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5일
“새들이 예서 제서 지저귀는 숲 사이를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부소산에 올랐다. 한적하고 깊숙한 맛이 어딘지 모르게 백제의 옛 향기를 품은 듯하여 부소산성 남은 자취를 돌아볼 때는 돌 한 개 기왓장 한쪽에도 반가운 마음 한이 없었다. 산마루 迎日臺를 지나 軍倉터를 찾으니 창고는 보이지 않고 타다 남은 군량미가 한 알 두 알 손끝에 짚이는데 색은 비록 검지만 모양은 그대로 있어 百濟의 恨을 말하고 남는다.”
이 글은 1955년도 초등학교 6학년 국어교과서에 ‘고적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기행문 ‘扶餘 편의 첫 부분이다. 지금도 부여의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수학여행을 扶餘로 가게 되었으니 이 紀行文을 6학년 모두(전체 졸업생이 23명이었다) 외우도록 하셨었다. 글 쓴 이가 누구였던 것은 그때도 몰랐었고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들이 외우기 쉽도록 쓴 명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노령산맥의 끝 자락인 태청산과 장암산 아래 산골마을(지금 常武臺가 들어가 있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이 산골 마을이어서 6.25 전쟁의 참상을 도시나 평야지역에 살던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심하게 겪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던 그 시절, 살던 집은 아직도 소탕되지 않고 산속에 숨어있는 빨치산(파르티잔:유고슬라비아의 Partizan에서 유래) 잔당들의 잠자리가 될 것을 막기 위해 경찰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추수한 곡식과 김장해 놓은 김치까지도 그들의 식량이 될 것을 염려하여 주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게꾼이라고 불리던 동원된 노무자들의 지게에 지워 지서(支署)로 가져가 버렸었다. 그때 배고픈 시절을 보내고 수복 후 다시 학교에 다닐 무렵, 어른들 키의 두 세길 높이의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 쌓인 그 지서 앞을 나는 눈을 흘기면서 지나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지방 공비들이 소탕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집 없는 설움과 배고픈 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어서 2박 3일 정도 소요되는 여행에서 먹을 식량을 준비하고(그때는 여관에서 쌀을 받고 재워주고 먹여주기도 했었다), 교통비를 현금으로 챙겨야 하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친구들이 많았고, 나도 그 편에 속했었다. 그러나 직접 발로 밟아보지는 못한 곳이었지만, 그 기행문을 외우면서 마치 내가 그 길을 지나듯 눈에 선했던 곳이 바로 扶餘의 부소산과 낙화암이였다.
며칠 전 고향이 扶餘인 친구와 산행을 하다가 문득 그 시절 생각이 나서 扶餘에 얽힌 나의 지난 얘기를 하였는데, 어제 잠자리에 들면서 불현듯이 부여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어나자마자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차 시간을 기다려서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扶餘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넘었다.
버스터미널 옆 기사식당의 입에 맞는 반찬이 옛날 고향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음식 그 맛이다. 아점(brunch)을 마치고 도로 표지판을 따라 부소산성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큰길 중앙 로터리에 聖王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의 사진을 찍고, 부소산문을 찾아가는 데는 10여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해발 106미터의 부소산은 부여읍에서 보면 산이라기보다 작은 언덕에 있는 공원처럼 보였다.
부소산문 안쪽 담장을 따라 심어 놓은 키 큰 수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니 계절은 벌써 가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작은 광장을 지나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세월 따라 환경도 달라졌는가? 옛날의 지저귀던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요란한 매미소리가 더위를 잊게 한다.
부소산문을 지나 먼저 찾은 곳이 삼충사(三忠祠)다. 기울어져가는 백제의 멸망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했던 성충, 흥수, 계백 등 세 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길 입구(入口)는 초입부터 박석(薄石)을 깔아 고풍스럽게 잘 다듬어놓았다. 삼충사 외삼문(外三門) 밖에서 전경사진을 찍고 내삼문(內三門)을 지나 본당 계단에 올라 머리를 숙이니, 의자왕 앞에서 충언을 하는 성충과 흥수의 모습, 가족을 자기 손으로 먼저 보내고 최후의 결전을 위해 이미 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로 결의한 5천 명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로 향하는 계백장군의 비장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삼충사를 나와 영일루(迎日樓)로 가는 길은 숲 그늘로 이어지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가 연신 이마에 땀을 흐르게 한다. 왕과 귀족들이 계룡산 연천봉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하루의 일과를 계획했다는 영일루. 누각 안에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을 지닌 ‘인빈출일(寅賓出日)’을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필자가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조병호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영일루에서 가까운 곳에 군창지 터에 가니 철재 울타리 안으로 잔디가 푸르고 그 위에 주춧돌이 몇 개 남겨져 있었으며, 큰 소나무 몇 그루가 터를 지키고 있을 뿐, 1915년에 발견되었다던 불에 탄 쌀은 볼 수가 없었다. 수혈병영지를 지나 반월루(半月樓)에 오르니 서쪽에 백마강이 흐르고 남쪽으로 부여읍(扶餘邑)이 한눈에 들어온다. 1972년에 지었다는 누각의 현판에는 이 지역출신 유명 정치인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니 그분도 글씨를 잘 썼던 모양이다.
1929년에 ‘부풍시사’라는 모임에서 건립했다는 백화정(百花亭)은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3천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백화정 옆에는 당시 궁녀들의 모습을 지켜봤을 것 같은 해묵은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청청한 기상으로 서있다. 정자에 오르니 백마강의 푸른 물은 볼 수가 없고, 누런 흙탕물과 공사 중인 장비와 여기저기 쌓여있는 모래더미가 눈에 들어올 뿐이다. 환경을 파괴하게 될지? 개선하게 될지? 아직 우리가 알 수 없는 이른바 4대 강 개발이 여기서도 진행 중이다.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년 백제역사 오롯이 숨쉬는곳.
낙화암 절벽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멎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련가!
백마강 찾은 길손 천년송 그마음.
낙화암 절벽 아래의 백마강 나루터 옆에 있는 고란사(皐蘭寺)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라서 벽돌로 포장된 평탄한 넓은 길은 끝나고 돌계단의 급경사 내리막 길이 시작된다. 고란사에 내려가 절 뒤에 있는 그 유명한 고란정(皐蘭井)의 시원한 물로 갈증을 달래니 이마에 흐르던 땀이 식은 듯 시원해진다.
선착장 옆의 조룡대(釣龍臺)는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중국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 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窺巖津)를 지나 낙화암(落花巖)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엎어지고 말았다. 소정방은 이 돌연한 괴변이 왜 일어났는지를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라고 하였다. 강룡을 퇴치할 방법을 소정방이 다시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쇠를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를 미끼로 강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용을 낚기로 하였다. 그러자 용은 미끼인 백마를 삼켜서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뒷날 사람들이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라 하고,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금강(錦江)의 줄기인 부여 부근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나온다. 그런데 ‘물고기’를 한자로 적을 때 ‘어룡(魚龍)’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을 뒷날 잘못 전하여 용을 낚았다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남부여 백제조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즉, 사비하(泗沘河) 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일찍이 소정방이 어룡을 낚기 위해 꿇어앉았던 자국이 바위 위에 있으므로 용암(龍巖)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어느 시기부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모두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룡이 용으로 바뀌어 전해져 오게 된 듯하다.
전설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조룡대를 그냥 지나쳐 다시 계단을 올라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106미터 산정상에 세워진 사자루(泗泚樓)에 올랐다. 더위 때문인지 오고 가는 사람이 전혀 없고, 다만 백마강을 스쳐 지나온 미풍이 곁을 슬며시 지나갈 뿐이다. 이 사자루는 1919년 임천 관아의 문루였던 개산루(皆山樓)를 옮겨지었다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영친왕의 형님인 의친왕 이강(李堈) 공이 썼고, 누각 안에는 누각을 설명하는 글과, 백제의 한(限)을 담은 옛 시인들의 한시(漢詩)도 걸려있었다. 땀을 식히며 누각 안에 걸려있는 옛 시인들의 시를 보면서 문득 인류역사의 주인공으로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몇 천년이 지나도 인류가 남아있는 한 그들의 공(功)과 과(過)는 지워지지 않고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궁녀사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궁녀사(宮女祠)는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될 때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몸을 날려 죽은 3천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다. 사당 앞 길가에 울타리처럼 심어진 무궁화꽃나무 아래 떨어진 흰 꽃송이들은 그날의 궁녀들의 넋이런가 애잔하기만 하다. 열린 삼문으로 들어가니 사당 문도 열려있는데 선녀 같은 세 사람의 궁녀들 영정이 정면에 있고, 그 앞에 촛대와 향로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화재의 위험을 감안하여 촛불과 향을 피우지 않고 그냥 나왔다.
부소산성을 내려와 시내 외곽으로 옮겼다는 박물관을 찾아 걸어가다가 뜻밖에 定林寺址를 만났다. 사적 제301호로 지정된 곳이다.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고려 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지금도 복원은 되지 않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차원에서도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는데, 들어가 살피지는 못하고 지나면서 5층석탑 사진만 찍고 박물관을 찾아 발길을 재촉했다.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5층석답이 홀로 슬픈 역사의 기록을 안고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정림사에 있던 이 탑의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았다고 한다. 비문에 의자왕, 태자융, 효, 인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남겼다고 하니, 돌에도 마음이 있었다면 그 오랜 세월을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있었을까?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 와보지 못했던 백제 망국의 수도 부여에 찾아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는 한 서린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1300여 년이 지난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우리 역사에는 여러 나라들이 세워지고 또 멸망해 갔다. 백제를 멸망시켰던 신라와 당나라도 그랬고, 고려도, 조선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어떤 나라든지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나라가 흥하게 되는 것도, 망하게 되는 것도, 모두가 다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와 미래를 욕되지 않게 남겨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를 돌아다니다 보니 귀경할 시간에 쫓겨 박물관은 다시 기회를 마련하여 방문하기로 하고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