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 사도
세자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
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
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아들을 죽인 자신의 행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한편 사도세자 사건으로 조정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한 벽파와 동정한 시파로 분리되어 새로운 당파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28세로 숨을 거둔 사도세자는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불과 열 살 나이에 노론이 중심으로 일으킨 임인사화를 비판할 정도로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극도로 싫어했다.
영조 25년(1749)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노론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한다.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려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여기에 어머니 영빈 이씨와 한 배에 태어난 화평옹주, 화완옹주까지 합세했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처가와 외척들은 거의 전부가 정치적으로 그의 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비롯하여 영조의 장인 김한구,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씨, 화순옹주의 시아버지 김흥경, 화협옹주의 시아버지 신만, 화평옹주의 시아버지 박사정 등이 모두 노론이었다. 화완옹주를 비롯하여 화령옹주, 화길옹주도 모두 노론 집안으로 시집갔다. 이들 노론세력이 공모해서 세자의 비행을 자주 영조에게 고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 꾸짖었고 마침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홍계희, 윤급 등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5월 22일 실록의 일부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영조실록 5월22일)
그 날부터 세자는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고 영조를 뵙기를 청하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이미 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는데 20여 일이 지난 윤5월 13일 유언비어가 '안'에서 일어나 영조가 놀라고 세자를 자결하라 명한다. '안'이라는 것은 궁궐 내란 의미고 유언비어는 바로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생모 영빈 이씨였다. 이 '유언비어' 사건이 없었더라면 사도세자는 폐세자 됐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금이 칼을 들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영조실록 권100 윤5월 13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은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했고 그날 일을 꺼려해서 감히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개입해서 이렇게 극적으로 진행되었다.
고독한 세자의 비참한 죽음
나경언이 비행 10종목을 적어 올린 날로부터 시작된 사도세자의 비극은 한 달 만인 윤5월 21일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단지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는 전교를 내렸을 뿐이다. 이를 뒤주에 가둬 9일 간 내버려두다가 아들이 죽은 날 후회했다는 말로 누가 납득하겠는가? 단지 의례적인 말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본 아들을 죽인 영조는 후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뒤주에 갇히던 다음날 세자의 장인 좌의정 홍봉한은 "한림(翰林) 윤숙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죄를 주기"를 청했고 영의정 신만, 신회, 김성응 등도 모두 죄주기를 청해 영조의 화를 부추겼다.
이에 젊은 사관이었던 윤숙은 해남으로, 영조의 명에도 물러가지 않고 세자를 지켰던 임덕제는 강진으로 유배됐다. 임덕제는 나가지 않고 버티다가 영조의 명으로 시인들에게 끌려 나가게 되자 세손 정조를 업고 들어와 할아버지에게 죄를 빌게 했던 사관이었다. 영조 50년 6월, 임덕제가 함평에서 현감으로 죽자 그를 슬퍼하며 좌승지로 증직시켰다.
그날 사관은 말한다. 임덕제는 강직하고 임오년(사도세자가 죽던 해) 수립(樹立. 세손을 업고 나온 일)에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사도세자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고 노론이 조정을 채우고 있었으나 당시 언론인 사관의 붓은 날카로웠다.
화안옹주와 화평옹주만의 어머니였던 영빈 이씨는 친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딸과 가세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던 동안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내와 어머니, 아버지 형제에게 모두 버림받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목격했던 11세 어린 정조는 마음 깊이 한을 새기고 기억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의 총애를 입은 화안옹주는 양자 정후겸을 앞세워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손잡고 권력을 휘두르며 정조를 압박한다.
뒤주에서 죽은 세자는 7월 23일 경기 양주 중량포 배봉산(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장사지냈다. 영조는 그날 묘에 가서 곡을 하고 수은묘(垂恩墓)라는 묘호를 내렸으나 죽은 아들은 되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극은 지울 수 없었다. 수은묘는 정조가 등극한 후 현재 화성의 명당 융릉으로 천장해 현융원으로 바뀐다. (출처 :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은 어머니였다 - 오마이뉴수)
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 보낸 편지 발견
기사 출처 :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세계일보, 송민섭·이태영, 2007.)
영조는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그처럼 잔인하게 죽였을까. 사도세자가 죽은 경위는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그녀 나이 일흔에 쓴 한중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혜경궁 홍씨는 그 책에서 성격이상자인 영조가 까닭없이 세자를 미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영조는 변덕이 무척 심한 사람이었기에 신하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일부에서는 정치적으로 노회한 혜경궁 홍씨가 친정과 다름없는 노론의 입장에 서서 남편의 죽음을 방조한 것에 대해 합리화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쪽에서는 세자가 소론에 기운 반면 장인 홍봉한은 노론이었다는 점, 세자를 가두어 죽인 문제의 뒤주가 홍봉한의 사주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는 점, 장인이면서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을 때 '세자를 구해야 한다'고 울부짖은 윤숙을 오히려 처벌하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홍봉한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것은 영조 25년인 1749년, 자신의 나이가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또다시 각 붕당은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씨가 세자와 영조의 사이를 이간질시키기 위한 여러 술책이 동원되었고, 그 결과 소론에 경도되어 있던 세자는 노론의 포위망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노론의 세력들은 세자의 좌우에 준동하는 무리를 속여 왕이 금지한 관서지방 유람을 하도록 사주하는가 하면, 평양기생을 암자에 숨겨두고 음행을 하거나 여승과 통간을 하는 등의 행각을 죄다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이른바 함정을 파고 세자를 유인한 것이었다. 영조는 세자의 이러한 행동에 몹시 실망하고 분노했다. 이 기회를 노려 계비의 아버지 김한구 등은 윤급의 종인 나경언을 매수하여 세자의 결점과 비행 10여 개 조목을 상소하게 했다.
왕은 크게 노했다. "음모가 바로 겨드랑이 곁에 있었다니 당장 자결을 명하노라." 나경언의 상소문은 다 전해지지 않고 있어 왜 영조가 자결을 명할 정도로 진노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종이 양녕에게 했듯이 세자 자리를 폐하는 정도로 그칠 수도 있는데,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그 상소문의 내용이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 짐작된다. 전해지는 세자의 비행 내용과 아울러 세자가 역모를 꾸미려 했다는 등의 영조의 심기를 지극히 자극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어쨌든 영조는 자신이 당쟁의 한가운데서 노심초사했던 세제 시절을 까맣게 망각한 채 일개 종의 상소를 읽고 세자의 자결을 명할 정도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네가 죽으면 왕실이 보존된다. 나는 널 죽여서 종사를 살리겠다." 이 말을 들은 세자가 땅에 머리를 박으며 나가서 죽기를 청하자 영조는 더욱더 대노했다. 영조는 세자를 즉시 폐서인하고 뒤주 속에 가두었다. 이렇게 해서 세자는 영조 38년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더운 여름에 갑갑한 뒤주 속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여드레 동안 갇혀 있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세자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여드레 동안에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을 때, 영조는 세자를 동정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파직하거나 귀양을 보냄으로써 세자를 죽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리하여 세자는 뒤주 속에서 비정의 세상을 하직했다. 그 후 영조는 뒤늦게 아버지로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원혼을 달래고자 그의 위호를 복귀하고 사도란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를 죽인 범인은 바로 붕당이었다. 영조는 그토록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역시 당쟁의 희생자가 되어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아버지의 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사도세자의 편지와 관련된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우울증 극에 달해 미칠 듯 합니다"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지난번에 말한 환약은 언제 보내시렵니까?”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짧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1735∼1762·장조)가 자신의 울화병을 염려하며 1754년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권두환 서울대(국어국문학) 교수는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11첩을 촬영한 사진자료를 일본 도쿄대에서 발견, 15일 서울대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이 중 일부를 번역·공개했다. 권 교수는 “홍봉한 가문에서 보관해온 이 자료는 영조·장조·정조의 편지 2094통을 모아 만든 58첩 중 일부”라며 “왕조의 공식 문건 이외에 사도세자가 자신의 내면을 토로한 글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고 이번 자료에 의미를 부여했다.
번역된 편지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왕세자의 심적 고통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사도세자는 1749년 어느 날 “대저 내 나이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건만 아직 한 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고 적었고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하고 미친 듯합니다”라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이라는 글도 보냈다. 왕세자로서 국치(國治)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다. 그는 1755년 11월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적는 등 장인에게 수차례 국가 경영 수업에 필요한 서적·지도를 부탁했다.
58첩의 편지는 1910∼1916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 의해 일본에 건너갔고,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山口) 현립도서관에 있다. 이번에 발견한 사진자료는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교수가 1965년부터 도쿄대에 보관해 온 것이다. 학계는 이번 자료가 조선시대 르네상스로 불리는 영·정조 시대의 정치 상황과 사도세자의 위상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이도훈 한양대(국문과) 교수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부흥을 꾀했던 영조의 고뇌어린 결정이라는 주장과 정쟁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이 맞서 있다”며 “이번 편지 글은 조선 중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문서 전문가인 김영복 문우서림 대표는 “새 고전문학 자료로 손색이 없다”며 “역사적으로도 영조와 사도세자, 홍씨 외척들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