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서(西村)
문화/역사 이야기 2021-09-13 06:38:27에 본인의 다음 블로그 운중풍월에 올렸던 글을 2022. 10. 25. tistorydp 올겨옴
7. 靑田 李象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아직도 9월의 가을 햇볕이 덥다고 느껴지는 西村 거리를 몇 바퀴 돌아서 필운대로 31-7 번지에 있는 청전 이상범(1897~1972)의 가옥을 겨우 찾아냈다. 1942년부터 1972년까지 30년을 청전이 살았다는 이 집은 좁은 골목 안 대문에 아직도 이상범이라는 문패가 부착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하고 깨끗한 옛날 한옥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대청과 그가 그림을 그렸을 화실에 그의 그림이 걸려있을 뿐, 관리인도 어디 볼일이 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혼자서 조용히 둘러보면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나왔다.
청전은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 몰락한 선비 승원(承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활고 때문에 1915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학비를 받지 않았던 서화미술원(書畫美術院)에 입학, 1917년 수료한 뒤 스승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며 계속 화업을 쌓았다.
1923년 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노수현과 함께 2인 전을 개최하는 것으로 중단되었다.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1929년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이어서 추천 작가와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사 재직 시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 후 1933년에 자택에 설립하였던 청전 화숙(靑田畫塾)에서 광복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4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이에 참여하여 추천 작가·심사 위원·고문 등을 역임하며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부터 1961년의 정년퇴직 시까지는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작품세계
그의 작품 세계는 서화미술원과 경묵당 수학 시절인 초기에 안중식의 화풍을 따라 남북 종(南北宗)절충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1923년 무렵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하여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 개인 소장의 「산수도」(1919년)와 제3회 및 제5회 조선 미술전람회 출품작인 「모연도(暮煙圖)」(1924년)·「초동도(初冬圖)」(1926년)를 들 수 있다.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되는 것은 1945년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엷은 먹에서 차츰 진한 데로 변화하는 농담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격조 높게 다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동아일보사 소장의 「설로도(雪路圖)」(1957년), 개인 소장의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년) 등이 있다. 그는 전통적 수묵 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더불어 한국 산야와 전원의 독특한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풍의 화법으로 구현시킨 근대 한국화의 대표적 산수화 가이다.
항일과 친일 논란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는 미술 담당 기자로 근무하던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는 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제안에 동조하여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처음 삭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하고, 반도 총후 미술전람회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참가하여 친일 행위를 한 바 있다.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기고한 삽화 〈나팔수〉 등 친일 작품도 남아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미술 부문에 월북 화가인 장남 이건영과 함께 선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