내지는 사장(詞章)과 치자(治者)의 학(學)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외교 문서·시문(詩文, 시와 산문)·정부의 행정 문서 작성과 정리 등 그리고 치자 내지 관료들의 지적(知的) 욕구에 의해 연구되거나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 숭불 정책(崇佛政策)을 쓴 왕건(王建) 태조(太祖)는 경주(慶州)의 문묘를 평양(平壤)으로 옮겨 세웠다가 뒤에 '학교(學校)'라는 명칭을 붙이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도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다시피 했지만 정책적인 면에서나 교육적인 면에서는 유교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成宗) 11년(992) 학교를 '국자감(國子監)'이라 개칭하여 여기에서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 채용하게 하였다. 한편 이때 개칭된 국자감에는 공자(孔子) 이하 여러 현철(賢哲)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문묘의 성격을 띠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 문묘의 배향 인물을 중국뿐만 아니라 평양의 국자감에 동·서무(東西務)를 설치하고 신라의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을 배향함으로써 문묘에 우리나라 현유(賢儒)를 배향한 시초가 되었다. 이 국자감에 부설 기관으로 '학당(學堂)'을 각 주(州) 군(郡)에 설치하여 지방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것이 뒷날 각 지방에 향교
(鄕校)를 설치하게 된 모체가 된다.

예종(睿宗) 때에는 국자감 내에 '양현고(養賢庫)'를 설치, 이는 뒷날의 명륜당(明倫堂)과 양사재(養士齋)와 같은 시설로 선비를 우대,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이다. 충렬왕(忠烈王) 30년(1304) 중앙의 국자감을 '성균관(成均館)'이라 개칭하고 그 안에 대성전(大成殿)을 세워 공자 이하 제현(諸賢)들의 영상(影像)을 봉안함으로써 성균관 안에 묘당(廟堂)과 강당(講堂)을 함께 설치하는 시초가 되었다.

조선도 고려의 성균관 제도를 계승하여 태조(太祖)는 한성(漢城, 서울)에 성균관을 두고 지방에 그 분관으로서 각 부(府)·목(牧)·군(郡)·현(縣)에 각각 1개의 향교(鄕校)를 두게 하였다. 특히 태조는 건국 직후에 경주와 평양 문묘를 향교로 개칭하고 서울에는 향교와 같은 사부학당(四部學堂 : 동 서 남 중)을 두게 하였다. 이때 향교에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선비를 양성하는 강학 기구(講學機構)와 성철(聖哲)을 봉향하는 문묘를 아울러서 설치하였다. 즉 향교에는 반드시 대성전과 동무(東務)·서무(西務)를 설치하여 공자 이하 여러 현철들을 봉안케 하고, 명륜당을 세워 학생 교육을 위한 도장(道場)으로 하며, 동재(東齋)·서재(西齋)·양사재(養士齋)·사마재(司馬齋) 등을 세워 학생들의 기숙(寄宿)의 편의를 도모케 하였다.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敎授 : 從六品)와 훈도(訓導 : 從九品)와 학장(學長 : 品階가 없음) 등 세 가지 직종의 교직원을 지역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배치하였다.

한편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의 자격을 얻은 사람으로 그 가운데 2백 명을 모집하되 정원이 미달될 때에는 유음적자(有蔭嫡子)나 소과(小科) 초시(初試) 합격자와 조관(朝官) 등에서 충원하였다. 성균관에서 수업을 마치면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지방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은 15세 이상 서당(書堂)에서 기초적인 한문(漢文)을 배운 그 지방 양반(兩班)의 자제로 되어 있으나 때로는 평민(平民)의 자제에게도 입학 자격을 부여하였다.

부(府)와 목(牧)의 향교에는 90명, 군(郡)의 향교에는 50명, 현(縣)의 향교에는 30명을 입학 정원으로 하였다. 향교의 수업 과목은 주로 《소학(小學)》·사서(四書 : 대학 중용 논어 맹자)·오경(五經 : 시 서 역 예기 춘추)·《근사록(近思錄)》 등이었으며, 수업을 마치면 소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附與) 하였다. 그런데 향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兵禍)와 사학 기관(私學機關)인 서원(書院)의 흥기로 말미암아 관학 제도(官學制度)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조선 중엽 이후부터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상실한 채 그 기능을 서원에 넘겨주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서원은 그 지방 양반들의 권세를 조장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 고종 31년(1894) 향교의 모든 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향교의 대성전 안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쓴 공자의 신위(神位)를 중심으로 공문(孔門)의 사성(四聖)인 안자(顔子 : ?國復聖)·증자(曾子 : ?國宗聖)·자사(子思 : 沂國述聖)·맹자(孟子 : 鄒國亞聖)를 비롯 십철(十哲)과 칠십이현(七十二賢) 그리고 한당(漢唐) 이십오현(二十五賢)과 중국 송대(宋代) 6현(四賢)인 주자(周子 : 汝南伯)·정호(程顥:河南伯)·정이(程滯 : 伊川伯)·소강절(邵康節)·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 : 徽國公)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또 동쪽 앞에는 우리나라 유현 설총(薛聰)·안향(安珦)·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의 위패(位牌)가, 서쪽 앞에는 최치원(崔致遠)·정몽주(鄭夢周)·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堽?迪)·김인후(金麟厚)·성혼(成渾)·조헌(趙憲)·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頇?)의 위패가 순서에 따라 모셔져 있다. 이러한 문묘의 위패 배치를 그 규모에 따라 대설위(大設位)·중설위(中設位)·소설위(小設位)라 한다. 이 설위의 배열 형식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정에 의한 것이다.

문묘(대성전)에서 제향(祭享)하는 것을 '석전제(釋奠祭)'라 하는데, 원래 중국 당 나라에서 행한 '석전예전(釋奠禮典)'에 의거한 것으로 성균관에서는 연중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 가운데 달 맨 처음 드는 정일(丁日)에 행하고, 지방 향교에서는 봄과 가을 가운데 달 맨 처음 드는 정일 두 차례 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균관이나 향교 모두가 봄과 가을 두 번 행하여 왔다. 그런데 1949년 설위의 개정과 함께 석전제의 날짜와 횟수도 개정되었다. 그동안 봄과 가을 두 차례 행해왔던 것을 공자의 탄신일(誕辰日)인 음력 8월 27일을 양력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설위의 개정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어 그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각 향교마다 형편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제사를 드리는 시각도 원래는 밤 축시(丑時) 오각(五刻 : 밤 2시경)으로 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낮 정오 0시 15분에 시작한다.

원래 향교에서는 유생들에게 직접 유학을 교육하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민중을 상대로 유풍(儒風)을 불어넣어 사회적인 미풍양속을 고취하고 도의 생활을 앙양시키는 교화 사업도 함께 실시하였다. 예컨대 향음 주례(鄕飮酒禮)·향사례(鄕射禮)·양로례(養老禮)·계몽 강습회(啓蒙講習會)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 관청과의 유대를 가지면서 향당(鄕黨)의 미풍양속을 기르고 선(善)과 악(惡)을 행한 사람을 가려 상벌을 주는 민간 자치의 '향약(鄕約)'을 제정 실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행사들을 시행하지 않고, 매년 1회에 석전제만을 행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초·중 학생들에게 일요학교(日曜學校)를 설치 한자 교육(漢字敎育)과 전통 예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는 전교(典校) 1명, 장의(掌儀) 약간 명이 있으며, 유도회(儒道會)가 조직되어 있다. 옛날에는 유생의 교육비나 문묘의 향사 비용 향교를 운영하는 재정은 모두 국가에서 관리, 이에 대한 전토(田土)와 공과(公課)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경술국치(庚戌國恥)와 더불어 향교에 소속되어 있던 전통도 일제(日帝)의 관유(官有)로 되고 문묘의 향사 비용과 향교 운영비를 관에서 공급한다고 하였으나 이름뿐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 지방 유림들이 조직한 모성계(慕聖契) 등에 의해 성금을 각출하여 위토(位土)를 마련하고 거기서 얻은 수익으로 충당하고 모자라는 금액은 계원(契員)이나 유림들에 의해 보충된다. 해방 후에 유도회에서 마련된 '향교재산관리법(鄕校財産管理法)'에 의해 각 도마다 향교 재단(鄕校財團)의 법인체(法人體)가 구성됨으로써 이 재단에서 향교의 재산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현재 향교 내에는 유림들의 모임인 '유도회(儒道會)'가 조직되어 있다. 유도회는 8.15 해방 후 일제에 의해 맥이 끊긴 유교와 타락된 도의 교육의 부흥(復興)을 목적으로 전국 유림들에 의해 1946년에 조직되었다. 서울 성균관 내에 유도회의 본부를 두고 각 시도와 지방 향교에 유도회 지부를 두어 전국에 228개의 지부가 있었다. 이때 유도회의 조직 부서는 회장(會長) 1명, 부회장(副會長) 2명, 총무(總務), 재무(財務), 조직(組織), 경리(經理), 교화(敎化), 선전(宣傳), 청년부(靑年部), 부녀부(婦女部) 등으로 되어 있었으며, 각 부서에 부장(部長)과 차장(次長) 등이 있었다. 회원은 대부분 노인이다.

유도회에서 하는 일은 선성 현철에 대한 향사(享祀)를 돕고, 유교 교육을 발전시키며, 유풍을 선양(宣揚)하는 것이다. 선성 현철에 대한 향사는 대개 향교의 석전제(釋奠祭)와 삭망향례(朔望享禮), 그리고 서원(書院) 등에 모신 향유(鄕儒) 향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며, 때로는 그러한 향사의 재정적 보조를 하기도 한다. 유교 교육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강학 기구를 설치하고 회원을 널리 포섭 그들에게 유교 도덕을 교육시킨다는 것이다. 유풍 선양은 충(忠)·효(孝)·열(烈)·자선가(慈善家) 등 선행자(宣揚者)들을 선정 포창(褒彰)하고 장려(奬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에도 현재는 큰 실효(實效)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한편 유교의 강학 기구로 서원이 각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일어난 사학(私學)의 발전된 형태로 조선조에 들어와 숭유 정책(崇儒政策)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립학교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서원의 시초는 중국 당(唐) 나라 현종(顯宗) 때 세운 '집현전 서원(集賢殿書院)'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종(中宗) 37년(1542) 당시 풍기 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순흥(順興)에다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정주학(程朱學)의 한국 선구자 안향(安珦)을 봉안하면서 유생(儒生)들을 모아 정주학을 교육시킬 때 조정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은 것이다. 원래 서원은 서당(書堂)이나 서재(書齋) 안에 도학(道學 또는 儒學)의 진흥을 위해 헌신한 선현(先賢)을 봉사(奉祀)함으로써 선현의 가르침을 힘써 배우게 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서재와 서당의 장려를 위해 선현사(先賢祠) 또는 향현사(鄕賢祠) 등을 서당 가까운 곳에 설립하는 것을 권장하였던 것이나 뒷날 서당 안에 사원(祠院)을 함께 설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원은 학생들에게 유학을 강의할 수 있는 장소로서 강당과 선현(先賢 또는 鄕賢)을 봉사할 수 있는 사원이 동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서 이러한 의미의 서원에 노복(奴僕)과 전결(田結)을 주고 면세(免稅)와 원노(院奴)의 군역 면제의 특혜를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명문가나 부호들이 다투어 서원을 설립하므로 유생들은 향교를 버리고 서원으로 집결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이처럼 많은 서원의 발생은 유교의 발전에 보탬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요인이 되었다. 즉 서원은 유생들에게 학문을 전수하게 하는 전당이 되지 못하고 붕당(朋黨)을 조장하는 근거지가 되어 그 지방 양반 귀족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권세를 남용하는 온상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조(仁祖)와 효종(孝宗)은 서원의 남설(濫設)을 법으로 금하게 하였으며,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도 서원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고종(高宗)의 섭정을 맡은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은 서원의 남설을 막고 기존의 서원의 정비를 강력하게 시행, 당시 횡포를 일삼는 서원의 대표 격인 만동묘(萬東廟)를 폐쇄함과 동시에 전국에 기존의 650여 개의 서원 가운데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 만을 남기고 모두를 철폐케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이 실권된 뒤 그때 철폐된 서원이 대부분 복설(復設)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철폐된 서원의 복설과 때를 같이하여 오히려 새로 세워지는 서원의 수가 더욱 많이 늘어났다.

2. 한국 성리철학의 성립과 전개
(1) 중국 성리철학의 성립 배경
먼저 중국의 성리철학이 발생하게 된 동기(動機)와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漢) 나라로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의 유학은 경전(經典)의 해석과 훈고(訓考)를 위주로 하였으며, 학문과 사상의 자유로운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즉 한 나라의 무제(武帝) 이래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각 경전에 대한 훈고 내지는 주석(註釋)에만 전념하였을 뿐 독자적인 연구 활동은 전무(全無)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경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었지만 학문과 사회를 연결하는 사상의 활용적 측면은 침체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당 나라 초기 칙명(勅命)에 의해 공영달(孔潁達)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술(撰述)하고 경의(經義)를 통일시켰던 것과 같다. 그 결과 학자들이 경전을 연구하는 데는 편리하였지만 일률적으로 경의를 제약시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 당으로부터 북송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학계는 사상적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학을 불학(佛學)에 비교해 볼 때, 유학은 인습적이고 관학적(官學的)인 훈고학(訓?學) 일색이었던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유학의 연구를 떠나 유학보다 심오하다고 생각한 노장(老莊)이 아니면 불교의 문(門)에 출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에서는 불교가 성행하였다는 데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하겠다. 노장 사상(老莊思想)은 위 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이래 '현학화(玄學化)'하여 당 나라에 이르러 불교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에 비해 유교는 학술적인 면에서 이들 사상보다는 깊이가 없었고, 단지 일상적인 윤리(倫理) 도덕(道德)의 규범으로서 덕목(德目)만을 강조하는 '속학(俗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유가(儒家) 가운데 한유(韓愈, 退之)와 같은 유학자가 나와 원시 유학(原始儒學)의 내용이 중국 문명(文明)의 진정한 원천이라 강조되면서 이에 많은 사람들이 설득 불교와 노장 사상을 배척하였다. 한유의 문인 이고(李皐)는 《복성서(復性書)》 삼 편(三篇)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멸정복성(滅情復性)'의 사상을 가지고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역(周易)》과 《중용(中庸)》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처럼 한유와 이고의 유학에 관한 새로운 연구 경향은 그 동안 침체되었던 유학계에 활력소가 되었다.

한편 한 당 이래 절대적이라고까지 믿어왔던 유교의 경전에 대하여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그동안의 경전에 관한 훈고(訓考)나 주석에 대해 이의(異義)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당 나라 말기 이정조(李鼎祚)는 《주역집해(周易集解)》를, 담조(淡祖)는 《춘추예통(春秋例統)》을, 각각 저술하여 공영달의 《오경정의》의 해석을 비판하고 나섰다. 또 구양수(歐陽修)는 《춘추론(春秋論)》을 저술하여 종래의 《춘추》 삼전(三傳)을 비정(批正)하고, 《역동자문(易童子問)》을 저술하여 《주역》의 십익(十翼)을 공자의 저술이 아니라 주장하였다. 송 나라 초기 손명복(孫明復)은 담조의 설을 기본으로 하여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를 저술하여 그동안의 정의(正義)들과는 다른 일가견을 확립하였다. 이처럼 종래의 유학에 관한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는 송 나라 초기에 이르러 더욱 심화 북송의 성리철학이 성립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다.

송을 건국한 사람은 조광윤(趙匡胤) 태조(太祖, 960-976 재위)이다. 그는 후주(後周)의 무장(武將)으로 출발하여 뒤에 근위군(勤圍軍)의 대장(大將)에 임명되었다가 황제(皇帝)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제로 추대되자 국명(國名)을 송(宋)으로 바꾸고 당 나라의 문물을 계승코자 하였지만 심각한 국내외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코자 그는 먼저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판단 강력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는 사회 안정책의 하나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확립 관료를 채용하였던 것이다. 과거를 거쳐 등용된 관료들을 존숭(尊崇)하고 그들의 창의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스스로 취할 수 있도록 격려했으며, 그들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잘못에 대한 충고를 구하고, 이에 귀를 기울여 듣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료들은 유교의 경전에서 익힌 바 통치의 원리들을 정치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절호의 기회란 무엇보다도 불교와 노장 사상에서 오랫동안 중국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아왔던 물음 즉 '진정(眞正)한 자아(自我)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우주(宇宙) 자연의 질서와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에 일격을 가하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일련의 발견에 의해 누적된 지적 흥분이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철학적으로 내세적(來世的)인 불교와 탈속적(脫俗的)인 노장 사상을 배격하고 사람에게 활기 있는 삶을 제공하는 긍정적인 '유교적 진리(儒敎的眞理)'와 인간의 완성은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낙관론(樂觀論)'과 모든 사람은 그러한 완성을 구현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유학자들은 순자(荀子)의 실제적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버리고 당 나라 말기 한유(韓愈)처럼 고대의 성군(聖君)과 공자의 순수한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마지막으로 계승한 맹자(孟子)의 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정치사상의 원천이라 볼 수 있는 《주례(周禮)》와 《주역》 그리고 우주론적이고 상수론적(象數論的)인 한대(漢代)의 《주역》에 관한 주석서(註釋書)와 《예기(禮記)》 가운데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대학(大學)》·《중용(中庸)》이 유학 연구의 주요 교과서(敎科書)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리철학이 대두 점차로 무르익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이란 불가(佛家)에서 설파(說破)하는 환영(幻影)이 아니라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재이며, 노장 사상은 먼저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판단 강력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는 사회 안정책의 하나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확립 관료를 채용하였던 것이다. 과거를 거쳐 등용된 관료들을 존숭(尊崇)하고 그들의 창의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스스로 취할 수 있도록 격려했으며, 그들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잘못에 대한 충고를 구하고, 이에 귀를 기울여 듣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료들은 유교의 경전에서 익힌 바 통치의 원리들을 정치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절호의 기회란 무엇보다도 불교와 노장 사상에서 오랫동안 중국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아왔던 물음 즉 '진정(眞正)한 자아(自我)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우주(宇宙) 자연의 질서와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에 일격을 가하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일련의 발견에 의해 누적된 지적 흥분이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철학적으로 내세적(來世的)인 불교와 탈속적(脫俗的)인 노장 사상을 배격하고 사람에게 활기 있는 삶을 제공하는 긍정적인 '유교적 진리(儒敎的眞理)'와 인간의 완성은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낙관론(樂觀論)'과 모든 사람은 그러한 완성을 구현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유학자들은 순자(荀子)의 실제적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버리고 당 나라 말기 한유(韓愈)처럼 고대의 성군(聖君)과 공자의 순수한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마지막으로 계승한 맹자(孟子)의 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정치사상의 원천이라 볼 수 있는 《주례(周禮)》와 《주역》 그리고 우주론적이고 상수론적(象數論的)인 한대(漢代)의 《주역》에 관한 주석서(註釋書)와 《예기(禮記)》 가운데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대학(大學)》·《중용(中庸)》이 유학 연구의 주요 교과서(敎科書)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리철학이 대두 점차로 무르익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이란 불가(佛家)에서 설파(說破)하는 환영(幻影)이 아니라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재이며, 노장 사상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초탈(超脫)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에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누구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의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불교와 노장 사상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즉 그들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불교의 약속과 육체의 불멸(不滅)이라는 노장 사상의 약속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 사회의 개혁과 인생에서의 각 개인의 자기 수양에 대해 크게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과거(科擧)를 거쳐 관료로 등용된 유학자들은 불교적 특성을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로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인 '가문(家門)'을 다시 일으키고 국가에 있어서 사회 복지에 대한 행동주의적인 의지를 강력하게 재흥(再興)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송 나라 초기 개혁자의 한 사람이었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진정한 유학자는 먼저 세상의 근심거리에 대해 근심하여야 하고 뒤에 세상의 즐거움을 즐겨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정신(菩薩精神)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호소에 대해 유학이 좋은 맛 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대가족과 종족(種族, 宗族) 안에서 상호 책임
의 발전적 형태를 선구적으로 제창하였다. 이것이 곧 '향약(鄕約)'의 실시라는 것이다. 향약은 교육·문화·사회·경제면에서 자체적 개발을 이루고 자치적 규율에 의해 자발적으로 행하려는 사람들의 약속이다. 이것은 과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 백성과 사회의 요구를 정치에 구현코자 한 유학자들의 노력에서 비롯되었으며, 성리철학 발생의 배경이다.

중국의 성리철학은 11세기 중국의 여러 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우주론(宇宙論)에 근거한다. 그들이 제기한 우주론은 대개 불교와 신도가(新道家)의 형이상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원시 유가 경전(經典)의 하나인 《주역(周易)》과 이 《주역》에 대한 한 나라 때의 주석서(註釋書)에 나타난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0세기 경 은둔적(隱遁的) 도학자(道學者)였던 진단(陳?)이 만든 불교의 밀교적(密敎的)인 우주에 관한 도식(圖式)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단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름의 우주론을 전개한 유학자로서는 주렴계(周濂溪, 名 惇滯, 1017-1073)·소강절(邵康節, 名 雍, 1011-1077)·장횡거(張橫渠, 名 載, 1020-1077)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주역》을 철저히 연구하였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북송 초기 넓은 의미의 성리철학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학자들이다. 이들은 종래의 유학에서 강조되었던 당위적(當爲的)인 덕목(德目)으로부터 '소이연(所以然, 까닭 이유)'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고, '소당연(所當然)'과의 관계를 밝히려 하였다. 이때 성리철학의 논리적 구조는 소당연의 '당위성(當爲性)'과 소이연의 '원리(原理)' 내지는 소능연(所能然)의 '가능성(可能性)'의 상호 관계를 규명하여 논리적 보편성과 타당성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주렴계는 호남 성(湖南省) 출신으로 남부 지방에서 낮은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으며, 소강절은 지금의 북경(北京) 출신으로 생애의 대부분을 낙양(洛陽)에서 사숙(私塾)의 선생으로 보냈다. 장횡거는 당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 조정으로부터 축출되어 고향 섬서 성(晙西省)에 머물면서 후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성리철학은 개봉(開封)과 낙양에서 생애를 보낸 하북 성(河北省) 출신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이천(伊川, 1033-1077) 형제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들 형제는 주렴계의 제자이자 소강절의 친구이자 또 장횡거의 조카로서 원시 유학(原始儒學)의 도덕적 가르침과 《주역》의 우주론을 조화시키면서 불교와 노장 사상도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정이천의 성리철학은 남송의 주자에게 전승(傳承)되어 '이학(理學)'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체계화를 이루었으며, 정명도의 성리철학은 주자와 우위(優位)를 다투었던 육상산(陸象山)에 전승되어 '심학(心學)'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였다. 여기서 '이학'과 '심학'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학'을 '정주학(程朱學, 朱子學)'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좁은 의미의 성리철학이라 부른다. 그리고 '심학'은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더욱 심화하였는데 이를 '육왕학(陸王學, 陽明學)이라 부른다.

(2) 한국 성리철학의 성립 배경
오늘날 한국 철학계에서는 한국 성리철학의 성립을 고려 충렬왕(忠烈王) 15년(1289) 안향(安珦)에 의해 중국 원(元) 나라로부터 도입(導入)된 '주자학(朱子學)'으로부터 라 보고 있다. 그러나 주자학이 좁은 의미에 있어서 성리철학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으나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성리철학이라 하면 그 범주 안에 '심학(心學)'·'이학(理學)'·'정주학(程朱學)'·'양명학(陽明學)' 등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성리철학이라 말할 때는 중국 당(唐) 나라 말기(末期)와 송(宋) 초기(初期) 사이에 발생하여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朱子)를 거쳐 명대(明代) 왕양명(王陽明)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던 신유학(新儒學)을 총칭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 고려 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이라는 종합국립대학이 있었다. 문종 때에는 유학자들이 오늘날의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사숙(私塾)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다.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추앙되는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와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등 12 공도가 있었고, 문헌공도에 9재(九齋)가 있어 그 규모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구려 시대 경당이 발전하여 인물을 중심으로 규모가 확장된 것이라 보겠다. 이곳에서는 유교의 경전과 사서(史書)의 학습, 그리고 인륜 도덕을 앙양하는 것이 목표이었다. 충렬왕 때 원(元) 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그곳에 나돌던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보고 그것을 손수 베껴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최초로 주자학(朱子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것이다. 안향은 주자학을 고려에 도입하고 당시 불교의 성행으로 쇠퇴한 유교를 부흥시킬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안향에 의해 고려에 도입되었다는 주자학은 당 말기부터 시작하여 북송(北宋)을 거처 남송(南宋)의 주희가 집대성(集大成)하였다는 좁은 의미의 성리철학에 속한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의 성리철학이 이미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넓은 의미의 성리철학이 우리나라에 이미 오래전에 유입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상황에서 좁은 의미의 성리철학-주자학이 안향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안향의 저서(著書)인 《회헌실기(晦軒實記)》 〈논국자제생문(論國子諸生文)〉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중국(元)에서 주회암(朱晦庵)의 저술을 보았는데 주회암은 성인(聖人, 공자)의 도(道)를 밝혀내고 선불(禪佛)의 학(學)을 배척(排斥)하여 그 공이 공자에 짝할 만 것이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도입하여 자신의 문하생(門下生)들에게 전수(傳受)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문헌에 나타난 사람으로는 백이정(白滯正)·신천(辛甸, ?-1339)·권부(權?, 1262-1346)·우탁(禹倬, 1263-1342) 등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의 성리철학 형성 초기의 유학자들이다. 백이정은 원나라에 10여 년 동안 있으면서 정주(程朱)의 성리서(性理書)를 모아 가지고 귀국하여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권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편집 간행 널리 전포(傳布)시켰으며, 신천은 일찍이 구재(九齋)에 들어가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우탁은 유교의 경전과 사서(史書)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정이천의 《역전(易傳)》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졌을 때 누구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가 한달 남짓 연구 해독하였다고 한다.

그 뒤 백이정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박충좌(朴衷佐, 1287-1349) 등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주자학이 연구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현은 충렬왕 31년(1305) 원나라 서울 연경(燕京)에 들어가 그곳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면서 당시 원나라 주자학자로 널리 알려진 요수(姚杻,1239-1314)와 염복(閻復) 등과 교류하면서 주자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귀국하여 주자학을 전적으로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문하생들에게 전수시켰다. 그는 당시 고려 사회 유학의 연구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불행히도 의종(毅宗) 말년(末年) 무인(武人, 鄭仲夫)의 난(亂)이 일어나 옥석(玉石)의 가림이 없이 유학자(儒學者)들을 모두 죽였다. 이를 모면(謀免)하려는 유학자들은 산속으로 숨어 관복(官服)을 벗고 승려(僧侶)로 여생(餘生)을 마쳤다. 신준(神駿)과 오생(悟生)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 뒤 조정(朝廷)에서 문치(文治)를 좀 베풀게 되자 (남은) 선비들이 (유학을) 비록 배우고자 하였지만 배울만 한 학자가 없어 부득이 산속에 숨어 승려가 된 사람들을 찾아가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임금께서는 학교(學校)를 널리 세워 육예(六藝)를 드높이고 오교(五敎)를 밝혀 선왕(先王)의 도(道)를 천명(闡明)한다면 누가 진유(眞儒)를 등지고 승려를 다를 것이며, 실학(實學)을 버리고 장구(章句)를 익히겠는가. 앞으로 사장(詞章)만을 일삼는 무리들이 경전(經典)을 밝히고 행실(行實)을 닦는 선비가 될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시와 문장을 짓기 위해 유학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전의 내용을 밝히고 행실을 닦는 '실학' 즉 '주자학'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구나 사장이란 외형적이거나 외식적(外飾的)인데 대해 육예나 오교는 주자학의 '예(禮)'에 관한 사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주자학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수적으로 해야 할 학문이라는 점에서 그는 주자학을 '실학'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을, 그때까지 유학에 관한 연구 태도를 이제부터는 주자학을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학풍 전환을 역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현은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주역》의 '경(敬)으로서 내면(內面, 內心)을 바르게 한다.(敬以直內)'는 내용을 근간(根幹)으로 하여 '경(敬)에 의해 덕(德)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과장(誇張, 浮誇)함을 버리고 독실(篤實)할 것에 힘쓰며, 옛 도(道)를 좋아하여 백성들을 새롭게 할 이치(理致)를 탐구할 것이며, 게으름 없이 행하되 속(빠르게)히 이루고자 하는 태도를 경계(警戒)할 것이며, 마음으로 얻은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주자학의 '지경독실(持敬篤實)의 수덕(修德)과 신민지리(新民之理)의 실천'이라는 내용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의 주자학은 이제현으로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틀림은 아닐 것이다. 그 뒤 이 이제현의 문하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父子)를 비롯하여 많은 주자학자들이 배출된다. 그 가운데 특히 손꼽을 수 있는 학자들로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정도전(鄭道傳) 등이 있다. 이들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걸쳐 활동한 주자학자들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연구와 전파를 천직으로 삼았으며, 한국 유학을 주자학으로 대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자학 연구 기반을 공고하게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다. 이에 관해서는 권근이 찬술 한 〈목은 행장(牧隱行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신축년(辛丑年) 병란(兵亂) 이후 학교가 폐허(廢墟)되자 임금께서 이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여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성균관(成均館)을 개창(開創)하였다. 가르치는 강사(講師)가 또한 적어 당대에 경전(經典)에 능통한 선비들을 동원(動員)하게 되었는데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오천(烏川) 정몽주·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경산(京山) 이숭인 등으로 모두 다른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학교의 관료를 겸한 사람들이다. 공(公 , 이색)은 이들 가운데 으뜸인지라 대사성(大司成)을 겸하였는데 대사성을 겸직으로 하는 일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신년(戊申年) 봄 사방(四方)으로부터 학생들이 모여들자 제공(諸公)들께서 경전을 나누어 맡아 가르쳤다. 제공들께서는 강론(講論)을 마치면 (반드시) 의문점을 토론하였는데 마칠 무렵에는 제각기 (의견이) 극도로 대립되었다. 공께서는 즐거운 가운데에서 판명(判明)하게 해석을 하여 절충(折衷)하시되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합치토록 힘썼으며, 밤이 되어도 권태로워할 줄을 모르셨다.

이로써 동방(東方, 한국)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으니 유학자들은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의 옛 습관을 버리고 몸(身)과 마음(心)과 성(性)과 명(命)의 이치를 궁구하여 공리(功利)를 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유학의 연구 풍토가 완연하게 일신하게 되었음은 다 공의 가르침의 힘이라 할 것이다. 여말(麗末)에 이르러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기강(紀綱)이 문란해지면서 경제가 날로 피폐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고려의 조정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이에 당시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사람들과 현실에 입각하여 혁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내 이성계(李成桂)가 혁명(革命)을 시도하려 하자 이에 찬성하는 학자들과 반대하는 학자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찬성하는 학자들은 중국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주왕(紂王)을 정벌(征伐)하고 천명(天命)에 의한 혁명을 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나 반대하는 학자들은 그와 같은 행위는 신하가 임금이 된 것이니 이는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어기는 패역(悖逆)이자 불의(不義)라 하였다. 흔히 전자를 '천명론(天命論, 또는 혁명파)'이라 하고, 후자를 '강상론(綱常論, 또는 의리파)이라 부른다.

이때 혁명론자로서는 정도전·권근·변계량(卞季良) 등이고, 강상론자로서는 정몽주·길재(吉再) 등이다. 아무튼 천명론과 강상론의 대립은 정몽주의 피살로 일단락되면서 이성계의 혁명에 의한 조선의 개국은 기정 사실화하였다. 마침내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개국되었다. 그런데 이때 천명론을 주장하였던 학자들을 마치 주자학자(성리학자)가 아닌 것처럼 인식되었고, 강상론을 주장하던 학자들만이 정통 주자학자(正統朱子學者)로 취급하였다. 이 두 계파는 실제로 주자학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3) 한국 성리철학의 전개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유학(儒學)이 국학(國學)으로서 인정되면서 그동안 고려조에서 국교로 신봉되던 불교로 말미암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였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내부에서의 혁명론과 강상론을 가지고 대립적이었던 상황을 탈피하여 유학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성리철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대표적인 유학자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과 양촌(陽村) 권근(權近)이다.

정도전은 불교와 도교를 비판 유학의 본령을 확립하였는데, 그는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글을 썼다. 즉 불교는 심(心, 마음)을 주로 하여 무념(無念)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다(無所不爲)고 하였으며, 도교는 기(氣, 기운)를 위주로 하여 생(生)을 기르려는(養) 도(道)로 삼아함이 없고자(無所爲)하니 이 두 사상은 고고적멸(枯槁寂滅)이 아니면 방사종자(放肆縱恣)에 흘러 도의(道義)를 해침은 마찬가지라 하였다. 그리고 유교는 이(理)를 주로 하여 마음과 기운을 다스려 온갖 선(善)이 갖추어 있으니 경외성찰(敬畏省察)하여 넓힐 것은 넓히고 막을 것은 막으려는 것이 장점이라 하였다. 권근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이라는 책을 써 유학의 기본적인 이론을 그림으로 그려 해석, 사단(四端)은 이(理)의 근원인 성(性)이 발한 것이어서 순선(純善)만 있고 악(惡)은 없는 것이요, 칠정(七情)은 기(氣)의 근원인 심(心)이 발한 것이어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권근의 주장은 뒷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전개의 선구가 되었다.

그런데 태조(太祖)로부터 세조(世祖)에 이르는 동안 조선조 개국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던 유학자들과 참여하지 않았던 유학자들의 학을 계승한 유학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은 대립이 계속 되더니 마침내 세조 연간에 이르러 세조를 중심으로 하는 훈구 세력(勳舊勢力)과 재야(在野) 유학자와의 사이에 극한적인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수양대군(뒤에 세조)이 자기의 조카 단종(端宗)을 임금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에 대한 정치적 정통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로부터 이어져오는 의리 정신(義理精神)의 발로에서라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세조의 왕위 찬탈(王位簒奪)에 반대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들은 정몽주 계통을 이은 직접적인 유학자들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들이 보여주었던 의리 정신과 정의 사상(正義思想)이란 정몽주의 성리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성리철학의 의리 정신과 정의 사상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한 계파(系派)로 취급하여 '절의파(節義派)'라 부른다. 한편 이때 절의파와는 달리 정치적인 집권 세력으로 등장한 사람들을 통칭하여 '훈구파(勳舊派)'라 부른다. 그런데 당시 정치적 집권 세력으로 등장한 훈구파 출신 관료들은 창조적 정신으로 국가의 정사(政事)를 도모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안일무사(安逸無事)와 타성(惰性) 속에 젖어 국정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훈구파 세력은 점점 정치적 지도력을 잃게 되었으며, 새로이 등장하는 '사림파(士林派)'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사림파란 정몽주의 성리철학 연구의 학풍을 계승한 유학자들을 총칭한 것이다. 즉 이들은 조선조가 개국된 이래 정치 및 사회의 일선에서 물러나 향리(鄕里)에 은거한 채 정몽주의 학맥을 이어 성리철학의 연구에만 전념한 유학자들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사림파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항상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불의(不義)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힘이 강하였다. 특히 이들은 사회 정의에 민감하였다. 이들은 향리의 산림에 은거하면서 성리철학의 연구에 전념하다 세종대(世宗代)에 이르러 정계(政界)에 다시 진출하였으며, 당시 훈구파의 불의에 대하여 비판 항거하다 한 때 정치 참여를 거부한 바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당시 국가의 현실을 도외시하였거나 맹목적으로 참여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15세기말에 이르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첨예화(尖銳化) 한다. 마침내 집권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비판 세력인 사림파에 대한 탄압이 시작 큰 사화(士禍)가 계속 일어나게 되었는데 마침내 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성리철학의 도통상승(道通相承)의 맥을 논의할 때에는 반드시 포은 정몽주를 그 조종(祖宗)으로 하여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점필재(焰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로 이어진다. 이것은 성리철학의 의리 정신(義理精神)만을 강조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김종직과 김굉필 등은 학술에 있어서보다 특히 성의율신(誠意律身)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였고, 이들의 정신을 계승한 조광조는 신진기예(新進氣銳)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도의적(道義的)인 국가 이념을 강력히 실현하기 위해 개혁에 과감하였다. 그는 특히 시문(詩文)을 위주로 하는 학적 태도를 배격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선봉으로서 인물 본위로  젊은 유학자들을 관료로 기용토록 하였다. 그리고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부패한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기에 힘썼다. 이와 같은 소장파의 급진 사상은 구정치인(舊政治人)들의 반목과 질투를 받아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관계를 지어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의 유학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오로지 정의 사상으로만 그 정통성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연산조(燕山朝)로부터 중종조(中宗朝)에 들어와 빚어진 4대 사화(四大士禍)라는 비극(悲劇)에서 엿볼 수 있다. 무오사화(戊午士禍:1498)와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는 당시 재야 성리철학적 유학자(사림파)들이 조정의 훈구 세력에 대한 저항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와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역시 패도(覇道)를 천시하고 정의(正義)를 받들며, 권세와 사욕을 물리치고자 하는 사림파 학자들의 전통적인 정의 사상을 구현하고자 한 데에서이다. 이때 화를 입지 않은 유학자와 화를 입은 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 유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향리의 산림에 은거하여 가업(家業)에 종사하면서 성리철학의 연구와 자신들로부터 성리철학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문인들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는데, 이들을 '도학파(道學派)'라 부른다. 도학(道學)이란 원래 주자(朱子)의 성리철학을 지칭한 말이다. 즉 정이천(程伊川)과 주자가 주장한 바 있는 성즉리설(性卽理說)에 입각하여 전개되는 새로운 유학을 도학이라 말한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이지만 도학파 이전의 유학자들(특히 사림파)은 항상 모든 것에 대하여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고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하는 급진적인 행동과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도학파는 사림파들처럼 비판적 의식이나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다거나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하는 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 정치에 대하여 직접적인 비판이나 급진적이거나 과격한 행동과 사고보다 소극적인 채 향리에 머물면서 '내성외왕지도(內聖外王之道)'를 드러내고,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자신을 찾는 문인들에게 자신들의 학문을 교육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도학 파의 발생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주자의 성리철학에 관한 연구의 시작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던 한국의 성리철학의 초창기의 학풍은 주자의 성리철학의 이념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지만, 그 내용의 면에 있어서는 주자의 성리철학과 차이가 있다. 원래 주자의 성리철학은 유학의 근본 정신 즉 성현(聖賢)들의 도(道)를 밝히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주자의 성리철학은 '수신 제가(修身齊家)'라는 요체를 통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현실 사회에 구현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리철학자들이란 한결같이 스스로를 강의 정직(剛毅正直)하고자 하며, 성현의 도를 지키고, 또 사(事)와 물(物)의 이치(道, 또는 眞理)를 밝혀 그 이치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한 사람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주자의 성리철학을 '도학(道學)' 또는 '이학(理學)'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주자의 성리철학 즉 도학(또는 이학)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정암 조광조이다. 조광조의 뒤를 이어 경기도 개성에서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영남의 동쪽에서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영남의 북쪽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10-1570)이, 영남의 남쪽에는 남명(南溟) 조식(曹植, 1501-1572)이, 호남의 북쪽에서는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이, 호남의 남쪽에서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서울에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경기도에서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이 각각 자기의 문인들과 함께 자기 나름대로의 도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개 향리에 은거하면서 과거(科擧)나 관직에 관계없이 때에 따라 자기를 찾아오는 문인들(제자)과 더불어 유학(儒學)을 담론하고 농경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항상 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 설령 이들은 관직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이기적인 사리사욕을 뛰어넘어 진퇴지의(進退之義)를 분명하게 하였다. 이러한 도학자들의 도학정신(선비정신)은 뒤에 오는 많은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그들의 행동 규범이 되었다.

마침내 이와 같은 도학자들의 연구는 주자의 성리철학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성리철학이 다름 아닌 '한국의 성리철학'이다. 당시 서경덕을 비롯하여 이언적·이항·이황·조식·김인후·기대승·이이·성혼 등은 고려 말기로부터 시작된 성리철학적 전통의 맥을 계승하여 주자의 성리철학을 수용, 한국의 성리철학을 이룩하였다. 주자의 성리철학이 중국 북송(北宋) 유학자들의 성리철학과 그 이전의 유학을 '성즉리설(性卽理說)'을 기본으로 하여 '본체론(本體論)'·'이기론(理氣論)'·'심성론(心性論)'·'수양론(修養論)'으로 통일 집대성한 것이라면, 한국의 성리철학은 '이(理)'와 '기(氣)'의 두 개념(槪念)으로 통일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16세기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도학자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의 성리철학은 '이기병발설(理氣竝發說)'·'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丠?途說)' 등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이 논의되더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학자들에 의해 그 연구가 심화되면서 '주리설(主理說)'과 '주기설(主氣說)'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주리설과 주기설의 대두는 마침내 한국의 성리철학계를 '영남(嶺南)'과 '기호(畿湖)'로 양분하기에 이르렀다. 즉 주리설을 주장하는 유학들은 이황을 그 영수(領袖)로 삼아 '영남학파'를, 주기설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은 이이를 그 영수로 삼아 '기호학파'를 각각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중국 주자학적 성리철학의 내용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한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하였지만 그 연구의 결과는 일종의 파당적 분쟁(派黨的分爭)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일부의 도학자들은 도학의 내면적인 것보다는 외면적인 실천에 관하여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도학의 외면적인 실천에 관하여 연구하는 도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의 연구 결과를 '예론(禮論)'이라 부른다. 조선조 17세기의 도학자들은 모든 실천 행동들의 세목이 '예(禮)'에 집약(集約)된다고 보고, '예'란 윤리 도덕 사상의 중핵(中核)이라 하였다. 이러한 '예'에 의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적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개인의 잡다한 일상생활로부터 한 국가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행동도 '예'에 어긋나고서는 행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예'를 철저하게 지키려고 한 데에는 물론 외적으로 시대적 사회적인 요인도 있었다. 그것은 임진·정유(壬辰·丁酉)의 왜란과 병자·정묘(丙子·丁卯)의 호란에서 빚어진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의 상혼(傷痕)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의 추구에서이다.

이처럼 '예'를 절대시하게 되었던 내적 요인은 도학파의 '심성론(心性論)'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16세기 초 도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던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이 그 시발이라 하겠으나 그보다 17세기에 들어와 제기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湖洛論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논쟁은 모두 '예'가 드러나게 되는 근원으로서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었다. 사칠이기론쟁에서는 사람들이 행동을 함에 밖으로 드러나는 예란 사람의 '이', 즉 정주가 말한 바 있는 '성즉리'가 스스로 발하여 이루어진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다. 인물성동이 논쟁이란 예로 드러나는 본성의 이(五常之理 ; 仁 義 禮 智 信)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인가를 밝히려는 논쟁이다. 이 두 논쟁이 예론성립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이 인물성동이 논쟁은 한국 성리철학계에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을 낳게 하였으며, '유기학파(唯氣學派)'와 '유리학파(唯理學派)'가 대두하게 되었다.

원래 '예'란 <<예기(禮記)>>를 보면 '이(理之不可易者)' 또는 '마땅히 행하여야 할 법칙(所當然之則)', 또는 '선으로서의 덕목(善以德目)' 등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예의 의미상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행동에 있어서 당연시되는 '명분(名分)'을 근간으로 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한 '예'는 형식주의적 성향이 짙다. 이 형식주의적 성향 때문에 도학의 예론을 중시하던 도학자들은 '예'를 철저히 추구하면 할수록 비실제적 사고를 유발하게 되었던 것이며, 비생산적인 공리공담(空理空談)의 경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와 경향이 예론을 중시하던 도학자들에게 더욱 심화되면서 오히려 인간성의 원활한 사회적 구현을 저해하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만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것은 당시 왕실의 종통 계승 문제를 가지고 파당을 지어 논쟁만 일삼았던 '예송(禮訟)'의 내용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도학에 기초한 '예'에 대한 사상만은 고도로 세련된 합리적 근거를 가진다. '예'를 중시하던 도학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허식적인 예의만을 밝히는데 집착하였던 관계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번문욕례(繁文縟禮)가 극심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라는 신분을 우의로 하여 추앙하고, 농 공 상업을 소홀히 한 채 반상(班常)의 차별 속에서 상인(常人)은 양반(兩班)의 소유물이 되고, 유학의 교육도 오직 양반들만의 독점물처럼 되었다. 마침내 한국의 성리 철학적 도학은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학을 연구하고 몸소 실천하려는 진유(眞儒)가 아닌 가짜 선비와 양반의 체모나 체면만을 갖추기 위한 가짜 유림들이 난무하였다. 이처럼 '예'의 절대화 풍조가 낳은 폐단을 지향하기 위해 도학의 예론에 대응하여 또 다른 새로운 학설이 형성되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실학(實學)'이다. '실학'을 주장하는 도학자들은 '이용후생(利用厚生)·경세치용(經世致用)·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기치를 내세웠다. 조선말기의 성리철학은 도학과 실학의 대조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한 시대의 성리철학 안에 두 학설이 대조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곧 성리철학의 시대적 사회적 갈등이 그만큼 크고 심각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성리 철학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편 또 하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학의 대두가 성리철학적 도학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나 반항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꾸어 말해서 실학의 발생은 당시 시대적 사회적 요청에 의한 자
연 발생적인 것으로 예론의 병폐를 지양하려는 데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이다.

실학은 예론의 말폐에서 비롯되었던 공리(空理)의 학(學)이 아닌 '실리(實利)의 학(學)'을, 무용(無用)의 학문이 아니고 '실용(實用)의 학문(學問)'을 내세워 이용후생·경세치용·실사구시에 중점을 두어 성리철학을 연구하였다. 물론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실학의 발생 연원은 멀리 고려 말기까지 소급하여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바 실학이란, 앞에서 언급한 바 임진·정유왜란(壬辰·丁酉倭亂)과 병자·정묘호란(丙子·丁卯胡亂)이 그 발단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학은 율곡 이이의 성리철학적 도학을 계승한 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들 실학의 발생과 때를 같이하여 서구의 과학·문물·제도가 조선에 유입함에 따라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실학을 주장하던 학자들은 산업·경제·지리(地理)·언어(言語) 등 다양한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성리철학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특히 이들 학자들은 당시 관권신성(官權神性)과 관주민권사상(官主民權思想)을 부정하고 민주 민본(民主民本)을 주장한 것이 특색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마침내 시민 사회 운동을 발생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민 사회 운동은 관권주의(官權主義)가 아닌 민주 민본 사상(民主民本思想)에 입각한 시민 사회화의 운동으로 조선조 왕권 중심 사회에서 시민 주권 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오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이 운동이 조선 역사의 근대적 성격을 가지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안정과 민중의 권리를 내세운 데에 있다. 즉 이들이 경제학의 연구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민중의 살림살이를 안정시켜 그들의 삶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국가와 겨레가 존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에 근대적 성격을 가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실학과 달리 도학의 정신을 이어오던 몇몇 유학자들에 의해 서구 사상의 도입에 따른 우리 고유의 전통 부식(腐蝕)을 이유로 들어 국권(國權) 수호적 차원에서 '척사·척화사상(斥邪斥和思想)'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내부적으로는 안동 김 씨(安東金氏)와 풍양 조 씨(豊陽趙氏) 등의 외척(外戚)에 의한 변태적 세도 정치가 자행되는가 하면,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민생이 도탄에 빠져 홍경래(洪景來)의 난(1811)과 진주민란(晋州民亂, 1862) 등의 크고 작은 민란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고, 유민(流民)의 현상까지 나타났다. 또 외적으로는 병자수호 조약(丙子修護條約, 1876)의 체결에 의한 문호를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성리철학적 도학자들은 당시의 국내외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시 현실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이에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의 안목에서 보았을 때 당시의 포기 의식을 자아내는 시대적 충격이란 다름 아닌 외세의 침략이었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특히 대외적인 외세의 침략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관하여 당시 척사(斥邪)를 주장하는 유학자들의 지도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 1792-1868)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잘 나타나있다.

서양(西洋)의 모든 이론 전말(顚末)을 살펴보니 그들은 태양(太陽)이 만물의 근본 바탕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형상이 있는 것을 받들면서 그것이 천지를 만들어낸 것으로 안다. ?역한 것을 좋아하고 이를 기쁘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람의 윤리를 끊어 버리고, 예절을 떨쳐 버리는 것이 모두 여기에 근본을 두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척사를 주장하던 유학자들은 장차 몰아닥칠 서구의 화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대응책으로 '서학(西學, 천주교)의 금단(禁斷)'과 '서양 물건의 사용 근절(根絶)'과 동시에 '무비대전(武備對戰)'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가운데 무비대전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적극적인 대응책이었다. 즉 이항노의 '양적(洋敵)과 싸워야 한다는 사람은 우리나라 편에 서있는 것이고, 양이(洋夷)와 화친(和親)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양이의 편에 서있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마침내 그들은 성리철학적 도학의 입장에서 '척사 척화'를 주장 서학을 배척하고 개항(開港)과 개화를 반대하던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쇄국정책의 옹호는 자연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행동의 면에서까지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뜨거운 열정과 우국충정을 가지고 당시의 현실과 시대 상황을 진단하여 그것에 적절하게 대처하였다. 즉 그들은 서구의 문명은 거부하되 과학적인 기술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내용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펼친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척양(斥洋) 척왜(斥倭)의 사상은 구한말(舊韓末) 일제(日帝)의 강점 이후까지 이어진다.

성리철학의 도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척사와 실학의 두 조류는 구한말에 이르러 현실과 사회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지 못하여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않은 채 일제에 의해 그 연구의 맥이 끊기고 만다.

3. 한국 성리철학의 이기론적 특성
(1) 본체론
1) 태극의 의미
성리철학에 있어서 '본체론(本體論)'이란, 우주 만물의 시원(始原)을 밝혀 보고자 하는 것이다. 즉 우주 만물이 나타나게 되는 본체(本體)가 무엇인가를 밝혀 보려는 것이 본체론이다. 선진(先秦)의 원시 유학(原始儒學)에서는 우주 만물의 본체를 '도(道)'로 보았다. 그 뒤 한대(漢代)에 들어와 유안(劉安)에 의해 이 본체 '도'를 '대(大)'·'태일(太一)'·'태극(太極)'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동중서(董仲舒)는 도를 '하늘(천)'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천지 만물의 본체를 '하늘(天)'로 보았다. 또 양웅(楊雄)은 천지 만물의 본체를 '현(玄)'이라 하였고, 왕충(王充)은 '기(氣)'라 하였다. 이처럼 한대의 유학자들은 선진 원시 유학에서 우주 만물의 본체를 '도'라 말한 것에 대하여 '대'·'태일'·'태극'·'하늘'·'현'·'기' 등 여러 가지로 말하였다. 그 뒤 당(唐)나라 말기 이고(李皐)에 이르러 천지 만물이란 '일원론(一元論)'을 주장 '일원기(一元氣)'를 천지 만물의 본체로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종합한 중국 북송대 주렴계(周濂溪)는 '무극이면서 태극한 것(無極而太極)'을 천지 만물의 본체로 보았다. 참고로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렴계의 이와 같은 본체관을 이어받은 장횡거(張橫渠)는 '태허일기(太虛一氣)'를 천지 만물의 본체라 하였는데, 주렴계와 장횡거의 본체관을 이어받은 정명도(程明道)는 '건원일기(乾元一氣)'를 정이천(程伊川)은 '이(理)'와 '기(氣)'를 천지만물의 본체로 각각 보았다. 그 뒤 정이천의 사상을 이어 받은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에 이르러 '태극(太極)'을 천지 만물의 본체로 보게 되었다. 따라서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철학에서는 천지 만물의 본체를 '태극'이라 한다. 이로부터 중국의 성리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태극'이 천지 만물의 본체라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하여 자신들의 성리철학을 전개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태극'이란 말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유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이다. 이 〈계사전〉의 내용을 보면, '역유태극시생양의(易有太極是生兩儀) 양의생사상(兩儀生四象) 사상생팔괘(四象生八卦)...'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는 《주역》의 내용인 64괘가 태극이라는 것으로부터 변환되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문구를 후세의 유학자들은 천지 만물의 근원자 즉 본체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학자들은 '태극'이
란 말을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그 의미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어 한 유학자가 사용하고 있는 것도 문장의 전체 내용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의 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태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나타내는 것인지)를 파악하기란 극히 어렵다.

우리 한국의 철학사에서 보면, '태극'이란 말을 처음으로 철학에 사용한 유학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다. 그는 현상계의 만물이란 '태극(太極)'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최치원의 철학 역시 《주역》의 연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주역》에 대한 연구는 삼국 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최치원은 중국 당 나라 유학생으로 《주역》의 내용에 능통하였을 것이며, 당 나라 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그처럼 말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원(元) 나라 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에 의해 '태극이란 고요한 것(靜)의 근원이다. 그것(태극)이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짐에 따라 만 가지의 사물이 변화되고 발생된다.'라고 하여 '태극'을 천지 만물의 근원자(根源者)로 파악하였다. 이색은 '태극은 무극(無極)을 의미하며, 무극은 만물이 변화하기 전의 그 어떤 혼돈(混沌)한 상태를 말한다.'라고 하여 '무극'과 '태극'을 같은 의미로 파악한 것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의 내용을 보면 앞의 그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상천(上天)이 무성무취(無聲無臭)하다 하였다. 그러면 이곳이 그 무극(無極)이 있는 곳인가. 그러므로 주자(周子)가 태극도(太極圖)를 지었는데 역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한 것이리라. 대저 태극을 찬(讚)하되 또한 하나의 무극이라고 한 것이다. 하늘에 있어서는 혼연(渾然)할 따름이니 바람이 나타나고 우뢰가 치기 이전이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적연(寂然)할 따름이니 사(事)에 응(應)하고 물(物)에 접(接)하기 전의 일일 것이다. 바람을 일으키고 천둥을 움직여서 혼연한 자가 조그만 변화도 없으면 일(事)에 응(應)하고 물(物)에 접(接)함에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즉 이색이 탐구하였던 것은 천지 만물이 나타나기 이전의 하늘(천) 즉 적연부동(寂然不動)의 경지이다. 주렴계가 말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주역》의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적(寂)'으로, 또 《시경》의 '무성무취(無聲無臭)'의 '무(無)'로, 《예기》의 '감어물이동(感於物而動)' 이전의 '정(靜)'으로 파악 정의(定義)하고 있다.

이색의 문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98)은, 인간과 만물의 끊임없는 낳고 낳아짐이 곧 천지 변화와 운행(運行)이 끊이지 않게 되는 까닭이다. 원래 태극에 움직이고 고요해짐이 있게 됨으로써 음과 양이 나타나게 되고, 음과 양이 변하고 합해짐에 있어 (거기에) 오행이 갖추어지게 된다. 이것에서 무극 태극의 진(眞)과 음양오행의 정(精)이 교묘(巧妙)하게 합하고 응결(凝結)하여 인간과 만물이 낳고 낳아지게 된다. 고 하였다. 이것은 《주역》〈계사전〉의 내용과 주렴계의 <태극도설〉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즉 《주역》〈계사전〉의 '역유태극 시생양의(易有太極是生兩儀)...'라고 한 문구와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태극동이생양(太極動而生陽) 동극이정(動極而靜) 정이생음(靜而生陰)...'이라 한 문구를 이색 나름대로 다시 해석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음'과 '양'이 변(變)하고 합(合)해짐에 거기에 오행이 갖추어진다고 한 것은 〈태극도설〉의 '.. 양변음합(陽變陰合) 이생수화목금토(以生水火木金土)...'를 다시 해석한 것이고, 무극 태극의 진(眞)과 음양오행의

 정(精)이 교묘하게 합하고 응결하여 인간과 만물이 낳고 낳아지게 된다고 한 것은 〈태극도설〉의 '무극지진(無極之眞) 이오지정(二五之精) 묘합이응(妙合而凝)'이라 한 것을 다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무극 태극'이나 '음양오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주렴계가 말한 바,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二, 음과 양) 오(五, 오행)의 정(精)'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혀 놓지 않은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천지의 변화와 운행은 원래 '태극'이라는 것이 있어 이 태극이 움직여지고(動) 고요해지면서(靜) 여기서 음과 양이 나타나게 되고, 이렇게 하여 나타난 음과 양이 변화하고 합해져 오행(五行)이 갖추어지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음양과 오행에 다시 무극이면서 태극인 진리가 묘하게 합해져 응취(凝聚)하게 됨으로써 나타난 것이 천지(우주)이고 사람이며 만물이다. 또 그렇게 하여 나타난 사람과 만물이 소멸되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계속하여 또 다른 사람과 만물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사람과 만물이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이 계속되는 것을 '천지의 변화와 운행'이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무극이면서 태극인 것이 있어 이것이 움직여지고 고요해져 음과 양이 나타나게 된다.'는 내용 가운데 '무극이면서 태극인 것'을 한마디로 '태극'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이 '태극'이 움직여지고(動) 고요해짐(靜)으로써 음과 양이 나타나게 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정도전이 '태극'을 천지(우주) 만물의 본체(本體)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추리할 수 있다.

이색의 문인이자 정도전과 당시 성리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는데, 이 《입학도설》을 '주렴계의 〈태극도〉 (朱子之道)를 근본으로 하고, 주자의 《중용장구》(章句之說)를 참고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라 하였다. 그 그림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태극'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짐승 풀 나무 천 가지 형태 만 가지 모양의 것으로서 각기 성명(性命)이 정해진 것이라면 모두 다 하나의 태극(太極)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렇다면 만물은 각각 하나의 이(理)를 갖추고 있는데, 만 가지의 이(理)는 하나의 근원(根源)에서 함께 나온 것이라 하겠으며, 하나의 풀이나 하나의 나무도 각각 하나의 태극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천하에 성(性)이 없는 사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권근은 인간 짐승 풀 나무 등 천지의 만물이란 하나같이 같은 형태나 같은 모양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가 '태극'으로부터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지의 만물이란 모두 하나의 태극을 지니고 있다고 권근은 보았다. 여기서 권근은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태극'을 천지 만물의 본체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본체 태극에서부터 천지 만물이 현상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권근은 이미 현상계로 나타난 상태에서 천지 만물의 변화와 특성을 추적 본체를 설명하고 있다. 잘못된 추측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생각에서 본체 '태극'에 대하여 정도전은 '음과 양'의 면에, 권근은 '이'의 면에 치중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정(浩亭) 하륜(河崙, 1347-1416)은 '태극'을 천지 만물의 중심이라 보고 '이'와 '기'로 설명한다. 즉, 
...천지에 시초가 없고 천지에 뒤 하여 끝이 없는 것이 이(理)와 기(氣)이다. 이것을 태극(太極)이라 한다. 태극은 이(理)요 그 운동은 기(氣)다. ...(태극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한 까닭은 천지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이며, 그것(태극)은 만물의 중심이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태극'을 곧바로 이(理)다 기(氣)다 한 것은 한국의 철학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하륜도 역시 '태극'을 천지 만물의 본체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은 천지 만물의 본체를 '태극'으로 설명하되 형이상과 형이하로 구분하고 있다. 즉, 
일(一)에서 이(二)가 나타난 뒤에 사물은 만 가지로 다르나 그 까닭을 추구(推究)한다면 마침내 분명하게 그 근본이 같음을 알 것이다. 추호(秋毫)란 적은 것이지만 태극을 갖추었고, 태산(泰山)은 비록 큰 것이나 천(天)이 지은 바라. 그렇다면 형이상으로부터 천지 또한 하나의 것(物)에서 된 것이요, 형이하로부터 사물마다 모두가 무극(無極)이 된 것이다. 어찌 세상 사람들이 그 근본을 버리고 말엽(末葉)을 좇아 천차만별에 현혹되는지. (그들은) 때로 대롱구멍으로 하늘을 보며, 때로 송곳으로 땅을 가리켜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다고 다투고 떠들썩하게 시비(是非)를 가리려 든다. 라 하였다. 여기서 보면 천지 만물 가운데에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태극 즉 무극(太極卽無極)'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형이상(形而上)에서 보아도 천지란 '태극'에 의한 것이며, 형이하(形而下)에서 보아도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무극'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태극'과 '무극'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형이상과 형이하의 면에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김굉필이 의미하는 바 형이상과 형이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김굉필 역시 '태극'을 천지 만물의 본체로 보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 뒤 '태극'에 대하여 심도 있게 취급하여 나름대로의 '태극'에 관한 입장을 펼친 사람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다. 이언적은 손숙돈(孫叔暾)·조한보(曹漢輔)와 함께 '무극 태극'에 관하여 몇 차례 논변을 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무릇 이른바 태극(太極)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斯道)의 본체요 만화의 영요(領要)이니, 자사(子思)의 이른바 '천명(天命)의 성(性)'이라는 것이다. 대개 충막무짐(沖漠無朕)한 가운데 만(萬) 가지의 상(象)이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라 하여 '태극'을 만물이 나타나기 이전의 추상적(抽象的)이며 절대적(絶對的)인 법칙성(法則性)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라 이해되며, 천지 만물이 나타난 뒤에는 천지 만물의 법칙성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주렴계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한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무극은 곧 태극'이라 못을 박았다.

무릇 이른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하는 것은 이 도(道)의 물 이전을 형용한 것이며, 실은 만물의 근저(根底)가 되는 바이다. ... 뒷날의 학자로 하여금 태극의 묘(妙)를 밝게 보아서 유무(有無)에 붙잡히지 않고 바야흐로 체(體)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천성(天性) 이래로 아직 전하지 못한 비밀을 참으로 얻게 하는 것이니 그 어찌 태극의 위에 무극이 다시 또 있으랴.

이언적과는 달리 이이(李珥)는 《주역》〈계사전〉의 '역유태극...'을 해설하되 '음양이 변역하는 가운데에 태극의 이가 있다.'라고 설명하고, 주렴계의 〈태극도설〉의 첫머리 '무극이태극'에 대하여 비록 그 극(極)은 없을지라도(無極) 실지로는 커다란 극(太極)이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고 하여 '태극'의 개념을 두 가지로 정의하였다. 즉 하나는 만물이 변화되는 주안(主眼, 樞紐)으로, 다른 하나는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원(根源, 根底)으로 정의(定義)하였다. 다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저 음(陰)과 양(陽)은 두 실마리로 순환(循環)하지 마지않아 본래 그 비롯됨이 없다. 음이 다하면 양이 나타나고 양이 다하면 음이 나타나게 되어 한 번은 음이 되었다가 한 번은 양이 되었다가 한다. 그러므로 태극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태극이 만화의 추뉴(樞紐)요, 만품(萬品)의 근저(根底)가 되기 때문이다.

'태극'은 만물을 현상계로 들어가게 한 뒤 이미 현상계로 드러난 만물에 있어서는 만물의 이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로 '태극'을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이라 한다는 것이다. 즉, 천지(天地) 인물(人物)에 비록 각각 그 이(理)가 있다. 그러나 천지의 이(理)는 곧 만물의 이(理)요, 만물의 이(理)는 곧 사람의 이(理)라 하겠다. 이것이 이른바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이라 하는 것이다. 라 한 그의 말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이의 주장은 그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입론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태극'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학자들이 다소 차이는 있다고 하겠으나 단편적이긴 하지만 '태극'이란 천지 만물의 본체(本體)라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성리철학자들이 '태극'이란 개념을 자신들의 철학 속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실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定義)가 없고 그 말이 쓰이는 문장에 따라 그 의미가 역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의 내용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태극'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천지 만물이 현상계로 드러나기 이전의 본체계에 있을 때의 것을 '태극'이라 한다. 따라서 '태극'이란 본체계를 설명하는 개념(槪念)이라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태극'이란 현상적 사(事)와 물(物)에 있는 초감성적 실재(超感性的實在)이다. 즉 '태극'은 인간의 감성으로는 지각(知覺)할 수 없으며, 다만 이성적 사유(理性的思惟)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순수(純粹)한 사유(思惟) 내지는 지적 직관(知的直觀)의 대상(對象)이자 하나의 개념(槪念)이다.


2)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관계
앞에서 이미 중국의 유가(儒家)와 주자(朱子) 그리고 한국의 성리철학자들이 자신의 성리철학에서 '태극'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의 내용 가운데 '역유태극(易有太極) 시생양의(是生兩儀) 양의생사상(兩儀生四象) 사상생팔괘(四象生八卦)...'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태극'이 양의(兩儀) 즉 음과 양을 낳으며, 사상 팔괘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중국 한(漢) 당(唐) 유학자들이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데 인용하게 되었다. 즉 이들은 당시 노장철학(老莊哲學)이 풍미했던 관계에 기인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태극'을 '기(氣, 氣運)'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당 유가들을 거쳐 북송(北宋)에 들어와 이루어지기 시작한 성리철학에서는 '태극'과 음양'을 자신들의 성리철학을 입론하는데 기본 개념으로 삼았다. 중국 성리철학의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주렴계(周濂溪)도 자신의 저 〈태극도(太極圖)〉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이면서 태극인 것이 움직여져 양이 나타나게 되고, 움직여짐이 다하게 되면 고요해지게 되는데 고요해지게 되면 음이 나타나게 된다. 고요해짐이 다하게 되면 다시 움직여지게 된다.'라고 하여 '태극'과 '음양'을 자신의 성리철학을 입론하는 기본 개념이자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주렴계는 '태극'을 '이'라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저서 가운데 하나인 《통서(通書)》〈이성명장(理性命章)〉을 보면 '태극'의 안에 '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정명도(程明道)는 《주역》〈계사전〉의 '형이상자 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 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라 한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주역》〈계사〉에 이르기를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라 하였고, 또한 '한 번은 음(陰)해지고 한 번 양(陽)해져야 하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음양(陰陽)은 역시 형이상자(形而上者)라 하겠으며, 도(道)라고 일컬은 것은 오직 이 말(도)에 실려 있는(도에 내포하고 있는) 것을 얻어 (형이)상 (형이)하를 잘 나누어 밝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원래 다만 이러한 것을 도(道)라 하는 것으로 요컨대 사람들이 침묵을 하면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위의 내용에서 보면, 정명도는 한번 음 해지고 한번 양해져야 하는 것을 '도'라 한다. 그리하여 '도'라는 말의 본 뜻을 생각해 보면 '형이상'과 '형이하'를 나누어 말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보았다. 그렇다면 한번 음 해지고 한번 양해지는 그것을 '형이상'이라 말할 수 없고, 그것이 한번 음 해지고 한번 양해지게 되는 근거를 '형이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는 그가 형이상이라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 하고, 형이하라는 것을 일컬어 기(器)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처럼 청허일대(淸虛一大)를 천도(天道)로 삼았다면 이것은 곧 기(器)로서 말한 것으로 도(道)라 할 수 없다. 고 하였던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앞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청허일대를 천도로 삼은 것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을 '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란 천도를 말로 표현한 것으로 현상계로 드러난 개물(個物)의 그 무엇 즉 구체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는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위로 철저히 살펴보나 아래로 철저히 살펴보나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다고 하겠다.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할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이 말과 같이 들어낼 수 있다면, 기(器) 또한 도(道)이고 도(道) 또한 기(器)라 하겠다. 다만 도에 있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과 더불어 뒤에나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에게나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명도의 동생 정이천(程伊川)은 '태극'과 같은 의미로 '도'를 상정하고, 이 도를 '이(理)'로 음양을 '기(氣)'로 파악하였다. 즉 그는 '음양(陰陽)을 떠나서는 다시 도(道)란 없다. 음(陰)이 되고 양(陽)이 되는 까닭이다. 음양은 기(氣)이며,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요 이(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이천이 '이'와 '기' 그리고 '도'와 '기' 또 '형이상'과 '형이하'의 개념을 자신의 성리철학에 도입하여 이들 개념으로 '태극'과 '음양'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이천은 '이'를 현상계의 생성 변화의 법칙으로 파악 형이상의 '도'라 하고, '기'를 현상계가 생성 변화되는 그 자체로서 형이하의 '기'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개물의 형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음양의 기'이지만 '음양의 기'가 현상계의 개체로 드러나게 되는 까닭은 '도' 즉 '이'가 있기 때문이라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