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어제는 아침 9시 30분에 인천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서둘러 새벽 5시에 집을 나섰었다. 인천에서 파리까지 12시간, 파리공항에서 2시간 대기, 파리에서 제네바까지 1시간, 집을 출발한 지 20시간이 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이곳은 여전히 같은 날 오후 5시가 조금 지났었다. 서울과 이곳 제네바는 8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마치 과거로 되돌아가 살게 되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의 삶에 이렇게 과거로 되돌아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오늘은 오전 동안 집에서 편하게 쉬고, 오후에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 근처 작은 전원도시인 페르네 볼테르에 있는 볼테르(1694 ~ 1778)의 莊園을 찾았다. 이곳 시청 옆 동서로 달리는 도로 한가운데에 볼테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볼테르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고, 그가 살았던 장원을 찾아가는데, 장원 앞 길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유럽에서는 공동묘지를 마을 안에 두는 것을 많이 보았다. 가족들이 자주 찾아와서 꽃을 가꾸기도 하고, 묘지 안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묘비와 대리석으로 된 석관 덮개를 정성스레 닦으며 추모의 정을 이어가는 것을 보니, 명절에 한 두 차레 성묘를 하면서 교통지옥을 걱정해야 하는 우리네 문화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묘지 바로 뒤편에 볼테르의 저택이 있다. 커다란 철문은 잠겨 있고 작은 건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니 기념품을 팔기도 하는 방을 통해서 관람객들이 출입을 하도록 되어 있다. 비교적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는 장원은 마을 서쪽에서 남북으로 달리는 쥐라산맥을 뒤로하고 앞쪽엔 멀리 융프라우의 설산을 바라보고 있는 족히 수만 평은 됨직한 넓은 하나의 영지이다. 이 영지는 그가 1758년 말에 사들였다고 한다. 숲과 목장까지 있는 말 그대로 거대한 莊園이다. 장원 전체가 마을보다 높직한 곳에 위치해서 사방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앞으로는 멀리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융프라우의 웅장하고 멋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택 2층의 발코니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전망대이다.
저택은 일층의 두세 개의 방만 개방되고 다른 방들은 잠겨 있었다. 저택 앞에는 영지의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고, 드넓은 정원 앞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이 펼쳐져 있으며, 저택의 뒤에는 넓은 후원과 숲이다. 아름드리 마로니에가 후원 중간중간에 있는데, 떨어진 너도밤이 수북하고 보라색, 흰색의 바이올랫이 한창 피어 있다. 후원과 목장 사이에 가로수 터널을 이룬 흙길 산책로가 있어 그 옛날 볼테르가 사색에 잠겨 걸었을 그때를 상상하며 필자도 아내와 함께 한참을 걸어 보았다. 한마디로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이곳에서 그는 스스로 “앞발은 로잔과 제네바에 걸치고 뒷발은 페르네와 투르네에 걸침으로써,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가는 식으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지 23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가 계몽 사상가로서의 훌륭한 유산을 많이 남긴 그를 존경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개혁적인 사상 때문에 종교적인 면에서나 정치적면에서 박해를 받기도 하여, 3년 동안의 영국 망명시절을 포함하여 국외에서 보낸 시간이 꾀 길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친 그였지만, 일생을 조국 프랑스에서만 안락하게 살 수는 없었다.












012년 10월 20일 토요일
오전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페르네 시청 앞 도로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만 열리는 시장 구경을 갔다. 스위스와 이태리에 가까운 프랑스 지역이기 때문에 프랑스와 이태리의 수산물과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치즈, 빵, 과일과 채소, 포도주, 육가공품 등 다양한 농산가공식품들이 주로 팔리고 있다.
물가가 제네바 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제네바 사람들이 식료품을 조달해가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차량이 붐비던 도로가 시장으로 변했다가 오후 3시만 되면 모든 상점이 한꺼번에 철시를 하고 소방차가 깨끗하게 물청소를 하면 언제 시장이 섰던 곳이냐 싶게 깨끗한 도로에 차량이 분주히 왕래하고 있다.


오후에는 제네바 시내를 돌아보았다. 2006년도에 아내와 함께 단체 관광으로 몽불랑에 가면서 쫓기는 시간에 레만호수 의 젯토분수 앞에서 사진 몇 장 찍는 그야말로 주마간산식으로 지났던 곳이다. 오늘은 여유를 갖고, 유엔유럽본부인 팔레 데 나시옹(Palais des Nations)을 비롯한 22개의 국제기구와 250개 이상의 비정부기구가 들어서 있는 신시가지 지역과 구 시가지까지 겉모습만이라도 둘러볼 계획이다.
레만호수를 바라보고 세워진 제네바의 신도시 지역은 구 시가지의 동쪽에 위치하며, 호수를 따라 몽블랑 다리까지 이어지고 몽블랑다리를 지나면 구시가지다. 구 시가지는 신 시가지와 다르게 건물들이 일정한 높이로 파리의 중세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닮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도로는 좁지만 바닥은 모두 일정한 규격의 돌을 깔아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구 시가지의 중심은 역시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미술역사박물관, 생 피에르 성당과 시청 청사가 모여 있는 곳이다.
팔레 데 나시옹(Palais des Nations)의 건너편 광장인 '에스플라나드 데 나시옹'(유엔 기념광장)에는 좀 색다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다름아닌 '지뢰 없는 세계'를 열망하는 상징물인 `부러진 의자' 이다. 제네바의 명물 이 된 이 `부러진 의자(Broken Chair)' 는 높이 12 미터에 4개의 다리 중 왼쪽 앞다리가 부러져 있는데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사람의 육신을 상징한다.
이 건물이 국제연합을 처음으로 탄생시킨 윌슨 대통령과 처칠 수상의 회담 장소였고, 유엔이 탄생된 후 유엔본부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 옆에 있는 호텔 이름이 프레지던트 윌슨 호텔인데 2012년도 숙박료가 세계에서 가장 비짠 호텔로 이름이 올라 있다.
(펜트하우스 하루 숙박료가 한화 7,500만원 일 뿐만 아니라 아무나 예약 할 수도 없다고 한다)
2012년 10월 23일 보타닉 가든/몽블랑 다리/룻소 섬
엊그제까지도 맑던 가을 날씨가 오늘은 무슨 심술이 났는지 흐린 구름으로 주변의 가까운 산들까지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왔던 딸네미가 우리를 태워다 회사 근처의 보타닉 가든 앞에 내려주고 회사로 들어가면서 구경을 마치고 연락을 하란다. 보타닉 가든은 WTO와 WMO를 동서와 남북으로 찻길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바로 건너에 있는 식물원이다.
식물학자 Augustin Pyramus de Candolle(1778-1841)이 설립했다. 넓은 공간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고, 여기저기 유리 온실마다 각 기후대의 희귀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어서 일종의 식물 박물관이다.
식물원의 중앙에는 알프스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식물, 토양, 바위까지도 알프스의 것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고산지대를 재현했다. 지금은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시설도 갖추고 있으며, 소규모의
동물원까지 갖춘 공원으로 자연학습장 겸 휴식공간으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시간 정도의 휴식공간으로 찾는 시민들이 한가롭게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식물원 구경을 마치고, 호숫가 산책길을 따라 몽블랑 다리 곁에 있는 룻소섬으로 걸어갔다. 레만호수의 물이 흘러 론강으로 들어가는 곳, 인공으로 섬을 만들고 룻소섬이라 이름하여 그이의 동상을 세웠다. 바다같이 넓은 호수의 물이 몽블랑 다리 밑을 통해서 좁아진 론강으로 서서히 흘러들어 간다.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브베( Vevey)/ 몽트뢰 [Montreux]
며칠간 흐리던 날씨가 어제 오후부터 기어이 추적추적 늦가을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아내와 함께 내일은 제발 비가 그쳐 주기를 그렇게 바랐건만,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오지 않지만,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며칠 전부터 딸네미 차로 브베와 몽트뢰의 관광 계획을 세워 놨었기에 이런 날씨에도 어쩔 수 없이 예정했던 대로 출발하기로 했다.
딸네미는 아내와 내게 미리 준비해 놨던 방한모까지 건네주면서 몽트뢰는 여기보다 기온이 3, 4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겨울 복장을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평상복장으로 나갈 준비를 했었는데, 집을 나서면서 내복과 두꺼운 스웨터까지 껴입고 털모자까지 썼다.
브베(Vevey)는 제네바(Geneve)에서 자동차로 달려 약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의 레만호수를 끼고 있는 스위스의 서남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다.
영국 출신의 세계저인 희극배우 찰리 차프린이 1952년에 미국의 영주권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그의 만년의 보금자리로 잡을 만큼 유명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이며, 세계적인 식품회사인 레슬레의 본사도 이곳 브베(Vevey)에 있다고 한다.
찬비가 내리는 브베의 길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물안개가 맑은 수면을 감추어버린 레만호숫가의 가파른 언덕에 지어진 아름다운 집 사이로 속삭이듯 조그만 소리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와 그 곁으로 이어지는 포도밭과 낙엽 쌓인 길을 지나 가파른 언덕 위의 아름다운 라운지 바 <LE DECK>이라는 카페에서 값비싼 샤슬라(Chasselas)라는 브베산 화이트 와인을 마셔보는 과분한 여유도 누렸다.
멀리 산자락에 황금색의 물결을 보면서 혹시 유채꽃이 이 차가운 날씨에도 저렇게 만발하였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 지나면서 보니 모두 수확을 마친 포도밭의 단풍 든 포도잎들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적당한 습도와 맑고 깨끗한 공기, 아침저녁의 심한 일교차가 이곳의 산야를 이렇게 아름답게 채색해 놓았지 않나 생각했다. UNESCO는 이 와이너리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인사동이 여기에도 있었다. 각종 골동품을 팔고 있는 벼룩시장도 돌아보았다. 낡은 시계며 농기구, 유리제품, 소에게 달아주었던 워낭 같은 물건들이 팔리고 있었지만, 정작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브베의 정말 전망이 좋은 카페 Le Deck에서 값비싼 와인도 마시고, 날씨는 비록 흐리고 가끔씩 빗방울이 듣기는 했지만 사진을 많이 남기고 다시 서서히 몽트뢰를 향해 떠났다. 몽트뢰까지 가는 길은 여행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운 길이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안개구름이 시야를 살짝살짝 가리는 모습도 그런대로 멋이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하였다.
브베에서 15분 정도 거리의 몽트뢰에 도착하니 비가 점점 더 내리고 바람이 차가워 카메라 셧터를 누르는 손이 곱을 정도였다. 레만호수의 동쪽 끝자락을 품에 안고 높은 산을 등에 지고 세워진 도시 몽트뢰.
세계 각국의 재력가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중 첫째로 꼽히는 아름답고 깨끗한 곳이며, 레만 호수를 남쪽으로 바라보는 높은 산 중턱에는 모두 오래된 고급주택들로 채워져 있으며, 시내에는 고가의 상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거리에 즐비하게 매우고 있어서 구경하는 나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시내를 구경하다가 부동산 회사의 유리창에 부착된 매물 안내 쪽지를 본 딸의 설명에 의하면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면 감히 이곳에서 살고자 하는 엄두를 낼 수 없겠다. 시내에 있는 방 2개짜리 작은 아파트의 가격이 서울 강남의 40평대 아파트 가격보다 비싸다니? 스위스의 국민소득이 우리와 차이가 많기는 하지만 이런 살기 좋은 도시의 부동산 가격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시옹성의 죄수'라는 시로 더 유명해진 시옹성은 시내 중심지역에서 자동차로 10분쯤 가야 하는데, 다음 기회가 있으면 다시 찾기로 하고 대신 바이런의 시 '시옹성의 죄수'의 한 부분을 올린다.
시옹성의 죄수/바이런
쇠사슬을 벗은 영원한 정신!
자유, 너는 지하감옥에서도 환히 밝도다.
그곳에서 네가 머물 곳은 뜨거운 열정
사랑만이 속박할 수 있는 열정이어라.
자유여, 너의 자손들이 족쇄에 채워져
차갑고 습기 찬 햇빛 없는 어둠 속에 내던져질 때
그들의 조국은 그들의 순국으로 승리를 얻고
자유의 영예는 천지에 퍼지리라.
시옹! 너의 감옥은 성스러운 곳
저의 슬픈 바닥은 제단
그의 발자국에 닿은 너의 차가운 돌바닥은
마치 잔디처럼 되어버렸구나
누구도 이 흔적을 지우지 마라.
그것은 폭군에 항거하여 신에게 호소한 자국이니
16세기 종교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제네바의 수도원장 보니바르(Bonivard)가 사보이 공국의 왕에게 잡혀 1532년부터 1536년 까지 4년 동안 지하 감옥의 기둥에 쇠사슬로 묶여 지내다가 풀려났던 역사적인 곳을 300년 후에 바이런이 찾아와서 그때의 이야기를 시로 남겨 이 시옹성이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호숫가를 지나면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시내 구경 후 급격히 내려간 기온 탓도 있었지만,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길을 서둘렀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데, 빗방울은 눈발로 변해버렸다.
스위스에서는 고속도로에 톨게이트가 없다. 모든 차량에는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있는 통행 티켓을 부착해야 하는데, 일 년마다 갱신하는 그 티켓 요금이 40 스위스프랑(한화 약 48,000원)이라니 아주 저렴하다 할 수 있으며, 톨게이트를 운용하는 경비가 절약됨을 감안할 때 합리적인 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소 억울하기는 하겠지만, 톨게이트에 근무하는 인력을 다른 곳에서 흡수할 수만 있다면 이 나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다.
2012년 10월 31일 화요일
프랑스의 시골길 걷기 / 쥬라에 오르는 길을 찾아서
이곳에 와서부터는 날마다 책상에 앉기만 하면 쥬라산맥의 영봉들이 초대하지 않아도 나를 찾아 창문으로 들어온다. 거기다 며칠 전부터는 하얀 눈모자를 쓴 모습을 뽐내면서, 은근히 한 번은 꼭 자기에게 와 달라고 유혹까지 하기 시작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가는 길을 모른다는 핑계로 못 가겠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래 내 한 번은 그대를 찾아주마 하고 불현듯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르는 길을 어떻게 찾아갈까?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도 되었지만, 어제는 아내가 슈퍼마켓에 가는 시간에 맞춰 운동삼아, 길도 알아볼 겸, 혼자서 집을 나섰었다.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도 지나고 숲도 지나면서 한적한 이국의 시골길을 한 시간쯤 걸었는데도 그 봉우리들은 여전히 거기 그 거리만큼에서 미소만 짓고 있다. 길을 물으려 해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었다.
날씨가 풀려서 Jura의 봉우리에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한다. 오늘은 아침 10시에 다시 쥬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제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찾을 만큼 어제보다는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시골 마을을 지날 때 본 잘 다듬어진 생울타리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으로 간직하기도 하고, 숲과 숲 사이에 있는 넓은 초원에서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목장을 지나는 숲길에서는 그냥 지나가기가 너무 아쉬워 한참 심호흡을 하면서 그 맑고 신선함을 내 몸속에 깊이 담아두기도 했다.
그 길에서 어린 소녀를 만나 산을 가리키며 영어로 길을 물으니, 쥬라 쥬라 하면서 산 이름만 말한다. 이 나라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이지 그 소녀가 무슨 잘못이냐 싶어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다시 모르는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숲에 길이 막히고, 동서로 달리는 차도가 나와서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길가 농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 다시 길을 물으니 여기서도 10km를 더 가야 등산로까지 갈 수가 있다고 한다.
노인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걷다가 드디어 남북으로 난 길을 찾았는데, 2차선 차도에 인도가 없는 걷기에 조금 위험한 길이었다. 오늘은 2시간 가까이 걸었고, 쥬라에 훨씬 가까이 접근했으니 여기까지도 큰 수확이라 생각하고 되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방향만 짐작하고, 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택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중간에서 페르네 볼테르라는 도로의 방향표지판을 발견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2012년 11월 1일(목요일)
친절한 다니엘씨 부부의 덕분에 드디어 Jura를 품에안다
Jura를 더 가까이하기 위해 어제 1시간 넘어 길을 찾아 걸었으니, 오늘은 어제까지 찾았던 길에서 1시간 정도 더 해서 2시간 정도 걷다가 돌아올 생각으로 배낭도, 휴대폰도 없이 홀가분한 차림으로 아침 9시 45분에 집을 나섰다. 출근하던 딸이 태워다 주겠다는 것을 근무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운동 삼아 그냥 걷겠다며
산에 오르는 것은 주말에나 계획하고 있으니, 그 때나 태워다 달라고 말하고 그냥 출근하도록 보냈다.
혼자 집에 있을 아내에게도 오후 2시쯤에는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와서 슈퍼마켓에 같이 가기로 약속도 했다. 농촌 마을에서 사람 만나기가 가뭄에 콩나 듯 어려운데, 마침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는 한 부부를 만났다. Jura를 오르기 위해 길을 찾는데, 가까운 길을 아느냐고 물으니, 대뜸 차를 어디에 파킹했느냐고 되묻는다.
차는 가져오지 않았고, 그냥 걸어서 등산로 입구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친절하게 길을 가리켜 주며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튼 고맙다고 말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부부가 흔쾌히 모델이 되어주었다. 다시 고맙다고 말하고 가르쳐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 웬 자동차 한 대가 길 가에 서더니 내게 손짓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까 길을 가르쳐 준 그 부부였다.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다 줄테니 차를 타라는 것이다. 이런 고마운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고맙기도 했지만, 나와 헤어진 뒤 집에 가서 차를 가지고 내 뒤를 따라온 그 부부에게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는데, 괜찮으니 빨리 타라고 자꾸 재촉을 한다.
몽쥬라(Monts Jura)라고 하는 등산로 입구 마을까지 태워다 준 부부가 내가 돌아갈 길을 걱정한다. 사례를 하고 싶었지만, 극구 사양을 해서 사진만 한 장 더 찍고, 나의 두 다리를 두드리면서 당신의 자동차보다 더 튼튼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농담을 하면서 친절한 다니엘 씨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참으로 친절한 사람들이다. 관광입국으로의 한국이 절실한 우리도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에게 이 나라 사람들 이상으로 친절하다면 다시 가보고 싶은 한국이 되지 않을까?
오늘 등반까지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다니엘 씨 부부의 생각지도 않은 친절에 날마다 나를 유혹하던 Jura를 품에 안기 위해 땀을 흘리게 되었다. 이곳은 실은 등산객들 보다는 스키어들에게 더 사랑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눈이 쌓이지 않아서 스키시즌이 시작되지 않았고, 따라서 리프트카도 운행되지 않는 모양새다. 산에 오르기 전에 리프트카 출발지의 직원에게 왜 지금은 운행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10월 23일부터 개장한다는 안내판과는 다르게 금년에는 눈이 늦어 12월에야 개장한다고 한다.
산에 오르기 위해 눈 없는 슬로프와 리프트 와이어가 늘어진 밑으로 올라갈까 하고 입구에 들어서니 숲 속에 등산로가 보였다. 노란 낙엽이 수북이 깔린 등산로를 택하여 그늘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나무 끝에 매달렸던 겨우살이 가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가 하면, 쓸어진 나무 밑동에는 큰 영지도 눈에 띈다. 배낭을 가져왔더라면 큰 수확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길과 슬로프를 통해 1시간 40분쯤 올라가니 넓은 분지로 된 리프트카의 종착역이다. 날마다 나의 창문으로 찾아와 나를 유혹하던 Jura의 두 봉우리가 바로 눈앞에 서있다. 쌓였던 눈이 다 녹아버리고, 이제는 맨살을 들어내고 있는 그녀들을 나는 두 팔을 벌리고 가슴에 안았다. 함께 심호흡도 했다.
멀리 독일에서 출발하여 스위스의 서북쪽에서부터 서남쪽을 거쳐 프랑스까지 360km를 달려 내려온 긴 산맥의 1,700m 대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 겨우 한 봉우리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직접 가슴으로 안아보았다는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행운 뒤에는 고통도 따르는 법. 다니엘 씨 부부에게 농담 섞어 큰소리는 쳤지만, 기실 돌아갈 일이 걱정도 되고, 집에서 기다릴 아내생각도 나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Jura를 뒤에 남겨두고 1시 30분쯤 귀가를 서둘렀다.
자동차로 15분 가까이 갔던 길을 되짚어 오려니 걸어갔던 길과는 다르게 생소한 느낌이 들어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방향을 남쪽으로 잡고, 직선길이 있으면 무조건 그 길을 택했다. 직선 길이 막히고, 동서로 난 도로와 연결되면 다시 동쪽길을 잡아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물으려고 했지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어 불안하기도 했다.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이 후회되기도 하고, 걱정할 아내 생각에 미안하기도 하다. 불안한 상태로 한참을 가니 마을이 있다. 물어보니 내가 가는 길이 맞단다. 집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점심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배가 고프지만, 적당한 먹을거리를 사 먹을 곳도 찾지 못하여 아픈 다리로 그냥 걸었다. 하산하여 2시간 넘게 걸어서 오후 4시 반쯤 드디어 어제 왔던 지점에 도착하니, 집에 다 온 기분이다. 오후 5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니 걱정된 아내가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