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 : 2007년 3월 25일
10시–舍那寺 주차장 출발-계곡길-12시–백운봉 정상 도착-13시30분–함왕봉 헬기장에서 점심- 5시30분–함왕 성지를 거쳐 사나사 도착.
서울에서 양평 쪽으로 자동차로 가다 보면 용문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자락에 산봉우리가 아주 뾰쪽한 삿갓처럼 생긴 산 하나가 보인다. 이름하여 백운봉이다. 젊었을 때 軍隊生活의 초년병 시절을 양평에서 보냈고, 그 후 직장이 군부대 지원 업무와 관계가 있어서 용문산 정상을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었건만, 당시에는 이 산에 대하여는 별 관심 없이 무심하게 지나다니곤 했었는데, 요즘 산행을 자주 하다 보니 호기심이 생겨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54 산악회의 2월 정기 산행 중 이야기 끝에 이 白雲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구정모 회장이 등정 경험이 있다고 했고, 김명환 동문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 번쯤 올라보겠다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여 셋이서 백운봉행 날자를 오늘로 잡았었다.
아침 9시가 다 되어서 서울을 빠져나와 양평대교를 건너 옥천면 소재지를 지나 용천 2리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산행 기점인 舍那寺를 찾은 것이 10시쯤이다. 길 가에 차를 세워두고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절의 내력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이 절은 신라 경명왕 7년 (923)에 고승인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하였고,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보우가 140여 칸 규모로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절을 다시 세웠으나 순종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다시 불태워졌고, 또 6.25 한국전 때 소실 되기도 하였다니 이 절 또한 우리 민족의 험난했던 수난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겠다. 지금은 다른 사찰에 비하여 그 규모가 보잘것 없이 작아 보였지만 유구한 역사를 안고 이어온 전통으로 따진다면 다른 어느 큰 사찰에 뒤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道 유형문화재 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과 도 유형문화재 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이를 증명하듯 고색창연한 자태를 지키고 있다.
절 뒤쪽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오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어느 길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 우측 계곡 물길을 건너 올라갔다. 백운봉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개울을 건너니 산 자락에 山神祭를 지내고 있는 10여 명의 산악인들이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능선까지 가는 동안 우리 세 사람뿐 다른 등산객이 아무도 없는 한가한 길이다. 능선에서 물과 과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니 길은 험해지고 등산객들도 많아진다. 내려오는 사람들과 서로 길을 양보하며 암봉인 정상에 오르는 20분 정도 걸리는 험로는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산에 오르는 맛을 제공해 준다. 12시 정각에 정상에 섰다.
정상에는 해발 940 미터를 알리는 백운봉 정상 표석이 세워져 있고, 백두산에서 옮겨왔다는 통일암이 받침대 위에 6천만 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기원과 함께 자리해 있다. 뒤로 함왕봉(947m)과 용문산(1,157m) 정상이 보인다. 땀을 식히고 다시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다가 갈림길에서 함왕봉을 향해 다시 오른다. 이 길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1시간을 조금 넘게 걷다 보니 함왕봉을 넘어 헬기장에 도착한다.
오후 1시 30분 이곳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는다. 산에서의 점심에 빠질 수 없는 보약(燒酒) 한 병을 김 교수와 나 두 사람이 나누어 마시고, 구 회장은 그 맛을 모른 체 옆에서 구경만 한다. 하기야 오늘 산행에 김 교수가 차를 갖고 나오기로 했던 것을 김 교수에게 이 순간의 즐거움을 갖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차를 가지고 나오겠다고까지 마음을 쓴 구 회장 이 아닌가? 보약(?)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보약(?)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배려하는 구 회장의 마음 씀이 고마울 따름이다. 점심과 보약 보충 덕분에 피로도 풀리고 다리에 힘도 다시 올라서 가뿐한 몸으로 하산을 한다. 여기저기에서 산성의 흔적을 보면서 내려오니 함왕성 유적지를 알리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후 삼국시대의 이 지역 호족 세력이었던 함규(咸規) 장군은 사나사(舍那寺) 남쪽의 함왕성의 성주였는데, 견훤과 궁예의 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협조하지 않다가 나중에 왕건의 편에 가담함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들 함 씨 세력이 쌓았다는 함공성 또는 함 씨 대왕성은 2만 9천058척이었으나, 지금은 정문과 그 좌우로 이어지는 석축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몽고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도 있다 하니 어느 설이 정확한 것인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함왕성 유적지를 지나 내려오다 보니 3시 30분쯤 舍那寺 뒤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올라갈 때 오른편으로 접어들었던 그 갈림길이다. 흐르는 맑은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세수까지 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정결해진 듯 가뿐하다.
옥천 마을에 내려와 옛날 생각이 나서 냉면을 맛있게 하던 집을 찾았으나, 그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로 남아 있고, 그 후손이 양평 가는 대로변에 큰 건물을 지어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옥천에 냉면 하는 집이 초가집이던 그 한 집뿐이었는데, 지금은 마을에 여기저기 냉면 집 간판이 많고 집들도 모두 근사해졌다.
삼십 몇년의 세월은 세상을 많이도 변하게 하였다. 이러한 발전적인 변화가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경우에 따라 아쉬움을 남게도 한다. 나의 이기심 때문일까? 옛날 그 황해옥에서 주방장을 했다는 사람이 새로 차렸다는 옆 식당에서 냉면을 시켜 먹으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내가 지금의 아내와 연애시절에 그 식당에 가끔 들리던 당시에는 주방장이 따로 있지 않았고, 황해도에서 내려오셨다는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냉면을 뽑으시고 할머니가 정갈한 김치를 제공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식당이 잘 되어 주방장까지 따로 두고 그 좁은 집에서 장사를 하셨던 모양이다. 세월은 그분들도 데려갔고 팔팔하던 20대의 나를 그때 그 할아버지만큼의 늙은이로 만들어 놓았다. 주말의 정체될 도로가 걱정이 되어 서둘러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