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3일
54 산악회 오봉산 등반
2009년 11월 1일 08시 30분, 40명의 54산악회원들을 싣고 교대역을 출발한 버스가 원주에서 출발해 춘천 휴게소에서 합류하기로 한 김명환동문 부부까지 싣고, 10시 40분 배후령의 삼팔선 경계선에 도착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는데, 날씨 때문에 사진이 잘 나오리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만추(晩秋)에 낙엽을 재촉하던 비가 서울을 출발하기 전에 완전히 그쳤는가 했더니, 이곳은 아직도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지는 폼이 아무래도 다시 짓궂은 비가 더 올 것만 같다.
10시 45분, 기념촬영을 마치고 오늘의 목표인 오봉산을 향해 42명의 회원들이 발길을 내딛는다. 오전 중에 날씨가 맑아질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
초입부터 50분쯤은 가파른 산길, 가끔씩 로프를 붙잡고 올라가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비는 오지 않았다. 제1봉(나한봉)에 오르니 흐린 날씨에도 바라보이는 제2봉과 제3봉의 스카이라인이 차츰 선명해진다. 촉촉한 길 위에 떨어져 밢이는 낙엽들과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옷을 벗은 잡목들을 보면서 대자연속의 일부분이 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제2봉(관음봉) 정상에 앉아 바라보면 구름사이로 겹겹이 다가오는 첩첩한 산들과 소양호반의 잔잔한 모습이 마음을 느긋하게 해 준다. 이런 곳에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신 성철스님의 선답(禪答)의 말씀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제3봉(문수봉)으로 오르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은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런 산에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있다고 하더니 여기 부처님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제3봉(문수봉)에서 제4봉(보현봉)으로 오르는 길은 쇠줄을 붙잡고 올라가야 하는 힘든 코스가 있다. 땀을 흘리면서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이 많다. 보라! 이 소나무가 어떤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흙 한 줌 없는 이 바위 위에서 얼마나 오랜 풍상을 겪었겠는가? 제 잘못된 것에 환경 탓만 하는 사람들은 이 소나무에게 배움을 청할 일이다.
여기가 제4봉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내 젊은 시절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66년 7월 미국이 월남전에 깊이 개입하면서 우리 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되기 시작한 지 2년여, 나도 갑자기 특명을 받고 이곳에 있던 파월교육대를 혼자서 찾아가던 곳, 교육기간 동안 고향에 계시던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자주 올리던 편지의 주소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한 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열차에 실려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이동하는 동안 학생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면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생각들, 지금은 산 위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라도 남기고 싶은 추억의 땅이다. 날씨가 흐려서 겨우 윤곽만 나타나지만 교육장이 있던 지역은 대강 짐작이 간다.
12시 10분쯤 제5봉(비로봉)정상에 도착해서 10분쯤 휴식을 취하고 668봉 남쪽능선 삼거리를 거쳐 구멍바위를 지나고 다시 조심조심 밧줄을타고 내려오면서 암릉산행의 진수를 맛본다. 그러나 이런 밧줄이 없었던 시절 우리 선인들은 어떻게 이런 길을 올르내렸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쉬운 산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청평사의 극락보전에 내려왔다.
청평사에는 춘천시에서 나온 문화안내원이 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절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청평사에 오면서 유객(有客)이라는 제목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시가 생각나서 혹 그의 시비(詩碑)라도 있느냐고 물으니 비는 세워져 있지 않고, 매월당과 청평사에 관계되는 시를 자기가 프린트하여 지니고 있다며 보여준다. 늦은 봄철에 이곳에 와서 그 시를 감상하면 실감이 더할 것이라며 그가 보여주는 시(詩)가 바로 내가 생각했던 유객(有客)이라는 제목의 시다. 5백년도 훨씬 이전에 이곳에 나그네되어 우리가 넘어온 산을 지나갔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시를 여기 옮겨본다.
有客 (나그네) 김시습(1435-1493)
有客淸平寺 春山任意遊(유객청평사 춘산임의유) 나그네 청평사에서 봄산 경치를 즐기나니
鳥啼孤塔靜 花落小溪流(조제고탑정 화락소계류) 새 울음 탑 하나 고요하고 지는 꽃잎 흐르는 개울물
佳菜知時秀 香菌過雨柔(가채지시수 향균과우유) 때를 알아 나물도 자랐고 비 지난 버섯은 더욱 향기로워
行吟入仙洞 消我百年憂(행음입선동 소아백년우) 시 흥얼대며 신선골 들어서니 씻은 듯 사라지는 근심 걱정
누가 이런 전설을 만들었을까? 옛날 사람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구전(口傳)시켰지 않았을까? 우리나라도 아닌 먼 당나라의 공주와 상사뱀과 청평사에 얽힌 설화는 옛날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청평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길가 음식점에서 감자전에 막걸리를 한잔씩 하고 소양호의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가니 정원 90명인 유람선 두 척이 연신 등산객들을 실어 나르지만 기다리고 있는 줄은 길기만 하다.
흐리던 날씨가 조금 맑아지면서 단풍으로 물든 가을산 너머에 멀리 파란색 하늘이 맑고 잔잔한 호반에 옥색을 담아내고 있다.
오후 3시 30분 소양댐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낙오자 없이 42명 전원 탑승하고 샘밭막국수집으로 향한다. 식당에서 준비한 감자전, 돼지고기 수육을 안주로 마시는 막걸리의 맛에 사진 찍는 것도 잊어버렸다. 막국수의 맛도 서울에서 먹던 맛보다 훨씬 좋다고 맛있게들 먹는다. 오후 5시 돌아오는 버스에 오를 때까지 즐겁고 배부르게 먹고 마시며 나누는 가을에 접어든 사람들(?)의 이야기꽃은 만추(晩秋)의 계절이 피워내는 단풍보다 더 아름다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