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모(具楨謨)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통예절교육 1기수료
<이름(名)>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어 육체는 땅속에 묻혀 썩어가고 혼은 하늘로 날아가 그 형체를 볼 수도 없지만, 후세에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의 이름뿐이다. 이름은, 좋은 의미로 남든 나쁜 의미로 남든,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기억되고 평가되는 잣대가 되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存在) 가치(價値)이며 의의(意義)를 뜻한다. 이름이 주어짐으로써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의미를 얻게 되고, 의미를 얻음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이름을 얻음으로써 이름이 뜻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이름도 없는 노비나 천인들은 의미 없이 불리어지는 별명으로 특별한 꿈이 없이 그냥 한평생이 스러져 간다. 우리는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도 그 개에게 알맞은 의미를 붙여서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나 그 개의 이름은 우리 집에서만 불리어질 뿐,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저 집 개 일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름은 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불리어지는 유(有)의미한 개체요 존재로서의 이름이며, 단순한 호칭의 수단만이 아니라 바로 목적 그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름’이란 단어는 ‘이르다(謂)’ 와 그를 ~라고 이른다(부른다: 稱)’에서 나온 단어라고 알려지듯, 어떤 사물 또는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단어가 사람에게는 ‘이름’이란 고유명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字)와 호(號)>
보통 사람은 모두 이름(名)을 갖는다. 성명(姓名)이라 할 때 성은 조상으로부터 부여 받는 성씨이고, 명(名)은 그 자신에게만 붙여지는 이름이다. 지금은 이름이 많은 사람에게 불리어지는 것이 좋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이름은 소중하고도 귀중한 것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15세 즈음 관례(冠禮)를 올릴 때 누구나 부담 없이 부를 수 있도록 ‘자(字)’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자(字)는 동년배나 그 이하의 사람들에게 호칭으로 사용된다. 본명(本名)은 자신이 스승이나 부모에게, 또 스승이나 부모가 제자나 자식을 부를 때나 쓸 뿐, 그 이외에는 대부분 자(字)를 쓴다. 공자(孔子)도 제자 안연(顔淵)을 부를 때 회(回)라고 하고, 자공(子貢)을 부를 때 사(賜)라고 자를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옛 선비들도 서로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자(字) 또는 호(號)를 쓰고 있다.
‘호(號)’는 보다 더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사대부(士大夫), 선비 등 많은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쓰인다. 호(號)는 대체로 거처하는 곳이나, 고향 등 지명에서 따오거나, 자신이 지향(志向)하는 뜻, 자신이 존경하는 선현의 호(號) 등에서 한 글자를 취하여 짓기도 한다. 스승이 지어주기도 하고 친구가 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호(號)를 지어 쓰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호(號)는 여러 개를 갖고 형편에 따라 구분해서 쓰기도 한다. 퇴계(退溪) 이황, 율곡(栗谷) 이이, 화담(花潭) 서경덕은 자신이 학문을 닦거나 가르친 곳, 고향 등 지명(地名)을 근거로 사용된 호(號)이고, 추사(秋史) 김정희는 추사 이외에도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선객(仙客), 불노(佛奴), 노과(老果), 과농(果農), 방외도인(方外道人) 등, 때에 따라 호를 지어 씀으로 그 수가 엄청나게 많다. 추사(秋史)란 ‘추기(秋氣)와 같이 맑은 품격에 의리(義理)를 따른다.’는 뜻이다. 또 자신이 공부하는 집을 호(號)로 하여 oo재(齋), oo당(堂), oo암(庵), oo헌(軒) 등도 있고, oo거사(居士), oo도인(道人), oo노인(老人), oo옹(翁) 등도 많이 사용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서술 식의 10자 나 되는 호도 있다. 호는 대부분 두 글자가 가장 많고, 세 글자 네 글자 정도를 주로 사용한다.
<시호(諡號)>
국가에 공헌이 있거나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사대부가 죽게 되면, 그의 공(功)을 찬양하고, 후세에 귀감이 되는 인물임을 인정하여 ‘시호(諡號)를 내려준다.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문망(文望)있는 인물이 죽게 되면 그 후손 또는 제자 등이 시호를 받을 만한 업적이 있음을 밝히는 행장(行狀)을 봉상시(奉常寺)에 올린다. 봉상시가 그 행적을 조사한 후 예비 명칭 세 가지를 정한 시호망기(諡號望記)를 작성, 홍문관을 비롯한 관련 관청이 토의 심사하여 시호 글자를 정하여 이조(吏曹)에 넘기는데 이를 시장(諡狀)이라고 한다. 이조(吏曹)는 국왕의 제가를 얻어 사헌부(司憲府)에 넘기고 사헌부가 사간원(司諫院) 등 여러 관원의 합의로 이 시호가 적격하다는 ‘서경(書經)’ 절차(大司憲의 手決)를 거쳐 시호가 확정되고, 시호를 내리는 교지(敎旨)를 전달한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치고 국왕의 제가 후에도 다시 검토하여 확정하는 등 엄격한 절차를 거쳐 시호를 내리는 것은 이 시호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시호를 받는 당사자(當事者)는 물론 그 후손들에게도 크나큰 명예(名譽)가 되고 불천위(不遷位)의 조상(祖上)이 되는 것이다.
그 시호의 자의(字意) 또한 중시하여 충(忠)은 위신봉상(危身奉上: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의 뜻이고, 무(武)는 절충어모(折衝禦侮:쳐들어오는 적을 창 끝으로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뜻한다. 적을 무찔러 전란을 평정함 즉, 승적극란(勝敵克亂)은 장(壯)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리를 굳게 지킴, 즉 포덕집의(布德執義)를 목(穆)이라 한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도 정해져 있는데, 때에 따라 그 수(數)가 달랐다. 세종(世宗) 때는 194字였는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시법(諡法)에 사용자가 194자였다. 그러나 그 뒤로 가며 수가 늘어나 300여字까지 되었으나 실제 주로 사용하는 글자는 120字 정도였다. 文, 忠, 貞, 恭, 襄, 靖, 良, 孝, 翼, 章, 壯, 昭, 毅, 武, 康, 肅, 惠, 敬, 仁, 烈, 端, 節 등이 많이 쓰인다. 그 글자의 뜻도 좋은 의미를 갖는 여러 가지로 풀이되어 사용되는데, 문신(文臣)에게 많이 주어지는 시호 ‘文’字는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를 경륜해 다스리다), 근학호문(勤學好問: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했다), 도덕박문(道德博文: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 박문다견(博聞多見:널리 듣고 많이 보았다) 등 15가지나 된다.
문신(文臣)인 경우 시호에 ‘文’字가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文貞公 하면 金堉(대동법 실시), 孟思誠 등이 있고, 文正公하면 趙光祖와 숙종시대 정치의 맞수였던 尤庵 宋時烈과 眉叟 許穆, 宋浚吉이 있고, 文成公하면 栗谷 李珥, 安珦 등이 있다. 퇴계 이황은 文純公, 신숙주 유성룡은 文忠公, 김장생 김집 父子는 文元公 文敬公이다. 무신(武臣)이 가장 좋아하는 시(諡)字는 ‘忠’字인데 忠武公으로 李舜臣 金時敏 南怡 등이 있고, 中國 蜀나라 諸葛亮도 忠武侯(제갈량은 諸葛武侯라 불리듯 제후이며 公 대신 侯를 쓴다)이다. 忠壯公에 金德齡 李甫欽(단종복위운동시 순흥부사), 忠莊公에 權慄, 忠正公 閔泳煥, 忠成公 韓明澮도 있다. 세종 때 18년간 영의정을 한 黃喜는 翼成公이다. 익성공의 翼은 思慮가 深遠하다는 뜻이오, 成은 宰相이 되어 終末까지 잘 마친 것이란 뜻이다. 이렇게 시호는 그 사람의 행적을 평가하여 부여하는 것으로, 같은 諡號 일지라도 그 뜻은 다를 수 있다.
시호(諡號)의 “諡는 行의 자취이고, 號는 功의 표시이다. 行은 자신에게서 나오고, 명(名:號)은 남에게서 이루어진다.” 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훌륭한 족적을 남긴 사람에겐 좋은 시호가 주어지고, 악한 행실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나쁜 시호가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다. 시호는 한 사람의 일생을 압축한 표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