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대저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이다
而浮生若夢 爲歡 幾何(이부생약몽 위환 기하)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 얼마나 되겠나?
古人 秉燭夜游 良有以也 (고인병촉야유 양유이야)
옛사람들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노닌 것도 실로 까닭이 있었음이라
況 陽春召我以煙景 大塊暇我以文章 (황 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조물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줬음에야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회도리지방원 서천륜지락사)
복사꽃 오얏꽃 아름다운 동산에 모여 형제들끼리 즐거운 일들을 말하는데
群季俊秀 皆爲惠連 吾人詠歌 獨慙康樂(군계준수 개위혜련 오인영가 독참강락)
여러 아우들 준수하기가 모두 사혜련과 같은데 내가 읊는 노래만 강락후에 부끄러울 뿐이네.
幽賞 未已 古談 轉淸(유상 미이 고담 전청)
그윽한 감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옛 이야기는 갈수록 맑아지는데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
꽃으로 옥 자리 대신 깔고 술잔 날려 달을 취하게 하네
不有佳作 何伸雅懷(불유가작 하신아회)
아름다운 작품이 없으면 어찌 고아한 회포를 펴리오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여시불성 벌의금곡주수)
만약 시를 이루지 못한다면 금곡(金谷)의 술잔 수만큼 벌주를 내리리라.
* 인간(人間)의 삶이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시간(時間)과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간(空間)이 교차한 어딘가에 찍히는 한 점에 불과하다. ‘시간’이라는 말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시(時)를 토막 낸 것에 불과하거니와, ‘공간’ 역시 허공(虛空)의 특정부분을 나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말 자체도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사람다운 삶을 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사람은 ‘간(間)’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바, 고대 중국인들이 시간-공간-인간의 삼간(三間)을 중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삼간’에서의 유한(有限)을 얼마나 유용하고 의미 있게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시공(時空)’를 초월한다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출생과 사망 사이, ‘공간’은 그가 위치한 곳의 하늘과 땅 사이, ‘인간’은 그가 그의 시공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 또한 그 삼간(三間)을 꽤나 의식했던 듯하다.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도 그런 의식의 표출로 보인다. ‘춘야연도리원서’는 이백이 복사꽃과 오얏꽃 만발한 봄날의 정원에서 형제와 친족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여는 것을 기념하여 지은 글이다.
‘천지’를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에 비유하고 ‘세월’은 그 여관에 묵어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 너무 기발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거니와, 밤에 촛불을 들고서라도 짧은 인생의 의미를 실컷 찾아보자는 너스레 깨달음이 너무 진지하여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려한 문장도 일품이지만 시재(詩才)가 뛰어나 강락후(康樂候)에 봉해졌던 남송(南宋) 시인 사혜련(謝惠連)이나 진(晋)의 거부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 고사를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차용하여 흥취를 고조시키는 이백의 글 솜씨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려진다.
‘춘야연도리원서’를 감상할 때 많은 사람들이 ‘開瓊筵以坐花 飛羽觴而醉月(개경련이좌화 비우상이취월)’을 “옥자리 깔고 꽃 마주하고 앉아 술잔 날려 달빛에 취하다”라고 해석하지만 그건 시적(詩的) 감흥(感興)을 무시한 풀이라는 눈 흘김을 받아 마땅하다. 그 구절 해석의 열쇠는 앞 구절의 ‘이(以)’와 뒷 구절의 ‘이(而)’, ‘以’는 ‘-로서’라는 의미이므로 ‘開瓊筵以坐花(개경련이좌화)’는 진짜 옥으로 만든 자리를 깔았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깔고 앉을 수 있을 만큼 키 작은 꽃’ 즉 ‘좌화(坐花)’를 ‘옥자리’ 삼아 깔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고, ‘飛羽觴而醉月(비우상이취월)’은 비(飛)와 취(醉)가 동사로 쓰이고 그 사이에 ‘그리고’라는 의미의 접속사 ‘而’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깃털 모양의 술잔[羽觴]을 날려 달을 취하게 하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시적 감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달을 취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입을 삐죽거리겠지만 “그렇다면 술잔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으면 뒤통수 긁적거릴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罰依金谷酒數’도 씹으면 씹을수록 인생의 참맛이 우러나오는 명구(名句)다. 진(晉)나라 때 형주자사를 지내면서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큰 부자가 됐다는 석숭(石崇)은 낙양 서쪽 골짜기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어놓고 호화로운 시회(詩會)을 베풀면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 그는 지금도 중국서 복(福)-녹(祿)-수(壽)의 삼선(三仙)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고 있지만, 당대의 실력자 사마륜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후 애첩(愛妾) 녹주(綠珠)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지는데, 녹주의 미색을 탐하다가 거절당했던 사마륜의 측근 손수(孫秀)가 앙심을 품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도 한다. 인생무상, 생전에 1백여명의 처첩과 8백여명의 하인을 거느리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석숭이지만 죽은 후엔 ‘금곡원의 벌주’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 않느냐는 이백의 은근한 경고(?)에 누군들 시를 제대로 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되겠느냐고? ‘춘야연도리원서’를 한 번 읽으면 봄날의 흥청망청 야유회 정경이 떠오르지만 두 번 읽으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공간-인간에서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충고가 또렷하게 감지된다.
- 운곡 | 14.04.09 |
行路難
行路難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길은 험하고 험하다.
多崎路今安在 (다기로 금안재) 굴곡도 갈림길도 있었는데 지금 어디인가.
長風破浪會有時 (장풍파 랑회유시) 모진 풍파 이겨내고 때가 되면,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 제창해) 돛 높이 달고 창해를 건너리.
山中問答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어찌하여 푸른 산 속에 사느냐고 묻지만
笑而不答心自閒(소이부답심자한) 그저 웃을 뿐 대답을 않아도 마음은 편하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유유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이곳이 별천지이지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靜夜思
床前明月光 (상전명월광) 잠결에 눈을 뜨니 마루 아래 하얀 달빛
疑是地上霜 (의시지상상) 달빛인가 서리인가 눈 비벼 바라보네.
擧頭望明月 (거두망명월) 고개를 들면 휑한 달만 높고
抵頭思故鄕 (저두사고향) 일렁이는 집생각에 힘없이 고개 숙이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황학루에서 맹호연을 광릉으로 보내며
故人西辭黃鶴樓 (고인서사황학루)친구는 황학루에서 이별을 고하고
烟花三月下楊州 (연화삼월하양주)안개낀 춘 삼월 양주로 떠나가네.
孤帆遠影碧空盡 (고범원영벽공진)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푸른 하늘에 사라지고
唯看長江天際流 (유간장강천제류)보이는 건 오직 하늘과 맞닿아 흐르는 장강뿐.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