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관광으로 돌아본 유럽의 나라들
2006년 9월 17일
12시 정각에 파리 시내에 있는 에밀 졸라의 거리에서 가까운 한국 식당 “사모”에서 이번 단체 관광을 함께 할 팀과 합류하여 점심을 같이 하도록 되어있었다. 모르는 길을 찾아가려니 걱정이 되어 조금 서둘러서 일찍 집을 나섰다. 식당에 도착하여보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슈퍼마켓을 구경하다가 약속된 시간에 맞게 식당에 도착하니, 영국을 거쳐 파리 시내를 관광한 미주지역으로부터 온 교포 24명과, 파리에서 합류하게 되는 우리 부부를 포함한 8명의 관광객이 다 모였다. 총 32명의 단체 관광단이다.
샹베리까지 가는 길
식사 후에 버스에 올라 파리를 벗어나 제네바에 가까운 작은 도시 샹베리를 향한다. 이 버스는 관광객을 위하여 제조된 것이어서 2층 버스와 같이 되어 있는데, 아래층에는 관광객들의 짐을 싣게 되어 있고, 사람은 높은 2층에 타게 되어 있어서, 운행 중에도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어 편리하다.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보르고뉴 지방의 디종을 지면서 보이는 평평한 들녘에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육질이 좋기로 소문난 샤롤레라고 불리어지는 흰 소들과, 초지 사이사이에 우거진 푸른 숲, 그리고 포도의 본고장답게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들을 지나, 리옹까지 가는 540 킬로미터를 달려도 우거진 숲은 있으되, 산은 보이 지를 않는다. 전 국토의 70%가 평야라니 그럴 만도 하다. 몽블랑에 가까운 샹베리에 접근하면서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평야에 숲이 있다면, 벌써 개발했겠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 땅 넓은 나라에 대한 부러운 생각도 금할 수가 없다. 평지에 뻗어나간 고속도로 가에는 군데군데 숲을 조성하여서 마치 산속을 달리는 듯 상쾌하다.
샹베리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샹베리는 프랑스 동남부 론 알프 지방에 있다. 한 때 사부아 공국의 수도이기도 했고, 몽불랑의 주도였으며, 또한 장쟈크 룻소가 젊은 시절 연상의 여인 바랑 부인과 10년을 함께 살았던 레 샤르메트의 시골집이 가까운 곳에 있다.
밤 9시가 넘어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을 때 우리가 투숙할 메르꾸리 샹베리 호텔에 도착하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현지의 식당으로 가면서 4마리의 코끼리가 네 방향으로 머리만 내밀고 있는 이곳의 명물 코끼리 분수를 보았다. 옛날 인도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코끼리를 좋아하던 어느 백작이 많은 재산을 이 도시를 위해 썼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식당에서는 생선요리와 바게트 빵, 샐러드와 파이가 저녁식사로 나왔다. 밤에 보아도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임을 알 수 있겠다.
제네바, 샤모니 몽블랑, 그리고 밀라노 (2006년 9월 18일 월요일)
제네바
아침 6시에 모닝콜이 울렸지만, 스위스에 간다는 설렘 때문인지 아내도 나도 잠은 그보다 훨씬 일찍 깨었다. 어젯밤 내리던 비가 그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날씨가 화창해야 몽블랑의 모습을 뚜렷이 불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호텔에서 뷔페식 조반을 마치고, 8시 30분 제네바를 향해 출발한다.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간다. 국경 통과는 운전자가 탑승자 명단을 경찰에 제시하고 여행 목적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이다. 스위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있지만, 국경 통과가 까다롭지 않다.
제네바는 많은 국제기구가 들어서 있다. 세계 무역기구(WTO), 세계 기상기구(WMO),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UNHCR), 국제 전기통신연합(ITU), 국제 지적재산권(WIPO), 국제 노동기구(ILO), 국제 보건기구(WHO) 등 200 여 개의 유엔 산하 특별기구가 있는 국제 도시이다.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 제네바. 몽블랑 다리가 347 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유럽 제일의 레만호의 끝 부분에 놓여 있다. 도시 앞에 영국식 공원이 있고, 그 바로 앞에는 150 미터를 품어 올리는 레만호의 명물 젯토 분수가 호수 가운데서 시원한 물줄기를 분출하고 있어 보는 이들을 시원하게 한다.
몽블랑 다리 위에서 분수를 배경으로 나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아내가 사진을 몇 컷 촬영하고 있을 때, 낯이 익은듯한 사람이 걸어서 지나가며 미소를 던진다. 같이 미소로 응답하면서, 낯이 익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지나칠 때까지 그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걸프전의 영웅 파월 대장이였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반갑다고 인사라도 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었더라면 그가 더 좋아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을 했다.
몽블랑 다리 중간쯤 옆에 작은 섬이 있고, 그곳에는 룻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이고, 볼테르와 스탕달, 레닌이 살기도 했던 곳, 그리고 릴케가 만년에 5년 동안을 이곳에서 살았고,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많은 문인, 철학자들이 살고 싶어 했던 곳, 제네바와 레만 호수를 뒤로 하고 오면서 “레만호에 지다”라고 하던 우리나라에서 방영했던 오래 전의 T.V. 드라마 생각이 났다. 아마도 남북 분단의 아픔을 주제로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샤모니 몽블랑
3시간 정도의 제네바 관광을 마치고, 다시 국경을 넘어 프랑스의 샤모니 몽블랑으로 향한다. 이곳은 1924년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차가 몽블랑에 가까워질수록 높은 산들이 보이고, 수십 길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의 장관이 여기저기에서 펼쳐진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듯 즐겁다. 산골 정취가 물씬 풍기는 현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안개와 구름에 가려진 몽블랑을 바라보며, 해발 1,037 미터 지점에서 1,913 미터에 이르는 빙하의 계곡을 오르기 위해 전동열차를 탔다. 철길 좌우에는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같은 낙엽교목과 소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자라고, 각종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만년설이 바로 위에 쌓여 있는데, 자연의 신비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천천히 올라가는 전동차 밑으로 아득히 펼쳐지는 구름의 바다. 전동차에서 내려, 4,807 미터의 구름에 덮여 정상만을 가끔씩 보여주는 몽블랑을 바라본다.
1913 미터 지점이 전동열차의 터미널이다. 여기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빙하의 계곡 중간까지 내려가서, 다시 계단을 따라 걸어서 빙하까지 내려간다. 몽블랑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다 멈추어 있는 빙하, 두께가 760 미터, 길이가 11 킬로미터에 이르며, 그 빙하에 동굴을 뚫고, 전기까지 연결하여, 관광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들어갔지만 추위에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이 빙하도 기후의 온난화와 인간의 무절제한 발자취에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지탱될지 모를 일이다. 얼음동굴에서 나와 계단에서 올려다보면, 몽블랑이 구름 속에서 가끔씩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순간포착, 수없이 카메라의 셧터를 눌러대고,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전동차를 타고 내려온다.
밀라노
밀라노를 향해 바쁜 일정을 서두른다. 오후 4시 우리의 버스는 11.6 킬로미터 알프스의 터널을 통과하여 이태리 국경을 넘는다. 유럽연합의 국경은 이미 철폐되었다. 터널의 관리는 프랑스와 이태리가 공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터널을 통과하여 이태리 쪽 휴게소에서 뒤 돌아보는 알프스는 또 다른 미를 보여주고 있다. 역시 어디에서 보아도 알프스는 아름답다. 이태리의 북쪽 지붕 알프스를 뒤로하고 롬바르디아 평원을 가로질러 달린다. 이곳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쌀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역시 쌀이 주식은 아니란다. 쌀을 먹는 방법도 영 틀렸다. 우리처럼 가마솥이나, 압력밥솥에 쫀득쫀득하게 밥을 지어 먹었으면 좋으련만, 끓는 물에 쌀을 삶아 건져내서, 푸슬푸슬한 알갱이 쌀을 소스에 섞어 먹는다니, 맛이 있을 이유가 없으리라. 가이드가 한 번은 불란서 친구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쌀밥을 대접했더니, 그 친구 밥맛에 놀라면서, 밥 짓는 방법을 물어서 알려주었더니, 당장 압력밥솥을 사더란다. 역시 문화는 자기 것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저녁 7시 30분에 밀라노에 도착하여, 불빛 찬란한 두오모 성당과, 스칼라 오페라 극장, 두오모 광장에서, 그리고 글로리아 백화점에서 겉만 보는 밤 관광을 한다. 성당의 전면은 보수공사로 가려져 있다. 대부분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보수공사 또는 외부의 청소작업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불우하던 청년 베르디가 성공을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도시, 그리고 그의 성공을 예비했던 스칼라 극장을 수박 겉 할기 식으로 지나고,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고의 걸작이라는 <최후의 만찬>이 있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찌에 성당의 내부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내일은 또다시 피사를 향해 떠나야 한다.
거리에는 전차가 달리고 있으며, 이태리 제2의 도시답게 밤인데도 사람이 북적대고 있지만, 어딘지 도시 전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공업 도시적인 냄새를 풍기게 한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도로 가운데 분리대의 가로수 중간중간에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변두리 지역이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도시미관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생각되었다. 안정환 선수가 뛰었던 <AC 밀란>의 본거지이고, 대구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이기도 하다.
이태리에 왔으니 이태리 음식인 스파게티와 파스타를 먹기 위해 현지 식당으로 갔는데, 익숙하지 못한 음식에 일행 모두들 불만 투성이다. 밤 11시에야 호텔에 들었다. 밤에 들어와서 차를 타고 시내를 관통하여 두오모 광장 부근만 둘러보고, 식당에서 저녁 한 끼 때우고, 호텔에서 잠자고, 그리고 호텔에서 주는 뷔페식 조반을 드는 것이 밀라노 관광의 전부이다. 단체관광이란 이럴 수도 있다.
피사와 로마 (2006년9월19/20일 화/수요일)
피사까지 가는 길
아침 7시 50분 아침 식사를 마치자 곧바로 피사를 향해 출발이다. 이태리의 등뼈라고 하는 아 페니노 산맥을 따라 건설된 우리나라 경부고속도로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태리 1번 고속도로를 따라 달린다.
유럽에서 관광버스는 매 2시간 내지 3시간을 달리면 20분의 휴식을 취하고 달려야 한다는 유럽연합의 고속도로 법규에 따라 버스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휴게소에서 정차를 한다. 정차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는 기록용 테이프에 운행 시간과 속도와 정차되어 있었던 시간이 기록된다고 한다. 가끔 교통경찰이 이 테이프의 제시를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관광버스 기사들이 법규를 준수한다고 한다.
휴게실에 들리면 모든 관광객들이 화장실에 들리는데, 화장실 이용요금을 내야 한다. 0.3유로 (370원 정도)의 요금을 내고 너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베네치아에서는 1유로(1,250원 정도)를 내기도 했다. 도둑이 따로 없다고 모두들 억울하게 생각을 했지만, 문화가 그러니 어쩌랴?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2,000 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아 페니노 산맥을 따라 달리는 중간에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이태리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까라라 지방을 지났는데, 커다란 산 하나가 대리석 채광으로 사라져 버렸고,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이 잘리어 나가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보이는 주변의 큰 산들이 모두 하얗게 보이는데, 산 전체가 대리석이기 때문이라 한다. 앞으로 천년을 채광해도 다함이 없을 정도라니 대단하기는 하지만, 산맥의 중간이 사라진 뒤에 환경의 변화에 따르는 피해는 없을지 그것이 궁금했다. 여기에서 나오는 질 좋은 대리석이 미켈란젤로 작품의 소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고대 로마 건축물들의 재료였고, 또한 현재에는 세계 곳곳에서 수입해가는 대리석의 주류를 차지한다고 한다.
피사
5시간을 달려 피사에 도착 후, 대성당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관광에 나섰다. ‘피사의 사탑’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도시, 천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고향, 그리고 11~13세기 때부터 크게 번영했던 항구 도시이기도 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유낙하 실험은 했던 이 탑은 두오모 성당의 종탑이다. 두오무 성당은 이곳 뿐만 아니라, 피렌체, 베니스, 로마 등 여러 곳에 있는데, 두오모라는 말이 돔에서 나온 말로 크(大) 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두오모 성당이라면 대성당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 사탑은 1174년부터 짓기 시작하였지만, 피렌체와의 전쟁으로 210년이 지난 후에 완공되었는데, 실제 공사기간만도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건설 도중 한쪽이 내려앉는 것을 설계자가 알고 비방을 취하였지만, 해마다 조금씩 기울어져서, 500년 동안 4.2미터가 기울어졌다고 한다. 이태리 정부에서는 1996년 이 탑의 내부 진입을 폐쇄하고 첨단기술을 동원하여 보수공사를 2001년까지 한 후, 이제 피사의 사탑은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모를 일이다. 현재 탑의 기층 부분이 평지보다 1미터 이상 내려앉은 상태이다. 높이가 54.5m인 이 사탑은 내부에 294개의 계단이 있어서 정상에 올라가 피사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가 있다고 하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올라보지는 못했다. 서울, 부산, 대구, 찍고 대전이라고 부르는 유행가 가사처럼 단체 관광이란 사진만 찍고 설명을 차 안에서 들으며 이동하는 것이다. 두오모 성당을 가운데 두고, 앞으로 세례당, 뒤쪽에 사탑, 이 3개의 건물이 피사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의 볼거리의 전부인가 한다.
로마로 가는 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곳, 그리고 현재도 전 세계 카톨릭 신자들의 마음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로마에 있다.
로마를 향해 달리는 도중에 곳곳에서 이국의 색다른 풍경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온다. 산 꼭대기의 높은 벼랑 위에 세워진 많은 고성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 마치 병정들의 사열식을 보는듯한 싸이프러스 향나무들의 멋진 모습, 그리고 들녘에 질서 있게 가꾸어진 禹美人花 라고도 불리는 개양귀비꽃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꽃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절벽 위에 세워진 고성은 BC7세기경에 피렌체의 토스카나 지역에 살았던 에트루리아 인들이 살았던 성곽이라고 한다.이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정도로 발달된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건축기술과 축성기술 또한 대단히 발달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에 의하여 정복을 당한 후 지금은 그 종족과 문화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즐겼던 원형 극장에서의 검투 경기도 이들 문화의 부산물일 것이라는 이유는, 이들의 유적지에서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원형 경기장의 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사람들은 피정복자들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찬란한 문화와 유적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곳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학교도 있고, 관공서도 있어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로마
피사에서 3시간 정도 달려, 어스름이 들기 시작할 즈음 로마 시내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나무 가로수였다. 마치 우산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가로수 터널을 이루고 있는 도로를 보고 소나무를 인공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태리의 국가 나무가 소나무라고 하는데, 이 소나무는 생태가 어느 정도 자라면 위에서 파라솔처럼 퍼져서 자란다고 한다. 가로수 터널을 고대 로마의 군인들이 전장에서 이기고 돌아와 환영하는 시민들 앞에서 행진을 할 때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가로수가 그때부터 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명물임에 틀림없다. 저녁 식사를 위하여 ‘서울 식당’이라는 한국 식당에서 오랜만에 한식을 맛있게 먹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근처에 있는 세틀리트 팔레스라는 호텔에 투숙한다.
바티간 박물관
수요일 아침, 오늘은 로마 시내 관광을 하는 날이다. 호텔에는 한국인 전용식당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이 투숙하는 곳인 모양이다. 아침 7시 40분까지 식사를 마치고, 8시에 로마 시내 관광이 시작된다. 호텔에서 버스가 30분 정도 달려 로마 시내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에 닿았다. 벌써 400 미터 정도는 됨직한 줄이 입장을 위하여 서 있다. 하루에도 30만 내지 40만 명이 방문하는 박물관인데 2000년대 전에는 하루 100만 명이 넘는 방문자를 기록한 예도 5회 이상을 기록했다니, 사람의 물결에 떠 밀려 무엇을 보고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박물관 앞 광장에서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품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당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화가들의 작품을 대강대강 보면서 한 바퀴 돌아 나와, 다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갔다.
성 베드로 대성당
드넓은 광장에 늘어선 줄을 따라 천천히 입구까지 30분은 걸려 들어섰다.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몰려오는 곳이니 만큼, 질서도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각각 인솔한 가이드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기존의 성당을 헐고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공사를 시작하여, 1615년 파울루스 5세 때까지 한 세기를 넘겨 완성한 이 베드로 대성당은, 그 규모뿐만 아니라 화려함도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부 돔에 사용한 순금을 1cm 넓이로 늘여놓으면 수십 KM에 달한다고 하니, 보지 않아도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르네상스 시대 최고 예술품들의 寶庫를 단 2시간에 돌아보고 기억에 남긴다는 것은 내게는 무리인 것 같다.
라파엘로가 초기 공사 감독 겸 그림 제작을 맡았다가, 그가 죽은 후 그의 스승이었던 미켈란젤로가 이어받아 공사를 지휘하였고, 그 또한 생전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 기독교 국가에 무리하게 부담시킨 분담금과 면죄부의 발매가 부패의 발단이 되었고, 또한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으니, 이 화려하고 웅장한 베드로 대성당이 종교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가져오게 한 결과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이 될 것인가 하고 광장에 나와 앉아 생각해 본다. 일행을 기다려, 다시 트레비 분수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트레비 분수
서울의 잠실 지하 광장에 축소판 트레비 분수가 있다. 스페인 광장에 있는 이 분수에서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며 모두들 뒤 돌아 서서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진다는 곳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것을 생각하며, 분수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아이스크림가게에 들러 3유로 (3,800원) 짜리 크림을 한 개씩 사 들고 북적대는 광장에 가자마자, 역시 그 유명한 소매치기들이 극성이다. 우리 일행 모두가 가이드로부터 이들에 대한 주의 교육을 단단히 받은 터라 조심들을 하는데도 자기의 주머니를 만지듯 한다. 관광객들이 손을 밀어내도 장난처럼 웃으며 물러날 뿐, 다시 주위를 배회하며 수작을 계속한다. 가이드가 그들에게 손짓으로 가라고 하니, 오히려 우리에게 빨리 가라는 손짓을 한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정신을 딴 곳에 두고 있을 때가 그들이 영업하기에 알맞은 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걸어서 베네치아 광장으로 옮겨 간다. 1936년 5월 9일 밤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 지 14년이 되는 오늘 마침내 위대한 새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고 40만 군중들을 선동하던 무솔리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는 다시 1940년 9월 12일 마침내 2차 대전에 참전할 것을 군중들 앞에서 선포한다. 그가 서있던 건물의 발코니를 올려 보면서, 지나친 욕망과 무모한 전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그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자신을 따르던 파르티쟌 들에게 애인과 함께 사살된 그는 그렇다 치고, 무모한 지도자를 따르던 이탈리아의 국민들이 전후 패전국의 국민으로 겪어야 했던, 그 고난은 누가 보상해 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지금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구가하며, 경제 대국으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니, 우리가 부지런히 뒤따라 가야 할 때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 그리고 느꼈노라” 이는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한 말이다. 빨리빨리 의 한국문화라고 말들 하지만 단체관광의 문화야 말로 볼 시간, 찍을 시간, 그리고 느낄 시간은 주지도 않으면서 무얼 느꼈느냐고 묻는 가이드가 야속하기도 하지만, 모든 일정을 정해진 시간에 소화해야 할 그의 서두르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다. 베니스 광장에서 걸어서 캄피돌리오라고 불리는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간다. 수십 계단의 돌계단을 숨이 차게 올라가니 로마 시청의 청사 중앙광장에 기마동상이 버티고 서 있다. 그 유명한 철학자 황제 마아커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 황제들의 기마동상이 스물 두 개쯤 발견되었었는데, 기독교도들이 모두 부수거나 녹여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오직 한 개를 남겼는데 이 남긴 동상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의 것으로 알고 보존을 하였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콘스탄틴 대제의 기마상은 기독교도들에 손에 부수어지고 대신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남겨졌다고 한다. 로마는 고대와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발굴한 옛 유적지 위에 새로 세운 로마 시 청사로 쓰고 있는 건물이, 그 곁에 있는 바울과 베드로가 갇혀있던 지하 감옥을 그대로 보존하며 그 위에 세워진 교회가, 또 BC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던 티베르 강변의 유적지, 판테온 신전, 개선문, 수 천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공공 목욕탕과 황제의 목욕장 터, 로마의 상징처럼 남아 있는 콜로세움 등등 지금도 발굴 중인 수많은 유적들이 시내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니, 이 모든 것들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또한 로마 사람들의 콧대를 높이는 자랑거리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황제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는다. 베드로와 바울이 갇혀 있던 지하 동굴 감옥에서 그들의 발에 채워졌던 족쇄 쇠사슬을 보고, 또 누군가 벽에 남긴 “로마여 너는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낙서의 설명을 듣고 나오면서 역사의 반전을 생각해 본다. 남쪽의 언덕을 내려가 발굴 중인 유적지를 보다가 케자르를 화장시켰던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화장터를 본다. 누군가 한 다발의 꽃을 갖다 놓았다. 개선문으로 가는 중간에 옛 로마인들이 마셨다는 우물에서 나도 물을 마셔 본다. 도시계획을 위해 로마를 불태워 버린 폭군 네로가 스스로 세웠다는 황금 동상이 있던 곳을 바라보면서 콜로세움 앞 광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무릇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이렇게 사라져 가고,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 또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의 한 부분을 떠올린다.
“死後의 명성에 연연하는 자는, 자기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도 또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곧 죽을 것이며, 또한 그들의 후손들도 곧 사라져,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은 마치 타오르다가 이내 꺼져 버리는 불꽃처럼 마침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돌아보니 뒤쪽 언덕에 초기 로마의 유적들이 붉게 물든 석양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플로렌스, 베네치아 (2006년 9월 21일 목요일)
플로렌스
5시 30분 기상, 6시부터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늘은 로스안젤리스에서 온 10명이 우리와 헤어진다. 그들의 코스는 나폴리와 시실리를 돌아와 로마에서 비행기로 귀환하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한 8명이 17일 파리에서 합류하여 총원 34명이 같은 버스로 투어를 하다가 4일 만에 10명과는 작별을 하고 이제 24명만이 플로렌스를 향해 7시에 출발한다.
꽃의 도시, 피렌체는 플로렌스 지방에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로마에서 230 킬로미터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지이다. 단테,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을 낳았고, 중세 이탈리아를 주름잡기도 했던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다. 지금은 신흥 공업도시로 발달해 있지만, 그 옛날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플로렌스의 번영과 영화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플로렌스 시내를 안고 흐르는 아르노 강 위에는 이름난 다리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오래된 1345년에 건설된 베키오 다리가 있으며, 주변에 있던 푸줏간들을 모두 없애고 여기에 금. 은 세공인, 보석상들을 들여놓은 것은 메디치 가문이라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의 저자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이태리인 의사와 결혼해서 정착했던 곳이 베키오 다리 근처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바티스테로산 조반니 세례당은, 고딕 양식의 두오모 성당과 나란히 서 있다. 청동 문에 성서의 장면들이 새겨져 있어서, 천국의 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이 문 앞에서 인파를 헤집고 사진을 찍고, 위대한 시인 단테의 생가와, 메디치 광장에서도 설명을 듣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고, 가이드가 안내하는 백화점에서 이태리 명품들을 아이쇼핑만 한다. 10시 가까이 되어 도착한 피렌체에서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4시간 만에 다시 버스에 올라 베니스를 향해 출발하여 피렌체를 빠져 나오다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차를 주차 시키고 다시 피렌체의 전경을 사진에 담는다. 오후 2시 버스는 다시 북쪽을 향해서 달린다.
싼타 트리니타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아름다운 피렌체의 풍광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석양까지 머무르지 못하는 나로서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한낮의 피렌체의 모습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피렌체에서 5시간 이상을 달려 오후 7시가 다 되어 베니스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휴양지 아바노에 도착하여 알렉산더 팔레스 호텔에 도착하였다. 도착 2시간 전에 휴게소에서 전화를 했더니 제프가 가족들과 함께 벌써 호텔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제프는 내가 퇴직하기 전 회사에서 같이 근무한 유능한 젊은이인데, 부모가 타이완에서 미국에 이민하여, 미국에서 태어난 아시아계 미국인이다. 그 부모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식사를 같이 한 일이 있는데, 나이가 나와 비슷해서 이야기가 통했고, 그 후부터 제프는 나에게 많은 것을 자문 받던 친구다. 지금은 베니스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아노에 살고 있어서, 내가 이태리에 여행할 것이라고 메일을 보냈더니 가족과 함께 호텔로 나온 것이다. 반갑게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호텔 뒤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이태리 정식요리로 저녁을 같이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밤늦게야 제프네 식구들이 돌아갔다.
베네치아
9월 22일 아침 일찍 허둥대며 조반을 마치고,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으로 가기 위해 아드리아 해 위에 놓인 4 킬로미터의 자유의 다리를 건너간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으로 잘 알려진 곳, 또한 베니스 영화제로도 우리에게 알려졌고, 물 위에 떠 있는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때 그들의 약탈을 피하여 물 위에 말뚝을 세워 2미터의 진흙 층에 송판과, 자갈, 화산재의 흙을 채워 만든 인공 섬이 112개에다가 기존의 6개 섬을 합하여 총 118개의 섬으로 된 수상 도시답게 177개의 운하와 4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마르코 성당은 이태리의 4대 성당 중에 하나로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고 한다. 성당 앞에 99 미터 높이의 켐퍼 닐리 종탑이 있고, 광장을 디귿자 형으로 둘러싼 건축물들은 각각 200년의 시차를 두고, 1200년, 1400년, 그리고 1600년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괴테와 바그너가 즐겨 찾던 카페가 있으며, 그들이 자주 들렸던 카페는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또 작곡가 베르디와 유명한 난봉꾼 카사노바의 고향이기도 하며, 베르디의 작품 四季 중에서 봄과 여름의 배경이 된 곳도 베니스이며, 그들이 살던 집을 보존하며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디.
성 마르코 광장에서 가장 오래된 1200년대에 지어졌다는 우측 건물에 베니스가 자랑하는 유리와 크리스탈 공업의 제품들을 판매하고, 그 전통적인 제조과정을 보여주며, 관광객들에게 고가로 판매하고 있는 전시장에도 들려서 화려한 크리스탈 제품들을 구경하고 한 바퀴 돌아 나와서, 통곡의 다리를 구경한다. 당시 최고 재판소와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가 통곡의 다리인데, 재판소에서 형이 확정된 사람이 이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면 살아서 나오지를 못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 다리를 건너는 죄인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곤돌라를 타고 좁다란 운하를 지나면서 헤밍웨이와 피카소가 머물던 호텔, 괴테가 살던 집, 마르코폴로의 생가 등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명인들의 스쳐 지나간 흔적들을 알려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지만, 그곳을 다시 지나간다고 해도 다시 생소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바닷물이 건물 출입구까지 차오르는 베니스의 건물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현대의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이들이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118개의 섬으로 된 이 거대한 도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다행스럽게도 유네스코가 1960년대 중반에 과학적, 기술적 방법을 동원해 유서 깊은 베네치아 시를 구하자는 전 세계적인 운동을 시작했으며, 1988년부터 도시의 범람을 예방하기 위한 표본 실험을 시작하기는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웅장한 건물들과, 수 천년 세월의 무게를 어떻게 지탱할 수 있을지 그 결과는 알 수가 없다.
곤돌라가 건물들 사이를 돌아 나오자, 우리는 택시라고 하는 모터보트로 갈아타고, 잔잔한 아드리아 해의 푸른 물결 위를 쾌속으로 항해한다. 좌측에 점점 멀어져 가는 하얀 대리석으로 된 아름다운 교회의 돔 지붕이 화려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괜한 나의 기우인지는 모른다. 버스를 주차시켜 놓았던 선착장에 나오니, 1회 사용료가 아마도 세계에서 최고로 비쌀듯한 1 유로(1,250원) 짜리 화장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괴팍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요금을 꼬박꼬박 받고 있었다.
인스브루크로 가는 길(2006년 9월 22일 금요일)
오후 2시 15분에 버스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루크로 가기 위해 베니스의 서쪽에 있는 레시니 산맥의 기슭에 있는 베로나 지역을 지나게 된다. 밀라노의 동쪽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아디제 강이 반원을 그리며 흐른다.
이곳에 년간 15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실제 고향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줄리엣이 살던 집에 그녀의 동상을 세워놓았는데, 남자들이 동상의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속설 때문에 가슴이 닳아 반짝반짝할 정도이다. 그녀가 살았다는 낡고 작은 집을 헐고, 그 자리에 1930년대에 새로이 집을 지으면서 근사한 발코니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관광객들의 애절한 상상을 위한 것이 아닌지?
달리는 고속도로 주변의 넓은 들판은 모두가 포도밭이요, 가파른 산 중턱까지 계단식 포도밭을 가꾸어 놓았다. 안개비가 도로를 촉촉하게 적시는 모데나 지방을 지나, 오후 6시 15분에 이태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지난다. 요들 송의 본고장, 순박함의 상징, 알프스 소녀의 예쁜 복장이 떠오르는 티롤 지방의 산촌이 계속 눈앞에 펼쳐진다.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티롤 지방, 독일어와 이태리어가 공용어인 지방이다. 이곳은 역사의 변천과 함께 오스트리아와 이태리가 4번을 번갈아 차지했던 곳이라 한다. 합스부르크 시대부터 인스부루크는 이 지방의 주도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향해 셧터를 계속 눌러대는 동안에도 차는 달려 어둠이 질 무렵 인스브루크에 도착했다.
인스부루크
해발 574 미터의 고원에 위치한 “알프스의 장미”라고 불리는 인구 12만의 깨끗하고 유서 깊은 도시.
석회석이 섞인 빙하가 녹아 우유 빛 물이 흐르는 “인강 위에 놓인 다리”를 뜻하는 이름이 INNSBRUCK라고 한다.
해발 2,334 미터의 노르드케테(Nordkette :북쪽의 쇄 사슬) 산과, 크고 작은 알프스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도시를 바로 뒤에서 감싸 안고 있는 이곳에서, 1964년과 1976년에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것으로 우리에게도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노르드케테 산이 많은 산악인들을 유혹하기도 하고,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알피니 파크 호텔에 들어간 것이 오후 8시, 저녁식사 때를 맞춘 시간이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호텔 종업원들이 마음에 든다.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일부는 민속공연을 관람하기 위하여 공연장으로 가고, 우리 연배의 세 부부는 룸에서 간단한 와인 파티로 피로를 풀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가방을 챙겨놓고 식당으로 내려오는데, 프런트에서 나이가 듬직한 종업원이 “안녕하세요?”라고 우리말로 인사를 한다. 이태리에서 느끼던 분위기가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가서 가방을 갖고 내려와 버스에 올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리로 간다.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에서 7위를 한 거리답게 도로 바닥이 깨끗이 물청소가 되어 있을 정도다. 노르드 케테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18세기 유럽 역사의 중심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여성이 남겨놓은 유산들을 보면서, 나는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위대한 여성을 생각하게 된다.
Maria Theresa(1717 ~ 1780)는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1740~80 재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1745~65 재위)의 황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65~90 재위)의 모후였으며,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뜨와네뜨의 어머니.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아 정략결혼을 시켜 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제였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1778-1779)까지 치르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외교와 정치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의 세력 각축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질적인 나라들이 모여 있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매력적인 자연스러움을 가진 왕녀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 중 하나였고 어떤 역사가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건물의 테라스마다 예쁜 꽃들로 장식한 거리에서 막스밀리안 1세의 기념관이 된 황금 지붕의 집, 품위 있게 보전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옛 궁전과, 인강 위에 놓인 다리 등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2시간가량의 시내 관광을 마치고, 독일의 퓌센으로 가기 위하여 다시 길을 재촉한다.
퓌센(2006년 9월 23일 토요일)
독일의 퓌센으로 이동하는 길은, 양쪽 옆에 나무숲이 울창한 12번 고속도로다. 저속으로 차가 달리는 동안에 버스에서는 요들송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창 밖으로는 그림 같은 알프스의 풍경들이 자꾸만 우리의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초원 위에서 풀을 뜯는 소들은 초지의 넓이에 비하여 너무나 그 숫자가 적다. 의아하게 생각되어 물어보니, 대부분 목초를 생산하여 수출하기 위한 초지들이라는 안내자의 대답이다. 그러고 보니 하얀 비닐에 말린 목초를 묶어 쌓아 놓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여행 안내자가 국경을 넘어 독일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해서야 우리는 지금 독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운의 젊은 왕 루드비히 2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슈 반가 우 숲 속에 있는 호엔 슈 반 가우 성과, 거울 같이 맑은 백조의 호수, 그리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백조의 성이라고 불리는 노이 슈 반슈 타인 성을 보기 위하여 가고 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백조의 성. 주차장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우선 점심을 먹고, 빵 몇 조각씩을 들고 백조의 호수로 가서 백조에게 먹이를 준다. 오리와 백조들이 관광객에게서 먹이를 받아먹으며, 기꺼이 사진도 같이 찍으라고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퓌센에서 4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호엔 슈 반가 우 성은 바이에른 공국의 막시밀리안 2세가 지어, 루드비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노이 슈 반 슈타인 성은 열여덟 살에 왕이 된 루드비히 2세가 세웠다.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되었을 정도로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과 같은 노이 슈 반 슈타인 성은 바그너를 위하여 세웠다고 할 정도로 벽화를 온통 바그너 음악의 주제들을 묘사해 놓았다고 한다. 4층 음악실 벽에는 파르시팔의 생애를 묘사했고, 서재에는 탄호이저의 모험담을 그려 놓았으며, 큰 응접실은 로엔그린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꾸며 놓았다. 루드비히 2세, 그는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비운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멋진 예술 애호가로 낭만적인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그너를 너무 존경하고 그의 천재성을 아꼈던 것이, 그리고 많은 그의 부채를 갚아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무리하게 재정을 쏟아부으며 노이 슈 반 슈타인 성을 스스로 설계하여 건축한 것이, 많은 귀족들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여, 엉뚱한 오명을 뒤집어쓰고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 것이리라.
성의 뒤쪽 수 십 길 계곡 위에 놓인 “마리엔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성의 내부를 관람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아름다운 알프스의 마지막 지방 퓌센을 뒤로하고, 남부 독일의 평원을 달려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향한다.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358 킬로미터의 로맨틱 가도, 언뜻 듣기에는 아름다운 로맨스라도 일어날 듯 하지만,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그 옛날 로마 병정들이 독일을 침공할 때 이 길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붉은 지붕에, 벽에는 하얀 회 칠을 한 농촌 집들이 띄엄띄엄 마을을 이루고, 쭉 쭉 뻗은 전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는 넓은 평원이 아름답다. 군데군데 노란 유채꽃이 아직도 피어 있어, 지금이 9월 하순인데 겨울이 오기 전에 씨앗을 맺어 수확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더니, 이 지방은 늦가을까지 기온이 높아 2 모작을 하고 있다는 안내자의 설명이다.
중간에 예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리니, 이태리와는 또 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0.5 유로를 지불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영수증과 같은 티켓을 받게 되고, 그 티켓은 매점에서 물건을 살 때 현금과 같은 가치를 발휘한다. 즉 매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는 화장실 사용을 무료로 하여준다는 식이다. 이태리보다는 합리적인 것 같지만, 나라마다 지방마다 자기들의 문화가 따로 있으니, 여행자들이야 거기 맞추어야 할 뿐이지 다른 도리가 없다.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대학 앞 광장에 버스가 도착한 것은, 오후 6시 무렵이다. 17세기 때의 건축물이 전쟁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던 것을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대학 뒤 언덕의 고성에 석양의 붉은 노을이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유서 깊은 이 대학 도시가 젊음의 활기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고색창연한 적막의 거리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활동이 멎은 때 이기도 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 건축물의 재료가 붉은 대리석인 데다 그 위에 처연한 황혼이 내리고 있었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었고, 헤겔, 야스퍼스 등 독일을 대표하던 철학자들이 있었으며, 노벨상 수상자를 7 명이나 배출했다.
도시 전체 인구 13만 명중에 3만 명이 학생이기 때문에 경찰 당국에서도 학생들의 사소한 범법 행위는 직접 처벌을 하지 않고 학교로 위임을 하면 학교에서 가벼운 징계를 내린다고 한다. 학교 설명을 대강 듣고,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상점에 들려 가벼운 선물들을 구매하고, 네 카우 강 위에 놓인 칼테 어도르 황제의 이름을 따온 다리에서 건너다 보이는 숲 속의 오솔길에 있는, 괴테가 사색을 하며 거닐었을 “철학자의 거리”를 뒤로하고, 어둠이 짙어지는 거리를 지나 버스에 오른다.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신흥 공업도시 맨하임에 있는 노보텔 맨하임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고 나니, 인스부루크를 떠나 퓌센과, 하이델베르크를 점만 찍고 다닌 13 시간,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긴 채 오늘의 강행군은 마무리가 잘된 듯하다.
프랑크푸르트, 다시 파리로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아침 7시 30분까지 서둘러 조반을 마치고,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전에 로렐라이 언덕을 찾기 위하여 아우토반이라고 하는 독일이 자랑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이곳은 속도제한이 없다고 하지만, 관광버스만은 예외이다. 90 킬로미터의 변함없는 속도를 유지하는 퇴직을 몇 달 앞둔 버스기사의 안전운행이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근처를 지나면서 방음벽 담장을 뒤덮은 덩굴식물의 눈부신 하얀 꽃이 인상적이다. 멀리 지나면서 보기에는 우리나라의 인동 초 덩굴과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는데, 나중에 로렐라이 언덕 위에서도 볼 수 있어서 자세히 보니, 향기부터가 다르고 꽃 모양도 판이하다. 꽃 이름을 알고 싶어 한 송이 꺾어서 간직했다가 프랑크푸르트의 교포가 운영하는 “길손 식당”에 와서 물어봤더니 꽃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로렐라이 언덕으로 가기 위하여 라인강 물줄기를 따라 이어진 국도를 달리면서도 드넓은 포도밭이 계속된다. 라인 지구는 독일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맛 좋은 아이스 와인도 생산한다는데, 서리가 내릴 때까지 포도 수확을 미루다가, 약간 얼어있는 상태의 당도가 높아진 포도를 수확하여, 두 번의 부랜딩 과정을 거쳐 아이스 와인을 제조하는데, 보통 와인을 생산할 때의 여섯 배의 포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한계령 고개를 오르듯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돌아 올라간 로렐라이 언덕. 도로에서 볼 때는 절벽 위에 좁다란 봉우리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면서 올라가 보니, 넓은 고원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농촌마을이 평화롭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라인강 물줄기는 회색 빛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아래 고요한 라인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어렸을 때 부르던, 시인 하이네가 썼다는 노래 말이 생각난다. 비교적 잔잔하게 흐르는 라인강 물줄기가 로렐라이 절벽 부근을 흐르면서 굽이치며 급 물살을 이루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더욱 조심을 해야 했건만, 130 미터나 되는 절벽 위의 풍광과, 주변의 수려한 경관에 한 눈을 팔던 뱃사람들이 강 가운데 있는 바위에 부딪혀 배가 뒤집히게 된 것을, 문학가들이 만들어낸 슬픈 전설 속에 로렐라이라는 금발의 마녀가 노래를 부르며 뱃사람을 유혹해서 배가 뒤집히게 했다는 전설이 생각나서,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맥없이 덤 터기만 쓰게 된 마녀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강 건너 산 위의 아름다운 집들을 카메라에 담아 간직했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 앞에는 큰 도토리나무가 잘 익은 도토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고, 아까 버스가 프랑크푸르트 공항 부근을 달릴 때 보던 덩굴 식물의 화려한 꽃 덤불이 무더기로 피어 있어서 주변을 한결 환하게 해주고 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우리가 내려오는 동안에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들과 화물선들이 계속해서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가서, 미주 쪽에서 온 일행 중 오전 비행기를 타게 될 8 명을 보내고, 나머지 16 명이 다시 시내로 들어와서 교포가 운영하는 “길손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다. 이 식당에는 우리나라의 유명인들이 다녀갔다는 증표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았는데, 高 銀 시인의 서명도 볼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먹던 한식보다 훨씬 푸짐하고, 김치도 듬뿍듬뿍 넉넉하게 준다. 이곳 프랑크푸르트에는 농장을 경영하는 교포들도 있어서 한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저렴하게 재료를 공급해 준다고 한다.
휴식을 취한 후, 오후 비행기를 타게 될 8 명을 다시 공항에서 작별하고 나니, 이제 버스에는 8 명만 남아 파리를 향해 떠난다. 공항에서 나오는 길에 축구 경기장을 지나오는데, 지난 월드컵 경기 때 우리 선수들이 토고 선수들과 경기를 펼친 곳이라 한다. 차 범 근 씨가 선수 시절 이곳에서 뛰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사실 프랑크푸르트는 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왔다 갔다만 했을 뿐, 식당에서 점심 한 끼 먹은 것이 전부이지만, 괴테의 생가에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많았지만, 시간이 허용되지 않아 섭섭한 채로 그냥 떠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2차 대전 당시 그의 고향 집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유품들이 이웃 주민들에 의해 모두 도난당했던 것으로 알았는데, 전후 기념관을 개관했을 때 없어졌던 그 많은 유품들이 빠짐없이 되돌려졌었다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위대한 문학가의 유물을 하나라도 보존하기 위하여, 이웃 주민들이 그 유품들을 몇 개씩 나누어서 갖고 피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독일 국민들의 그러한 정신이 오늘의 富와 선진 문화국가 독일을 이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현대식 고층 빌딩들이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오후 1시 50분에 출발하여 마인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맨하임의 북쪽을 지날 때 커다란 벤츠 마크가 있는 공장을 보았다. 아마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타고싶어 하는 벤츠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인 듯하다. 우리의 버스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달려 4시에 국경을 지난다. 여행객들은 그대로 차에 앉아 있는 동안 기사가 여행자 명단을 들고 세관에 가서 신고만 하면 그냥 통과다.
국경을 통과하면 프랑스의 동북지역인 알자스와 로렌 지방이다. 이곳도 1871년 이후 프랑스 땅이었다가 독일 땅이 되기를 몇 번 거듭하여 지금은 프랑스 땅이 되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알퐁스 도오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 이 생각나는 곳이다.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유발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감동적으로 읽던 기억이 새롭다.
7시간 이상을 달려 밤 9시 30분에야 파리에 도착하니, 시드니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들이 와서, 제 누나와 같이 마중을 나왔다. 4년 동안을 서로 떨어져 살던 아들과 딸과 우리 식구 모두가 한데 모였다.
센 강 유람선 & 몽마르트르 언덕 (2006년 9월 25/26일 월/화요일)
열 아흐레째 날 (9월 25일 월요일) 바토 무슈 – 센 강 유람선
딸아이가 출근을 한 후 아내는 아들과 함께 시내 관광을 나갔다. 나는 오전 동안 컴퓨터를 갖고 씨름을 하다가, 저녁에 에펠탑 아래에서 센 강 유람선을 타기로 해서, 6시쯤 시내버스를 타고 나갔다. 시내 관광을 마친 아내와 아들이 퇴근시간에 맞추어 딸의 사무실에 들러 7시 반에 같이 약속 장소에 나왔다.
가족 전체가 함께 시내에서 모였다. 모두들 좋은 모양이다. 말이 많지 않던 아내도 연신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딸아이는 샹 드 마리스 잔디밭에서 자동 셔터를 장치해 놓고 전체 가족사진을 찍는다. 에펠탑에 점등이 되고 사이요 궁전에도 불을 켰다.
센 강의 선상 유람은 밤에 라야 제격인 모양이다. 밤 9시에 에펠탑을 출발하여 한 시간 동안 시테섬을 돌아오는 코스라서 승선할 시간이 아직 이르다. 사이요 궁전 쪽으로 걸어가서 불 켜진 에펠탑을 보는 것도 장관인데, 매시간마다 10분씩 벌어지는 폭죽을 터트리는 것 같은 찬란한 불빛 쇼는 더욱 황홀하다. 사이요 궁전 쪽으로 가다가 저녁을 먹기까지 배가 너무 고플 것 같아 빵을 두 개 사서 벤치에 앉아 넷이서 나누어 먹는데, 8시에 예의 그 반짝거리는 에펠탑의 불놀이 쇼가 시작된다.
아들은 연신 사진을 찍는다. 파리의 야경은 또 하나의 볼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파리 시내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유람선을 타고 가는 동안 눈에 들어온다. 방송을 통해 그 건축물들과 센 강 위에 놓인 36개나 되는 그 많은 다리들에 대한 설명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이어진다. 다리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품들이다. 다리를 건너면서는 보이지 않을 교각이나 난간에 수많은 조각을 장식하고 심지어 금박까지 입힌 것은 유람선을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을까? 다리는 교통수단을 위한 다리일 뿐이라는 기존의 내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위해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쏟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파리에 오기 전에는 센 강 위에 놓인 다리라고는 오직 미라보 다리만을 아름답게 상상하고, 기억했을 뿐이었는데, 정작 와서 보니 알렉상드르 3세 다리나, 퐁뇌프 다리 등 대부분의 다리들이 미라보 다리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품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 연배의 사람들이 미라보 다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기욤 아플리네르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첫사랑과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 아름다운 시 “미라보 다리” 때문일 것이라 생각이 되어 여기 그의 시를 옮겨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 파리의 다리 아래로 영원한 시선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네.
사랑은 흘러간다 이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얼마나 인생은 느리고 또 얼마나 희망은 강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네.
날이 가고 내일이 지나가고 가버린 시간도 옛 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네.
센 강 위에 놓인 36개의 다리 중에는 2개의 전차 전용 다리와, 2개의 자동차 전용 다리가 있지만, 루브르 박물관 옆에 있는 데 자르 다리, 에펠탑 근처의 드빌리 다리, 오세르 미술관 옆에 있는 솔페리노 다리 등은 보행자 전용 다리라고 한다. 이러한 보행자 전용 다리들은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로서의 구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데, 우리 서울에서도 잠수교를 보행 전용 다리로 만든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언제쯤 시행될지는 모르지만 기대가 된다. 배가 시테 섬과 쌩 루이 섬을 한 바퀴 돌아오는 한 시간 동안, 밤바람이 차가워, 아내는 옷을 얇게 입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스무 번 째 되는 날 (9월 26일 화요일) 몽마르트 언덕
몽마르트르는 순교자들의 시체를 쌓아 두었던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0세기에는 가난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언덕 위 성당 옆에 포장마차 같은 정사각형의 카페가 있는데, 그 주변에 빙 둘러 화판을 놓고 관광객들에게 그림을 팔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사진은 이 언덕 위에 서있는 비잔틴 양식의 하얀 성당 사크레 쾨르인데 19세기 말 보불 전쟁 후 시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건축을 시작한 후 40년 만인 1914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50킬로미터 내의 파리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환상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오다 한적한 벤치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고,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쉬다가 내려와, 전철을 타고 아들이 가보지 못한 팡테옹과 뤽상부르그 궁전과,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뤽상부르그 공원에서 파리의 가을을 만끽한 것도 추억으로 남으리라.
벨 사유 궁전 (2006. 09. 28.)
9월28일 목요일 – 휴식과 독서
오늘은 딸아이의 생일이다. 모처럼 온 식구가 모여서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기뻤다. 제 동생은 어제 케이크를 준비하였고, 나는 베네치아에서 제프로부터 선물 받은 샴페인을 내고, 제 어머니는 미역국을 준비하여 아침상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며 내일 가기로 예정된 벨사유 궁전에 대한 기록을 읽었다.
벨사유 궁전(2006년 9월 29일 금요일
아침 9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지만, 버스로 40분을,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기다리는 시간을 합해 1시간, 벨사유에 도착하고 보니 11시 30분이 넘었다. 전철역에서 5분 정도 걸어가니, 넓은 광장에 대형 관광버스들이 꽉 들어차 있다. 줄을 서서 한참 만에야 20유로 짜리 궁궐 전체를 관람할 수 있는 패스 포트 3장을 사서 들어갔다.
부르봉 왕조의 영화와 몰락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이곳, 또한 프랑스의 영광과 굴욕을 간직한 곳이 바로 이곳 벨사유 궁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1871년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가 이곳에서 독일 황제로서 대관식을 갖음으로 프랑스인들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으며, 프랑스인들은 그때의 굴욕을 갚기 위하여1919년 1차 대전의 종말을 결정짓는 베르사유 조약을 이곳에서 맺음으로 독일의 무릎을 꿇게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각국의 정상회의가 가끔 이곳에서 열기기도 한다는데, 여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 내부의 화려함을 보면서 절대왕정시대의 영화와, 그 화려함 속에 가려진 그 당시 이 나라 백성들의 고통을 동시에 볼 수 있을지가 궁금하게 느껴졌다.
루이 13세의 전용 사냥터와 사냥 때 사용하던 별궁이였던 이곳을 5살에 왕위에 올라 세계 역사상 전무 후 무한 72년의 제위 동안 ‘짐이 곧 국가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태양왕이라고 지칭하던 루이 14세가 1668년부터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여 50년 동안 국력을 쏟아부어 호화로운 궁전과 드넓은 정원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왕위를 이어받은 증손자 루이 15세와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16세는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로 결국 국고는 바닥이 나고, 이로 인한 왕조의 몰락을 자초하여, 결국 분노한 시민 혁명 군에 의하여 이곳에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건물 2층 왕실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광활한 정원의 모습을 걸어서 다 돌아다니려면 몇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가 없다. 십자형으로 조성된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의 폭이 센 강을 능가할 정도이고, 아름다운 조각에서 물을 뿜는 엄청나게 큰 분수만도 라톤, 넵튠, 아폴론, 거울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름 모를 갖가지 꽃들로 아름답게 꾸며진 화단과, 울창한 수목이 우거진 숲은 기하학적으로 설계되었다고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조성된 산책로를 다 합하면 수십 킬로미터는 넉넉할 듯하다. 당시에는 정원을 관리하던 정원사가 귀족이 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왕을 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접을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넓은 정원을 관람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는 사람들, 4인용 전동차를 빌려 타고 다니는 사람들, 기차처럼 여러 칸이 연결된 차량에 탑승하고 다니며 구경하는 사람들 등 각양각색이다. 자전거를 1시간 빌리는데 6유로(7,500원), 4인용 전동차가 1시간에 28 유로, 기차도 1인 당 비슷한 수준의 요금을 받는다고 하는데, 아무튼 1시간에 다 돌아다닐 수가 없을 것 같아 차라리 걷기로 하고, 2시가 다 되어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약 4시간을 쉬엄쉬엄 사진도 촬영하면서 걸어 다녔다.
화려한 대 궁전에서 드넓은 정원을 지나 루이 14세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 왕비와 조용 히 살기 위하여지었다는 아름다운 홍반 대리석 기둥이 유명한 그랑(大) 트리아농과, 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드르를 위하여지었던 프티(小) 트리아농에도 가 볼만한 곳이다.
태양왕은 처음 생각으로는 적당한 시기에 왕좌를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생각을 했었겠지만, 정작 그가 죽을 때까지 권좌에서 물러날 줄을 몰랐고, 그랑 트리아농에서 조용한 만년을 지내기는커녕 72년을 권좌에 있다가 벨사유의 왕의 방에서 죽음으로, 왕권은 증손자인 루이 15세 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프티 트리아농은 루이 16세가 상속을 받아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선물하였고, 그녀는 이곳에서 취미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가축 사육장이 딸린 그곳에서 손수 소젖을 짜기도 했다고 한다.
절대 권력자들은 항상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혹독했을 지라도 후대 사람들에게는 많은 관광자원을 남겨준다는 아이러니를 실감하면서 오후 6시가 넘어서야 궁을 나와 다시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