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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행기 (阿嵯山)

2006년 8월 20일

아차산(阿嵯山) 그 역사의 현장을 가다. 

오늘은 친구의 권유로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아차산에 오르기로 했다. 서울시내에 위치하고 있어서, 차를 타고 지나면서 자주 바라보던 산,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쉽게 오를 수 있었겠지만, 한 번도 올라보지 못했던 곳이다. 워커힐 뒤쪽 광장동에서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 아차산(285m)만 돌아 내려오기는 너무 단조롭고 코스가 짧으니, 망우리 공동묘지를 둘러보고, 용마봉(348m)을 거쳐, 아차산성을 돌아 내려오는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코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상봉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교문리로 넘어가는 도로를 건너 망우리 우림 시장에서 과일과 떡 등 간단히 산에서 먹을 것을 사서 배낭에 넣고, 공동묘지로 올라가는 좁은 길에 들어선 것이 9시 30분이었다. 넓은 길을 따라 20분가량 올라가니 운동시설이 잘 갖추어지고 청결하게 관리된 약수터가 있다. 쉬면서 수밀도 한 개씩을 먹고, 시원한 약수 한 바가지를 마시니, 그 상쾌한 맛에 다시 힘이 솟는다.

 

올라가면서 묘지들을 지날 때, 친구는 망우리(忘憂里)의 명칭에 대한 유래(李太祖와 東九陵에 관한)를 이야기했지만, 나는 현대적으로 억지 해석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망우리라는 지명이 붙여질 당시에는 아마도 공동묘지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망우리라는 지명이 생긴 이후에 공동묘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근심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곳이란 죽은 사람만이 가는 곳이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근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일이니, 살아가는 동안에 갖게 되는 저마다의 근심은 모두가 기꺼이 안고 가야 한다고 말하다가, 문득 自嘲의 웃음을 숨길 수 없었지만, 뒤따라 오는 친구는 나의 그 미묘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날들을 외부로부터 오는 근심거리에 괴로워하며, 또 스스로 만든 잘못에 不眠과 悔恨으로 怏怏不樂하는 헛된 세월을 살아왔던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지나간 잘못은 뒷날의 교훈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이곳은 35년쯤 전에 한 친구의 부친을 장사 지냈던 기억은 있으되, 그 장소를 전혀 생각해 낼 수가 없고, 그때 내려오면서 보았던 애국지사들과  몇몇 문인들의 묘소가 있었던 기억이 있지만, 그 장소 또한 알 수가 없다고 말했더니, 친구는 조금만 더 올라가면 기억이 날 것이라 했다. 

 

친구의 말대로 얼마쯤 올라가니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왔고,  좁은 등산로를 따라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용마산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동안 죽산 조봉암선생, 만해 한용운선생, 송촌 지석영선생 등 많은 우국지사와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그때보다 비교적 잘 정리되어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독립된 국가의 번영과 백성들의 한을 씻어주기 위하여 근심과 걱정으로 살다 가신 그분들의 영혼은 지금 이곳 忘憂里에서 모든 근심을 잊고 편히 쉬고 계시기를 빌었다.

 

친구부친의 장례를 모시던 그때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민둥산에 비포장 도로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도로가 포장되어 있는가 하면 터널을 이루고 있는 가로수며,    우거진 주변의 산들까지 많은 시민들의 훌륭한 산책,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니 반가웠다.

 

다시 오솔길을 돌아 용마산을 오르는 등산로를 찾으니 북으로 미사리와 북한강 양평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용마봉 정상에 오르기 전에 벌써 11시 30분이 넘었다. 竹山 선생과 萬海 선생님의 묘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탓인가! 용마봉으로 가는 나무계단 아래서 5분간 휴식, 다시 계단을 오르고 헬기장을 지나 작은 봉우리를 넘어 정상에 오르니, 348미터의 높지 않은 산 치고는, 서울시내를 거의 다 볼 수 있을 만큼 전망이 시원하다.  서울 북부를 휘어 안고 흐르는 한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한다. 3,40명쯤 되는 등산객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각자 준비해 온 점심을 먹는다. 우리도 간단한 점심을 때웠다. 마음에 점 하나를 찍는 것이 점심이라 하지 않던가?

 

점심 후 12시 30분, 아차산을 향해 출발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어 등산로가 복잡하다. 아차산정에 있는 유적 발굴에 대하여 설명한 표지를 보면서, 그 옛날 1,500여 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여기에 바쳤을까  생각하게 된다. 

 

백제가 강성했던 근초고왕 때에는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기까지 하였지만, 그 후 고구려는 장수왕 때 그 한을 풀기 위하여 이곳까지 침공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아차산성 아래서 죽이고 많은 땅을 차지하였다가, 다시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을 빼앗으매,  고구려 평원왕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의 사위 온달장군을 보내 이곳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게 한 곳이라고 하니, 이곳이야 말로 6.25 때 많은 희생자를 낸 백마고지와 같은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설에는 온달장군이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온달산성을 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된 아단성(阿旦城)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 아단성은 396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탈취한 58성 700촌 가운데 하나인데, 후에 실지회복을 위하여 출정한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사장소라는 전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록에서 이 阿旦城은 아차산성이라는 주장이 있다.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하니 이 기록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은 철책으로 보호되고 있고, 소멸된 곳은 다시 복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표시되어 있으나 복원공사가 언제쯤 시작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원래의 산성은 백제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산성 안에서 발굴된 토기와 철기, 군영 터는 고구려의 유물인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고구려가 이곳을 백제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기간이 제일 오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군영 터의 기초공사를 보면 오히려 현대의 6,70년대 우리가 군대 생활을 할 때 짓던 임시 막사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튼튼한 영구적인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기 위하여 세운 작전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개로왕이 바둑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안 장수왕이 바둑을 잘 두는 도림(道琳)이라는 승려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왕의 신임을 얻게 한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한편,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 시켜놓고 침공을 하였다고 한다.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왕이 바둑을 두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호화로운 궁궐을 짓는 데다 국력을 소진시켜, 적국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 결국 자기는 포로가 되어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 타산지석의 본보기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아차산 자연생태공원에 도착하였다. 정확하게 4시간 30분이 소요된 오후 2시다. 망우리의 공동묘지에서, 용마산 정상에서, 또 아차산성에서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던 것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