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2 16:46:46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
오늘은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과 그의 아들, 며느리를 비롯한 그 가족들의 삶을 더듬기로 하고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곳들을 찾아나섰다.
東農 金嘉鎭의 大同團 宣言
음(陰)이 극에 달하면 양(陽)이 나타나고, 꽉 막힌 운수가 가면 형통한 운수가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하늘의 이치이며, 죽을 처지에 놓이면 살길을 찾고, 오랫동안 굴복하면 일어나려 하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감정이다.
세계개조론과 민족자결주의는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유라는 외침은 세상에 가득하다. 이에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 정부를 세웠는데, 저 완고한 일본은 시세의 추이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표범과 이리 같은 야만적인 습성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벌여 빈손의 민중을 총살하고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으니, 이것이 인류의 양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 민족의 충성과 열혈은 결코 이처럼 올바른 이치에 어긋나는 압박에 위축될 바가 아니요, 더욱더 정의와 인도로 용감히 나아갈 뿐이다. 만일 일본이 끝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따라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을 불사하고자 이에 선언하노라.
[원문]
陰極陽面하고 否往泰來는 天理之好運이며 處死求生하고 久屈思起는 人道之至情일새 世界改造民族自決之論은 高於天下하고 我國獨立我族自由之聲은 漲於宇內라 於是焉三月一日에 宣言獨立하고 四月十日에 建設政府러니 頑彼日本이 不顧時勢之推移하고 徒使豹狼之蠻性하야 大肆壓抑에 白手徒衆을 銃斃하고 城邑村落을 火燒하니 此가 人類良心에 堪爲할 바일가 吾族의 丹忠熱血은 決코 此非正理的壓迫에 減縮될 바가 아니오 益益히 正義人道로써 勇往邁進할 뿐이로다 萬一日本이 終是悔過가 無하면 吾族은 不得已 三月一日의 公約에 依하야 最後一人 最後一刻까지 最大의 誠意와 最大의 努力으로 血戰을 不辭코저 玆에 宣言하노라.
이번 서촌을 산책하면서 이곳에서 유독 장동(壯洞) 김 씨들의 흔적을 많이 보게 된다. 장동(壯洞) 김 씨는 신 안동(新 安洞) 김 씨의 분파이고, 이 일대의 지명이 옛날 장동(壯洞)이었고, 김계권(1410~1458)이 계유정난의 원종공신이 되어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 후손들이 대대로 여기에 집단적으로 살며 큰 세(勢)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이 신 안동(新 安洞) 김 씨에서 분파하여 장동(壯洞) 김 씨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장동 김 씨 하면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조선 순조 시대 이후 60년 세도정치로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기울게 한 가문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집안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난과 수모를 겪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김 상용, 김 상헌 형제가 그랬고, 그 후 숙종시대(肅宗時代) 환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고, 또 명예를 회복하고 영예를 누릴 수도 있을 때, 은둔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몸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들이 소위 6창으로 불리던 김 창집, 김 창협, 김 창흡, 김 창업, 김 창종, 김 창현 등 6형제도 있었는가 하면, 비록 개혁에는 실패했지만, 부패한 정부를 바로잡아 외세에 억눌리지 않는 자주독립적인 나라를 꿈꾸었던 갑신정변의 주역 김 옥균 같은 사람도 있었다. 또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김 좌진, 김 가진 등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장동 김 씨 전체를 [60년 세도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혔던 장동 김 씨]로만 보는 것은 장동 김 씨 가문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또한 하게 된다.
무릇 한 사람의 짧은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장점과 단점이 수없이 겹쳐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수백 년을 이어온 한 가문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찌 훌륭한 인물들로만 이어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한 인물이나 어떤 한 시대에도 반드시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를 평가할 때는 양쪽을 함께 보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은 1846년 예조판서 김응균(金應均)의 서자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싸우다 강화성이 함락되자 문루에서 자폭한 김상용이 그의 11대 조이다. 적서차별법(嫡庶差別法)이 철폐되기 전에는 과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음직(蔭職)으로 규장각 참서관, 사헌부 감찰, 장례원 주부, 인천항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교업무 주사 등을 지내다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법(嫡庶差別法)이 철폐되자, 1886년 4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제수받았고, 59세에 종일품 대신의 반열에 올라 상공, 법무대신을 역임했다. 고종에게 러시아와 협력해서 청나라를 배척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쟁취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때문에 청의 원세개(袁世凱)가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를 보내게 했다. 그러나 고종은 곧바로 풀어주고 주일본 공사 민영준의 참사관으로 동경으로 보냈다. 그 후 민영준의 후임으로 주일 공사가 되었다.
1891년 귀국하여 안동부사가 되었고,
1894년 외무협판이 되었고,
1896년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여 독립협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만민공동회 발족에 가담하였다.
1897년 황해도 관찰사.
1902년 지 석영, 이 종일과 국문 학교(國文學校)를 설립하여 한글교육에 힘썼다.
1904년 상공부 대신과 법무 대신을 역임하고 창덕궁 후원장이 되어 오 세창과 함께 후원을 중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충남 관찰사로 좌천되다.
1907년 관직을 사직하였다.
1908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제2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8월 22일 을사보호조약이 조인되고,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게 되었으나, 연금을 거부하고 은사금은 즉시 반납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최 익환(崔益煥1889~1959), 전 협(全協1878~1927), 엄 경섭 등과 대동단 결성, 총재로 추대되었다.
최 익환, 권 태석, 이 능우, 엄 경섭, 김 영철 등이 자금을 지원하여 인쇄시설을 갖추고 선전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의친왕 이 강(李堈)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시켜 제2독립선언을 발표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여론을 촉진시킬 계획을 세웠다. 전 협과 함께 상해로 먼저 가서 국무총리 안 창호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1818년 11월 9일 한 기동, 정 남용, 이 을규, 송 세호 등이 의친왕과 수색 역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월 12일 만주 안동역(지금의 단동)에 도착했으나, 의친왕의 탈출을 감지한 일경에 의해 의친왕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의친왕의 망명이 실패한 후 김 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김 가진을 회유하기 위해 상해로 밀정을 보내 그를 회유하여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향년 77세로 상해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그가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아들 김 의한(金毅漢1900~1964)
190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19년 아버지 동농 김 가진(東農 金嘉鎭)이 총재였던 비밀결사 조선민족 대동단(朝鮮民族 大同團)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1928년 상하이에 있던 중국본부 한인 청년 동맹(中國本部 韓人 靑年同盟)의 재정위원을 맡았으며,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전할 때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김구, 안공근 등과 애국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했다. 1939년 임시정부 비서처 비서와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며 특히 충칭에서 방송을 통해 국내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을 맡았다.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이 한국 독립당, 조선민주혁명당 등 각 정당 및 무소속 인사들을 망라하여 명실공히 전 민족적인 의정원을 구성할 때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위원과 외교위원을 겸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충칭으로 이전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활동에 공식적으로 동의하자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 선전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독립운동사 자료 수집에 힘썼고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재선임되었다.
1948년 4월 한독당 대표로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1964년 평양에서 별세했다. 국가보훈처에서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며느리 鄭靖和(1900~1991)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 일 것이다.”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안주인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선생은 망명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 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성재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었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생활은 선생이 있음으로써 위안이 되었고, 나아가 27년 간이라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임시정부의 역사도 선생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임시정부의 살림사리를 꾸려가기 위해서 일경들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6회에 걸친 독립자금 모금을 위한 국내 잠입과 모금활동은 임정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선생의 활동 내역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911년 11세에 동갑내기 김 의한(金 毅漢1900~1964)과 혼인하였다.
1919년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해로 망명.
1920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상해로 갔다.
1920년 1월 보름 만에 상해에 도착하자 남편과 상봉하기도 전에 그 해 3월 시아버지와 임시정부 법무총장으로 있던 신규식의 지시에 따라 독립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밀파되어 당시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 있던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의 집을 거점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4월 초 무사히 상해에 도착, 1차 임무를 완수.
1921년 늦은 봄 두 번째 임무를 위해 국내 잠입 충남 예산의 친정 집에서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자금을 모았고, 개성에 살던 김규식의 이질(姨姪) 서재현을 대동하고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여 2차 임무를 완수.
1922년 6월 세 번째 임무를 맡고 국내에 잠입하던 중 압록강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 신분이 탄로 나서 서울 종로경찰서에 압송되어 조사받고 풀려 나왔다. 그때 시아버지의 부음을 받았다. 1922년 7월 4일이었다. 그 해 7월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시동생 김용한을 대동, 다시 상해로 갔다.
1932년 10월 네 번째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 잠입,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1923년 7월 상해로 귀환한다.
1924년 12월 다섯 번째 임무를 맡고 국내 잠입 1925년 6월까지 예산 친정 집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해로 복귀.
1929년 7월 여섯 번째 국내 잠입. 1년 6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자금을 모아 1931년 초 다시 상해로 가면서 우리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상해로 복귀한다.
1946년 5월 9일 상해를 출발하여 3일 만에 해방된 조국에 도착한다.
1982년 국가보훈처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임시정부의 '대표손자' 김자동(1928~)
1928년 상하이 임정청사 인근 아이런 리에서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의한 선생과 모친 정정화 여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 임정 요인 아래서 성장했다. 임정의 ‘대표 손자’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1946년 귀국해 서울대 법학과를 거쳐 조선일보와 민족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1980년대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을 번역했다. 1987년 개정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명기되자 그 의의를 선양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임정을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다.
차남 김용환의 아들 김석동
광복군에서 활동한 동농 차남 김용한의 아들 김석동. 동농의 둘째 아들인 김용한은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1928년 자살했고 부인도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 김석동은 중국으로 와서 김의한 일가와 함께 살았다.
1939년 2월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유주에서 창설될 때 김석동은 최연소 대원이었다. 이 조직은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거쳐 광복군으로 발전했다. 김석동은 해방 후 귀국할 때까지 줄곧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건국훈장 4등급인 애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