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4일
3월 14일,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려는 듯, 엊그제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렸건만, 역시 봄은 봄인가 보다. '봄눈 녹듯 한다'는 말처럼 아파트 단지 길가에 많이 쌓였던 눈이 이삼일만에 다 녹아버리고, 양지쪽에 서있는 산수유가지에 벌써 노란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지금쯤 하동, 구례, 곡성 쪽에서는 매화꽃,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을 법도 하다.
모처럼 친구들과의 산행 약속이 없는 휴일이어서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광덕산행을 위해 혼자서 집을 나섰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산행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나이 들어가면서 겪는 일들을 부담 없이 주고받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가끔은 동행자 없이 사색을 즐기며 산을 오르기도 하고, 주변에 사찰이나 유적지가 있으면 찾아가서 선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마음에 낀 찌꺼기를 닦아내는데 필요한 세정제(洗淨劑가 될 수도 있어서 좋다.
광덕산(廣德山)은 충남 천안시 광덕면과 아산시 송악면에 걸쳐 위치하며, 정상 높이가 해발 699m로 옛날에는 태화산(泰華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신라 선덕여왕 때(서기 637년)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유서 깊은 광덕사(廣德寺)를 품에 안고 있는데, 필자가 찾고 싶어 했던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광덕사에 필자의 파조(派祖)이신 효령대군(孝寧大君)께서 사경(寫經:불경의 내용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꾸민 불경)하신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가 국가 보물제 1247호로 지정되어 보전되어 있으며, 그 유래비(由來碑) 또한 대웅전 단 아래 세워져 있다고 하여 가까이서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 두 번째는 운초(雲楚) 김부용(金芙容)의 묘가 부근에 있어서 찾아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전철을 타고 천안 역까지 가서, 다시 광덕사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천안 역전의 시내버스 정류소까지 가니, 한 시간에 두 번 다니는 600번 시내버스가 막 떠나버렸다. 30분을 더 서서 기다리기가 무료할 것 같아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광덕사 입구 주차장에 내리니 벌써 12시가 넘었다. 종점에 있는 유료 주차장 말고도 넓은 주차장이 종점에 도착하기 전 도로 양쪽에 있었는데, 승용차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니 오늘 산행 길도 번잡할 듯하다.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일주문을 향해 오른쪽 개울을 따라 걸어가니, 세워진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한 두 개의 비가 내 눈길을 끈다. 카메라를 들고 가 사진을 찍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지방의 특산물인 호도(胡桃)의 전래 사적비와 전래자인 고려시대의 유청신(柳淸臣) 공의 공적비다. 비 뒷면에 1290년 고려 충렬왕 때 공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묘목과 열매를 들여와,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열매는 자기 고향 집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에 호도나무가 전래된 시초라고 한다.
호도(胡桃)가 지금은 이 지방의 특산물이 되었고, 지역 주민들의 큰 소득원이 된 것에 대하여 그분의 공적을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에 비견할 만큼 크게 기려 후세에 전하기 위해 비를 세웠으리라.
출발 전에 인터넷에서 산행 지도를 미리 뽑아가기는 했지만, 안내표지판이 일주문 앞에서 반갑게 내게 다가온다. 산을 오르기 전에 안내표지판을 보고 오늘의 코스를 다시 정한다. 입구에서 1km 거리에 있는 부용 묘에 갔다, 되돌아와서 광덕사를 둘러보고, 장군바위 길을 택해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비교적 짧은 코스로 결정한 것은, 광덕사 입구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고, 오후 늦게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생각해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광덕사까지 약 500m 거리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산에 오를 사람들은 이미 다 올라갔는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한 편이다. 처음 찾아오는 사람도 누구나 쉽게 목적지를 찾을 수 있도록 표지판이 중간중간 잘 부착되어 있다.
광덕사로 들어가기 전에 우측으로 운초(雲楚) 김부용(金芙容)의 묘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있고, 오른쪽 길 가에 그녀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길 오른쪽에 천불전, 왼쪽에 최근에 세운 듯한 하얀 석탑이 있고, 건너 산 등성이에 산신각이 보인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길 옆 잔디광장에서는 '늘푸른산악회' 회원들이 시산제를 올리고 있었고, 그 후 부용 묘 쪽으로 가는 길에는 필자 외에 젊은 부부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천천히 올라가고 있을 뿐이다. 이 길에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니, 광덕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군바위 길로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갔다가 정상 길로 하산하거나, 반대로 정상 길로 올랐다가 장군바위 길로 하산하는 모양이다.
광덕사 입구 갈림길에서 20분쯤 걸려 부용묘를 찾으니 비는 세워져 있지만 생각보다 초라해 보였다. 년 전에 부안의 매창 묘를 찾아보았는데, 그곳은 묘도 아주 잘 조성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그녀의 시를 좋은 돌에 새겨 세워, '매창뜸'이라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 대조적이었다.
이 묘는 소설가 정비석(1911~1991년)씨가 1977년 ‘명기열전’을 쓸 당시, 실전된 부용 묘를 찾아내 봉분을 만들고 또 비문까지 직접 써서 한국 문인협회천안지부와 함께 비를 세웠다고 한다.
운초 김부용은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기녀 시인으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녀는 1812년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잃고, 숙부에게서 글을 배웠으나 불우한 운명은 그녀를 기생이 될 수밖에 없도록 했고, 그로 인해 김이양(金履陽)이라는 좋은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평양감사였던 김이양의 높은 인품을 흠모하고 존경하던 19살의 부용은 자기의 문학적인 재주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김이양에게 스스로 소실이 되기를 원했을 때, 77세의 평양감사는 나이 어린 부용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했는데,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 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 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남긴 많은 시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가 있는데, 이 시는 김이양이 호조판서로 승차하여 한양으로 떠나면서 그녀를 기적(妓籍)에서 빼내어 소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함께 한양까지 데려가지는 못하고 훗날을 기약했다. 이때 이별을 서러워하고 애타게 사모하는 마음을 탑을 쌓는 정성을 담아, 탑(塔)의 형태로 적어 편지로 보낸 시(詩)다. 이 시를 접한 김이양 대감은 부랴부랴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그녀를 불러들이게 되지만, 인간의 수명은 유한한 것을 어찌하랴. 김이양 대감이 90세에 세상을 떠나 고향 광덕산에 묻히자 그녀는 김이양 사후 17년 동안 수절하며 49세까지 살다 죽음에 이르러 유언으로 김대감의 산소에 같이 묻히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묘소 아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갔다.
그 후 1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1977년에 그녀의 묘소를 아는 이 없었지만, 소설가 정비석 씨에 의하여 그녀에 관한 여러 문헌과 이 지역 주민들의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참고로 그녀의 묘를 다시 찾아 봉분을 만들고 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이 무덤 역시 언젠가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옥같은 그녀의 시들은 더 오래 남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줄 것이다.
그녀의 무덤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왜 갑자기 정비석 씨가 쓴 수필의 한 대목이 생각났을까?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山情無恨)
운초 김부용의 보탑시 [부용상사곡]
別 (별)이별하옵니다.
思 (사)그립습니다.
路遠 (원로)길은 멀고
信遲 (신지)글월은 더디옵니다.
念在彼 (념재피)생각은 님께 있으나
身留玆 (신유자)몸은 이곳에 머뭅니다.
紗巾有淚 (사건유루)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雁書無期 (안서무기)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읍니다.
香閣鍾鳴夜 (향각종명야)향각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 밤
鍊亭月上時 (연정월상시)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때
依孤枕驚殘夢 (의고침경잔몽)쓸쓸한 베개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望歸雲 遠離 (망귀운원리)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픕니다.
日待佳期愁屈指 (일대가기추굴지)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晨開情札泣支 (신개정창읍지)턱을 괴고 우옵니다.
容貌憔悴把鏡下淚 (용모초췌파경하루)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歌聲鳴咽對人含悲 (가성명열대인함비)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픕니다.
銀刀斷弱腸非難事 (은도단약장비난사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珠履送遠眸更多疑 (주리송원모경다의)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조원망모원망랑하무신)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을 어찌 그리 신의가 없읍니까?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작불래금불래첩독견사)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것은 아닌가요?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저강성평육후편마과부)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장림변대해초승선욕도지)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호연단악연장천의유수능지)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읍니까?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일편향운초재야신녀지몽재모)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수성양생나루월농지정촉수)월하봉대에 피리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욕망난망강등부벽루가석홍안노)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아타깝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불사자불사작의모란봉매탄록발쇄)생각치 말자 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독수공방하루여우삼생가약영유변)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고처향규두수욕설백년정심자불이)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 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파준몽개죽창영화류소년총시무정객)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추옥침람향이송가무자막비가증아)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천리대인난대인난심의군자박정개여시)천리에사람기다리기어렵고 사람기다리기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삼시출문망출문망비재천망고회과하기)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읍니까?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유원관인대장부결의도강구녹촉하흔상대)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는 강을 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물사연약아녀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되어외로운 혼이 달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 광덕사로 들어갔다. 절 입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400년이라는 커다란 호도나무가 큰 가지를 계단 위로 뻗고 서 있고, 대웅전 마당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광덕사 3층 석탑(신라 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과, 필자가 찾고자 했던 국가 보물 제1247호로 지정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경(寫經)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 유래비(由來碑)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길 양편에 세워져 있었다. 사경을 직접 보고 사진으로도 담아 오고 싶었지만, 유래비와 보물지정기념비의 사진만 담아와 여기 옮겨 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쉽다.
효령대군(孝寧大君)께서 사경(寫經)하신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
보물 제1247호 유래비(寶物 第 一二四七號 由來碑)
부처님 말씀[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에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모님을 위하여 거듭 경전을 펴도록 하라. 그것이 참으로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능히 경전 한 권을 펴낸다면 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요, 천 권을 펴낸다면 천 부처님을 뵐 수 있는 것이요, 만 권을 펴낸다면 만 부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경전을 펴낸 공덕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이 언제나 항상 오셔서 지켜주시고, 그 부모님으로 하여금 천상에 태어나서 모든 쾌락을 누리게 하고 영원히 지옥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세조 10년 단오날이 지나 태화산의 서기가 광덕사에 서렸다. 따라서 광덕사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서광을 내며 분신하였다. 그때 효령 대군이 25 과를 모셔다가 세조 대왕과 자성왕비에게 드렸다. 가을에는(훈민정음 창제 반포 22년 후) 처음으로 효령 대군이 뜻을 세워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임금에게 품신하여 왕명으로 신미(信眉:법주사 복천암), 한계희(韓繼禧), 성임(成任), 강희맹(姜希孟), 윤찬(尹贊), 등을 시켜 한문 불경을 한글 불경으로 번역할 때 억불왕책 속에서 효령 대군이 총 감수자가 되어 교정하셨으니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한글 불경의 처음 정지가 광덕사다. 그 경 약칭 법화경(法華經)으로 오늘은 광덕사를 떠나 동국대학교와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보장된바 그 보물 두 개가 광덕사로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孝寧大君寫經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寶物指定記念碑
寶物第 一二四七號
2002년 10월 22일
大韓佛敎曹溪宗廣德寺 謹撰
廣德寺信徒會 合掌 書
社團法人淸權詞 謹 監
광덕사 대웅전을 나오니 벌써 오후 1시가 넘었다. 부지런히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곧바로 오른쪽 장군바위로 가는 길과, 왼쪽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 장군바위 쪽 길을 택해 올라가는데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날씨가 아침보다 흐려지더니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예보에 오후 늦게나 약간의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은근히 걱정이 되었으나 비는 이내 그쳐주어서 다행이다. 30분쯤 올라가니 산 중턱에 민가 몇 채가 있고, 박 씨 샘이 거기 있었다. 박 씨 샘물을 한 바가지 받아 마시고,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간다. 산은 육산이어서 촉감이 좋다.
오후 2시 23분 장군바위에 올라가니 갑자기 빗방울을 동반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정상까지 1.3km는 질척거리는 미끄러운 능선길이다. 오후 2시 50분 정상에 도착하니 발아래 펼쳐질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안갯속에 숨어버렸다. 막걸리를 팔던 상인도 보따리를 쌓는 것을 보니 찬 비바람 때문에 등산객들이 막걸리를 마시지 않는 모양이다. 사진 한 장을 찍고 서둘러 하산한다.
오후 3시 40분 다시 광덕사 주차장에 내려와, 20분을 더 기다려서야 천안역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었다. 오늘의 산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얻어 안고 가는 흐뭇한 기분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