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21일 금요일
망설이던 감악산행을 결행하기로 마음먹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날씨부터 점검했다. 며칠 동안을 무섭게 쏟아붓던 장맛비가 어제부터 그 세력이 조금씩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일어나자마자 창 밖을 내다보니, 오늘 아침에는 細雨로 변한 비가,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아스팔트 길 위를 겨우 적실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약해진 것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지만, 아침 7시 반쯤 집을 나서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곳곳에서 수해의 참상이 심각하고, 특히 강원도 쪽에서는 이번 장마에 폭우와 산사태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곳에서 집과 전답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가 하면 도로가 유실되고, 전기와 수도마저 끊겨 피해 주민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때에 나만이 한가하게 산행을 하는 것 같아 망설임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 오래전부터 경기 5악으로 불리는 화악산, 운악산, 감악산, 송악산, 그리고 관악산을 모두 답사해 보려고 했었다. 관악산은 이웃집 드나들 듯 자주 올랐지만, 송악산은 아직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언젠가는 가볼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오늘은 감악산이고, 운악산과 화악산은 다음차례다.
불광동 서부 버스터미널에서 坡州郡 積城面까지 3,600원 받는 30번 버스가 8시 5분에 출발하였다. 가늘게 내리던 비도 차츰 그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中部地方은 오전부터 차츰 맑아지겠다는 예보다. 週中이어서 인지 별로 많지 않은 승객을 태우고 한가한 도로를 천천히 달리던 버스가 1시간 30분 만에 馬智里 종점에 닿았다. 다시 850원을 내고 이곳에서 의정부까지 왕래하는 25번 버스를 갈아타고 10분쯤 가다가 梵輪寺 입구에서 내린 것이 9시 50분쯤 되었다.
도로 가에 새워진 입간판에서 확인하고 결정한 오늘의 등산코스는 운계폭포, - 범륜사, - 만남의 숲에서 계곡을 따라 임꺽정봉, 장군봉을 지나 감악산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까치봉 쪽으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범륜사 입구에서 입장료 1천 원을 내고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폭포는 보이지 않고 10여 분만에 범륜사가 나타났다. 운계폭포를 놓친 것이다. 폭포는 계곡 쪽 숲길을 따라가야 만날 수 있었는데 큰길을 따라가다 보니 그만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범륜사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감악산에는 원래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소실되고 1970년에 옛 운계사 터에 새로 건립한 것이 지금의 범륜사라고 한다. 아담한 규모의 대웅전과, 강원, 요사채 등이 있고, 조선시대의 탑재들을 조립하여 근래에 조성한 삼층 석탑이 있었으며, 지상에 큰 돌을 파 만들어 놓은 우물이 인상적이었다. 산속 깨끗한 우물에서 끌어 왔음직한 P.V.C 파이프를 연결해 큰 돌우물에 물이 고이도록 했는데, 호스에 연결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을 한 종기 받아 마시니 지하수 못지않게 시원하다. 강원 옆 큰 느티나무에는 마음씨 고운 스님이 매달아 놓았는지 그네가 매달려 있고, 그 곁에는 오고 가는 나그네들을 위하여 앉아 쉬기에 알맞은 편안한 나무 의자가 고정되어 있다. 쉬면서 땀도 식힐 겸, 염치불고하고 그 그네 위에 올라앉아 한참을 흔들거리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한적한 범륜사에서의 휴식을 마치고,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장마에 씻겨나간 돌길을 20분쯤 따라 올라가니 만남의 숲 쉼터, 잠시 숨을 돌리고 또다시 1시간을 강행군하여 바위 봉우리인 임꺽정봉을 거처 장군봉에 오르니, 흐리던 날씨도 개이고 쨍쨍한 햇살아래 남쪽으로 파주 일대가 시원하게 눈 아래 펼쳐져 보인다.
임꺽정봉 근처에 설인귀 굴이라고도 하고 혹은 임꺽정 굴이라고도 하는 굴이 있다고 하여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굴은 보지 못하고 북쪽 수십 길 斷崖를 내려다보면서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머리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바위에 올라앉아 땀을 식히고, 다시 15분 정도 더 걸어 마침내 감악산 정상에 올랐다. 12시 20분 해발 675미터 정상이다. 북쪽은 연천군, 동쪽은 양주시, 그리고 남서쪽은 파주군. 멀리 북쪽에 송악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임진강 물줄기가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안고 흐른다. 정상의 북쪽 기슭에 철조망을 두르고 그 안에 군 초소에서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고, 몇몇 군인들이 철조망 밖에서 제초작업을 하고 있었다.
넓은 헬리콥터장 한쪽에 새워진 비석 하나, 이름하여 몰자비, 비뚤 대왕비, 진흥왕비, 진평왕비, 설인귀비 등 불리는 이름도 많고 전설과 추측이 많아 아직도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는 비석이다. 글자가 없는 비를 두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글자가 없어졌다고도 말하고 원래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 후자가 맞는 추측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광개토대왕의 비에도 글자가 남아있는데, 진흥왕의 비라면 거의 같은 시기이고, 진평왕이나 설인귀의 비라면 광개토대왕의 碑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에 새워진 비의 비문인데 한 글자도 없이 지워졌다고 생각하기엔(물론 비의 석질이나 새긴 글자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좀 무리인 것 같다.
이 지역에는 이 비석과 설인귀에 대한 전설과 기록이 특히 많다. 열거해 보면 구당서(舊唐書)’ 설인귀 열전(列傳)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세민이 설인귀에게 “짐(朕)은 요동(遼東)을 얻은 것에 기뻐하지 않고, 경을 얻은 것에 기뻐한다 (朕不喜得遼東, 喜得卿也)”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한쪽 눈을 잃고 패주한 주제에 “요동을 얻었다”는 말은 허세에 불과하지만 이후 설인귀는 중국인의 영웅이 된다. 서기 670년에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과 신강성(新疆省) 일대를 공격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중국인들이 설인귀를 좋아하는 근본 이유는 그가 일개 농민 출신으로 대장군까지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설인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던 인물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적성현(積城縣) 조는 감악산(紺嶽山)을 설명하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사람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제사 지내어 산신(山神)을 삼았다’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또 ‘신 증동국여지승람’ 적성현 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대한 배경은 ‘한국지명총람’ 파주 조에 실려 있다. 설인귀는 적성 부근에서 태어나 감악산에서 무술을 익혔는데, 당나라에 가서 모국인 고구려를 쳤다. 그리고 후에 이를 자책해 죽은 뒤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 우리나라를 도왔다는 것이다.
황현(黃玹)도 ‘매천야록’에서 “전설에 의하면 적성현 설마치(薛馬峙)는 설인귀가 말을 달리던 곳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설인귀를 고구려 출신으로 만들고 싶었던 후세인들의 창작일 것이다.
그런데 파주 적성면의 감악산 아랫마을에 전해 오는 얘기는 훨씬 구체적이다. 아예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고 한다. 임진강가인 적성면 주월리의 백옥봉 아래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율포리 임진강가의 용마굴에서 뛰쳐나온 지혜로운 말을 타고,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질하다 캐낸 큰 궤짝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어 쓰고, 눈 쌓인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가 지혜로운 말을 타고 다닌 동네는 ‘마지리’(馬智里), 눈 위를 말 타고 달렸다는 동네는 ‘설마리’(雪馬里), 무술을 연마한 동네는 ‘무건리’(武建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설인귀가 어떻게 당나라 장수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는 을지문덕의 막하에 있다가 미움을 산 나머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범한 보장왕 4년(645년)에 당나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나당 연합군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되고, 도호부가 요동성으로 철수한 뒤로는 평양군공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마을 사람들이 설인귀 추모 사적비를 감악산 꼭대기에 세웠고, 훗날 산신으로까지 모셔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설인귀비에 얽힌 전설의 전말이다.
허무맹랑하게 여겨지지만 앞뒤 구색을 맞춰놓았고, 동네 이름까지 또렷이 남아있으니 그럴싸해 보인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측천무후에게 머리를 조아려 백제 원정군을 요청하자 그녀가 소정방과 같이 출정하게 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공로를 신라인들이 고맙게 여겨 지금의 범륜사 터에 감악사를 짓고 감악산 산신으로 삼아, 碑도 새워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후일 비가 쓸어져 사람들이 방치하자 마을에 나쁜 일이 자꾸 일어나 이 비를 다시 감악산 정상에 새우니 나쁜 일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원래는 갓이 없던 비를 나중에 갓을 만들어 씌웠다고 한다.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며 간단한 점심을 먹는 동안 젊은 여성 등산객 5,6명이 올라와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까치봉 쪽 하산 길을 택해 내려오는데 철조망 옆으로 산딸기가 익어 붉다. 몇 알 따서 입에 넣고 씹어보니 옛날 어린 시절 달고 맛이 있던 그 맛이 아니다. 계곡에 내려와 흐르는 물에서 세수를 하고 또 洗足을 하니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다.
2시가 넘어 다시 범륜사 입구에 내려와서 버스를 기다리니 차가 쉬 올 것 같지 않아 천천히 걸었다. 아무튼 설인귀가 唐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고구려에서 태어난 唐 나라 장수 어었든지 간에 지금 중국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켜세워 자기들의 국익에 활용하고 있다. 중국의 서북지방에 그의 동상을 새워놓고 서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로 역사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들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그의 동상을 압록강 건너에 새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馬智里 버스 종점까지 걸어오는 1시간 30분가량을 이곳의 전설과 지나간 역사와 지금 우리에게 밀려오는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薛馬峙, 馬智里, 武建里라는 지명이 영웅이 된 한 인간과 연관되어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억지 역사 만들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중에도 서울행 버스는 장마가 개인 후텁지근한 날씨에 시원하게 에어컨을 켜고 馬智里를 4시 10분에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