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林寺桃花(대림사의 복숭아꽃) - 백거이(白居易)
人間四月芳菲盡 (인간사월방비진) 속세에는 사월이라 꽃이란 꽃 다 졌는데
山寺桃花始盛開 (산사도화시성개) 산사의 복사꽃은 이제 한창 만발했네.
長恨春歸無覓處 (장한춘귀무멱처) 가신 봄을 찾을 길 없어 한탄하고 있었더니
不知轉入此中來(부지전입차중래) 어느 사이 이곳으로 들어왔었네.
백거이(白居易)의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는 경쾌하지는 않고, 구세제민을 주제로 삼아 약간 무거운 느낌이 있다. 뤄양 부근의 신정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시안)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기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시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한림원의 학사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807~815년까지 항명에 의해 유배를 갔다. 다시 항저우의 지사로 재시작하여 822년부터 824년까지 항저우를 다스렸으며, 825-827까지 수저우를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사람이다.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다. 27세 때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그리 순탄한 관직생활은 아니었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항주와 소주의 자사(刺使)를 역임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 향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술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시는 민중시인, 사회시인, 풍유시인 등으로 불릴 만큼 하층빈민의 입장에서 세상에 대한 불공평을 개탄하는 내용이 많다. 그의 풍유시 170여수와 신악부(新樂府) 50수는 평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을 인본주의적인 견지에서 파헤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장한가'를 비롯하여 '비파행(琵琶行)', '진중음(秦中吟)'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