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1일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2년이 넘도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제약회사들이 이에 대비하여 백신을 개발하여 각 나라마다 접종률이 80%를 넘고 있지만, 바이러스는 바이러스대로 그에 대비하는 듯 알파형이니, 베타형이니, 감마형에 델타형, 오미크론 까지 그 형태를 바꿔가면서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나도 백신을 1, 2차 접종하고 추가 접종까지 마쳤지만, 이 끈질긴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 그런 것 외에도 이런저런 마음 쓰는 일 때문에 나의 서촌 산책이 달포나 중지되고 있었다.
오늘은 1930년대 우리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사람들 중에서 [구인회] 멤버들과 진한 우정을 나눴던 화가 구본웅이 살던 집터인 종로구 필운동 89 번지(도로명 : 종로구 필운대로 23 (환경운동연합)을 찾아보고 그의 삶의 흔적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조선의 로트렉 구본웅]
독보적인 한국 최초의 야수파 서양화가 구본웅을 사람들은 ‘조선의 로트렉’이라고 불렀다.
로트렉(Henri-Marie-Raymonde de Toulouse-Lautrec-Monfa, 1864~1901)이 프랑스의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 사고에 의한 신체장애가 있던 화가였고, 구본웅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유아기에 사고로 로트렉처럼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화가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을 것이다.
로트렉은 1,000년 이상을 내려오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인 알퐁스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몸이 허약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로 올라와 열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불행하게도 로트렉은 열세 살과 열네 살 때 두 번에 걸친 사고로 하반신 발육이 정지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다리가 짧고 키가 152cm밖에 안 되는 기형적인 외모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작은 거인, 위대한 화가라 했다. 로트렉은 모네, 고흐, 드가 등과 함께 후기 인상파 시기에 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화풍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구본웅 역시 서울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장남으로 귀하게 태어났다. 아버지 구자혁은 월남 이상재 선생 등 우국지사들이 민족자본을 모금하여 설립한 기독교 서적 출판사 [창문사]가 차츰 모금 실적의 부진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하자 이를 인수하여 경영하기도 하였고, 그의 숙부 구자옥은 당시 YMCA 총무부 간사를 하던 인텔리였으며, 해방 후 경기도지사를 지낸 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러울 것 없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구본웅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그를 낳던 어머니가 산후통으로 어려움을 겪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능성 구 씨들의 세거지인 황해도 연백으로 산후조리 겸 요양을 보냈으나 4개월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곳에서 2살 되던 때 유모가 그를 업고 마루에 오르다가 실수로 등에 업힌 그를 마루 아래에 있는 댓돌에 떨어뜨려 허리를 크게 다쳤고, 즉시 서울 본가로 돌아와 온갖 치료 노력에도 불구하고 척추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마치 로트렉이 사고로 신체장애를 갖게 된 것처럼…
[김해경(金海卿) 필명 이상(李箱)]
구본웅은 1921년 열여섯 살 되던 해에 4살 아래의 김해경과 같이 지금의 배화여고 자리에 있던 4년제 보통학교인 신명학교를 졸업한다. 꼽추라고 놀리는 급우들에게 시달림을 받았지만, 나이 어린 김해경은 늘 그의 편이 되어 주었고,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등 하교를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며 우정을 다졌고, 그 우정은 김해경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김해경 또한 3살 때 친부모를 떠나 자식이 없던 아버지의 둘째 형님에게 입양되어 살면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들어온 양부의 후처 즉 양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외롭게 자랐다.
구본웅은 신명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종로에 있는 YMCA의 ‘고려회화’에서 고희동과 나혜석에게 서양화를 배웠다.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구본웅은 경신고등보통학교(1921~1926)를 다녔고 김해경은 동광학교(東光學校)에 진학한다. 뒤에 동광학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로 병합한다. 구본웅이 경신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숙부 구자옥이 졸업 선물로 사준 그림도구를 담는 상자인 사생상(寫生箱)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상자를 몹시 부러워하는 김해경에게 준다. 이에 감동한 김해경은 자기의 호를 이상(李箱)으로 짓겠다고 약속을 한다. 상자의 재질이 오얏나무(李)이고, 꿈에도 갖고 싶던 상자(箱)를 받았으니, 호를 이상(李箱)으로 하겠다고 하여 그때부터 김해경의 아호 이상(李箱)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상(李箱)은 대부분 사람들이 시인, 소설가로만 알고 있지만 화가로도 그 재능을 발휘하였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었고, 1934년 문학동인 [9인회]의 같은 멤버인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연재할 때 삽화를 이상(李箱)이 그리는 조건으로 연재했다는 이야기는 그가 화가로서도 인정받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구본웅과 9인회 회원들]
구본웅은 1928년 일본 유학을 떠나 4년 만에 ‘태평양 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대표적 민간 전시회인 ‘이과 전(
二科展)’에 조선인 최초로 입선하였다. 1933년 귀국한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는 친구 이상(李箱)을 황해도 연백의 배천온천으로 데리고 가서 요양하게 한다.
문학동인 [9인회]는 1933년 8월 이종명과 김유영의 발기로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정지용 등 9인이 결성하였으나,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가입하였고, 그 뒤 또 유치진, 조용만 대신 김유정, 김환태가 보충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이상(李箱)과 김유정의 사망 후 [9인회]는 와해되고 만다.
[시와 소설]은 구본웅이 편집 및 발행인으로 1936년 3월 13일 창문사에서 창간되었으나 1호로 종간된 [9인회]의 문학 동인지이다. 책의 판형은 국판 40면이고, 정가는 10전이었다. 내용은 평론 1편, 수필 3편, 소설 2편, 시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론으로는 김기림의 [걸작에 대하여], 소설로는 박태원의 [방란장 주인]과 김유정의 [두꺼비], 수필로는 이태준의 [설중방란기], 김상용의 [시], 박태원의 [R 씨와 도야지], 시로는 정지용의 [유선 애상], 김상용의 [눈 오는 아침], [물고기 하나], 백석의 [탕약], [이두국 주가도], 이상의 [기외 가전], 김기림의 [제야] 등이 게재되었다. 여기에 실린 박태원의 [방란장 주인]은 친했던 '제비다방'의 주인 이상(李箱)을 모델로 쓴 소설이다. 구본웅은 이들 멤버들과 가까웠지만, 이상, 박태원, 김유정과 더 가까웠던 것으로 나타난다. 예술인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좋아하게 되고 그들의 피는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모양이다. 구본웅의 외손녀는 저 유명한 발레리나 강수진이고, 박태원의 외손자는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다.
이상(李箱)이 배천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눈이 맞아 서울로 데려와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차릴 때도 구본웅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가난한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제비다방’은 얼마 가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고, 이어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한다. 1936년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곧 퇴사한다. 이상(李箱)은 그 해 6월 변동림과 결혼한다. 변동림(1916~2004)은 구본웅의 새어머니 변동숙의 26살 연하인 이복동생이니 구본웅에게는 나이 어린 이모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경기고녀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다닌 인텔리 신여성이었다. 언니인 변동숙이 폐결핵을 앓고 있는 이상(李箱)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였지만,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고 결혼을 강행했다. 그들이 함께 한 결혼생활은 4개월 정도의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천재를 사랑한 그녀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구본웅은 동경에 가서 치료받기를 원하는 이상(李箱)에게 여비를 주어 1936년 10월 동경으로 보낸다.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갖 결혼한 아내 변동림은 서울에 남겨둔 채 혼자 떠난 것이었다. 처음엔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던 이상은 1937년 4월 공원을 산책하던 중 경찰에 '불령선인'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혀 구치소에 수감된다. 구치소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로 다시 병세가 위급해지자 구치소에서 풀려나 친구들이 동경대학 부속병원에 입원시켰으나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친구들이 서울에 있는 변동림에게 연락하여 그의 임종을 지키게 한다.
박제된 천재, 같은 폐결핵 환자였던 친구 김유정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하기도 했던, 이상(李箱)은 1937년 4월 17일 그의 나이 27세에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변동림의 무릎을 베고 이국 땅에서 그 생을 마감한다. 후에 변동림은 그녀의 회고담에서 멜론을 사기 위해 그를 혼자 남겨두고 급히 뛰어나갔던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단 일 분이라도 그의 곁에 더 있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면서...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고, 남편과 함께 파리에 유학하고 돌아와 김향안이란 필명으로 수필가, 미술평론가, 화가로 활동하다 2004년 89세로 뉴욕에서 사망한다.
이상(李箱)과 함께 9인회 멤버 중에서 또 한 사람의 가까웠던 친구 박태원(1909~1986)은 1950년 가족을 남겨둔 채 문우 이태원과 함께 월북하게 된다. 북에서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 중 당의 눈 밖에 나서 숙청되기도 했다가 1960년부터 다시 창작 활동을 하게 된 그는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 3부작 가운데 1부인 「계명 산천은 밝았느냐」 등을 내놓는다. 그는 1965년께 망막염을 앓아 실명하고, 1975년 뇌졸중으로 전신 불수가 되고 나서도 집필 의지를 꺾지 않는다. 북녘에서 얻은 아내에게 구술하는 방식으로 1977년부터 3부작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이어가는 것이다. 박태원은 1984년 「갑오농민전쟁」을 탈고한 뒤, 1986년 7월에 숨진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의 로트렉, 한국 최초의 야수파 서양화가, 불우한 천재들의 후원자 구본웅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2월 2일 원래 허약했던 몸에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새어머니 변동숙과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7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그가 남긴 작품들 또한 6.25 때 폭격으로 대부분 사라져 버렸고, 겨우 몇점이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에 남아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본웅 스스로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놓았는데, 그것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그림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