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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 계몽주의 철학

개요

또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는 수학을 자연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데 기초한 최초의 위대한 물리학적 종합이었다. 이성이 권위와 자율성을 지닌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근본적으로 뉴턴 연구의 귀결이었으며, 18세기에 모든 철학작업을 지배했다.

 

전통적 영국 경험론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실재에서 정신의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관심을 돌리고 그 정신의 장치들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면서, 르네상스의 초점이었던 단순한 수학적 인식요소보다는 감각적 인식요소에 의존했다. 이른바 영국 경험론 학파는 칸트 시대 이전까지 계몽주의 철학을 이끌어나갔으며 사물보다는 관념, 본유적·필연적 원리보다는 경험을 기반으로 철학을 연구했다.

존 로트의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은 진리의 새로운 기준을 제안함으로써 근대 철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적으로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 책의 본래 의도는 "인간 인식의 기원, 확실성,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다음의 3가지 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인간 관념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 둘째는 이 관념의 확실성과 증거로서의 가치를 밝히는 것, 셋째는 덜 확실한 모든 인식의 권리를 검토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일반 관례에 따라 로크는 '관념'을 "인간이 사유할 때 지성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모든 합리론 학파에게 관념의 확실성은 그 자명성, 즉 그 명석성과 판명성의 함수였던 반면 로크에게 관념의 타당성은 분명히 그 관념이 생기는 양상과 방식에 달려 있었다.

〈인간 오성론〉에서 로크는 기초적 감각의 벽돌들을 가지고 인간이 개념적으로 경험하는 전세계를 만들어내려 했다. 그의 인식론의 기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 관념의 궁극적 원천은 감각이고, 모든 정신작용은 단순한 감각자료를 결합하고 혼합하여 복잡한 개념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색인 : 감각 여건). 로크는 굳기·형태·연장(延長)·운동·정지 등 대상 자체의 실제 특성인 '제1성질'과 색·맛·냄새 등 정신이 대상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내적 결과일 뿐인 '제2성질'을 구분했다.

로크를 계승한 조지 버클리(1685~1753)가 극복하려 애쓴 것은 바로 이러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이원론이었다. 버클리는 궁극적으로 제1성질이 제2성질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험론은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 개념이란 마음이 꾸며낸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과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감각 인상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리고 과학은 물질이라는 개념이 없어도 잘될 수 있다고 논증했다. 자연은 인간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일 뿐이며, 이 말은 감각자료를 '실체에 붙어 있는 성질'이라기보다 '마음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1711~76)도 인식의 기원을 감각인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로크가 마음의 능력에 믿을 만한 질서가 있다고 보고 버클리가 어떤 정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심성 자체를 인정한 반면 흄은 집요한 분석을 통해 외부세계뿐 아니라 마음에도 우연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지각경험의 모든 통일성은 '마음의 연합능력'에서 나온다. '관념들의 연합'은 사실이지만 이 연합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인접성·인과성 등의 관계는 본질적 타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습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인식이 기초로 삼는 인과원리는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 사물들이 항상 연결되는 우연적 사건일 뿐이다.

 

그 밖의 계몽주의 운동

영국 경험론 학파가 18세기에 탄생한 유일한 철학 유형은 결코 아니었다. 지적·철학적 표현면에서 계몽주의의 본류에서 갈라진 경향들이 많이 생겨났다. 라마르크의 기사인 장 바티스트, 조르주 퀴비에, 뷔퐁 백작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등은 동물 분류체계를 완성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 후작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몽테스키외,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비코, 영국의 애덤 스미스 등은 역사학·경제학·사회학·법률학이 과학으로서 출발하는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흄, 제러미 벤담, 영국의 도덕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전문적 철학 연구분야로 만들고 있었다. 샤프츠버리 백작 3세인 앤소니 애슐리, 에드먼드 버크, 요한 고트셰트,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등은 체계적 미학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인식론 외에 계몽주의가 크게 기여한 분야는 사회·정치 철학이었다. 로크의 〈시민정부론 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1690)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1762)은 그 시대의 더욱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을 바탕으로 정치 결사를 정당화했다. 로크와 루소에게서 모든 근대 자유주의의 싹, 즉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시민의 자유, 인간의 근본적 존엄 등에 대한 신념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였다. 정치문제는 자유와 불평등의 문제였으며, 정치이론은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로크의 정치이론은 왕의 신성한 권리와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색인 : 왕권신수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본래 살고 있는 자연상태는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 서로 뭉쳐 사회를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결코 그 궁극목적인 공익과 무관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루소의 경우에도 사회계약이라는 협약이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모든 합법적 권위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개인의 모든 권리가 일반 의지에 예속되는 만큼 자연상태의 자유는 시민사회의 자유에 종속되어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체로서 그 생명은 구성원들의 결합이고, 그 법은 일반의지의 행위이며 그 목적은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다. 정부가 국민의 권력을 찬탈할 때 시민은 저항할 의무가 있다.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적 고찰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진정한 절정을 뚜렷이 보여준다. 칸트의 실질적인 위대한 업적은 인식에서 감각적 요소와 선천적 요소를 관련시킴으로써 라이프니츠의 극단적 합리론과 흄의 극단적 경험론 사이의 불화를 해소한 것이었다. 칸트는 또 철학의 새로운 정의, 철학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 철학 서술의 새로운 구조적 모형 등을 제시했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철학은 "모든 인식과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건설적(순수이성에서 생기는 모든 인식의 체계를 묘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판적(한계를 잊은 이성의 망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인간인식의 원천·범위·타당성과 이성의 궁극적 한계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는 특별한 철학방법이 필요하다.

칸트의 방법은 선천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성이 경험없이도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기초는 인간의 인식이 대상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 아니라 대상이 인간의 인식기구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인식기구의 정확한 성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와 그밖의 문제에 대답하려는 시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의 과제였다. 그러나 칸트의 위대한 목적은 이성을 어느 한 영역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각 영역에서 고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사유(과학)에서는 〈순수이성비판〉, 의지(윤리학)에서는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 감성(미학)에서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 각각 다룬다.

 

19세기 서양철학

 

개요

정치적으로 19세기는 나폴레옹의 통령정부로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60주년 기념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철학적 중요성을 가진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지적·사회적 변화들이다. 19세기초의 낭만주의 운동은 감성을 받들고 이성에 반대한 문예 반란이었다. 산업혁명은 사회에 엄청난 불행을 낳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파리·독일·빈에서 일어난 혁명은 계급의 분화를 상징했으며 유럽인의 의식 속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심었다. 마지막으로 다윈은 생물과학에 격동을 일으켰고 생물학적 진화관념을 도입했다.

 

독일 관념론

19세기초의 뚜렷한 특징은 철학에서 형이상학 정신의 부활이었다. 독일 관념론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사변적 주장을 최고수준으로 되살렸다. 이러한 전환은 주로 철학이 종교와 새로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이 종교적 제휴의 결과 철학적 관심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학을 설명하려 했고 형이상학에서 확실한 인식을 얻을 가능성을 부인했음)에서 〈실천이성 비판〉(이 책에서는 도덕적 자아의 본성을 탐구했음)과 〈판단력 비판〉(이 책에서는 전체로서 우주의 합목적성을 제안했음)으로 옮겨갔다. 절대적 관념론은 다음의 3가지 전제를 기초로 삼았다. 첫째, 철학의 주요사항은 인간의 자아와 자기의식이다. 둘째, 세계는 전체로서 정신적이며 사실상 우주 자아와 비슷한 것이다. 셋째, 자아와 세계에서 지성보다는 의지와 도덕성이 더 중요하다.

요한 피히테(1762~1814)는 인간의 자기의식이 1차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이고, 이 사실을 통해 철학자는 '절대자'인 우주의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의식의 명료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식의 최고단계는 철학자가 성취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만이 '마음' 또는 '정신'을 실재의 중심원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이러한 사유노선을 더 밀고 나갔다. 칸트가 이성을 정신이 세계에 부과하는 형식으로 본 데 반해 헤겔은 이성을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것, 즉 정신이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이 발견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피히테가 의식을 정신에서 현실로 투영했다면 헤겔은 이성을 투영했다. 그결과로 나온 헤겔의 주장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와 "진리는 전체이다" 등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논리학과 형이상학,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 사이에 설정한 통상적 구분을 희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절대자 또는 전체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며 정지해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중요한 발전을 거친다. 헤겔은 이 진화를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이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이성 자체가 영원하지 않고 '역사적'임을 지적했고 인간 사회의 변화하는 역사 상황에 새로운 의미와 관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헤겔은 철학이 이전에 지니지 못한 문화적 차원을 철학의 과제에 추가했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자의 사명은 의식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하고, 절대자를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정신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이 정신적 존재의 본질이고 자기 확대가 그 존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성과 문화의 다양한 분야, 즉 심리학·사회정치학·미학·종교·철학 등은 세계정신이 펼쳐지는 단계들이 된다.

 

실증주의와 사회이론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1798~1857)는 위대한 철학적 과학사인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42)를 썼다. 콩트는 자기 철학을 '실증주의'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과학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도출되지 않은 어떤 '인식'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부인하는 좁은 과학철학을 의미했다. 콩트는 과학철학에서 반(反)종교적·반형이상학적 경향을 일으켰는데, 이 경향은 20세기로 이어졌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경험론 전통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은 존 스튜어트 밀(1806~73)이었다. 밀의 인식론은 모호한 형이상학에 대한 불신, 인식에서 선천적 요소의 거부, 모든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한 단호한 반대 등을 보여주었다. 밀의 중요성은 인식론보다는 윤리학과 정치이론에 있었다. 그의 사회이론은 산업혁명의 해악에 맞서 싸운 시도였다. 〈공리주의 Utilitarianism〉(1861)에 표현되어 있는 그의 윤리학은 사회 구성원의 최대 행복을 산출하고 개인의 도덕적 자아를 발달시키는 것이 사회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다른 저작들에서 밀은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사상과 토론의 완전한 자유를 지지하는 논증을 제시했다. 대의 민주주의 원리를 전형적으로 변호했고 계급지향적 입법이나 특수한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입법의 위험을 지적했다. 밀의 자유주의 이념을 근본적으로 견제하는 이론을 독일의 혁명적 정치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1818~83)가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이어받은 소외개념(헤겔은 이 개념을 형이상학적 의미로 씀)을 사용하여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을 누리지 못하는 소외현상, 인간의 노동을 단순한 상품으로 형편없이 취급하는 현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 등을 지적했다. 유명한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에서 마르크스는 기존 질서의 폭력적 전복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든 역사는 착취하는 소수의 부르주아지와 밑바닥에 있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을 세워 권력의 장악과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수립을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일깨우자고 역설했다( 색인 : 계급투쟁).

마르크스의 혁명 열정은 서양에서 그의 철학적 명성을 위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몇가지 철학적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는 사회가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반대세력들의 유동적인 균형체(변증법)라는 생각, 엄밀한 경제결정론과 혁명 계획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는 생각, 관념은 그것이 생겨나는 사회질서의 성격에 의존한다는 생각 등이다.

 

독자적 비합리주의 운동

19세기말에는 많은 독자적 철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헤겔의 영향이 영국에 퍼져 T.H. 그린, F.H. 브래들리, 버나드 보즌켓 등이 새로운 헤겔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관념론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 찰스 샌더스 퍼스와 윌리엄 제임스의 주도로 실증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퍼스는 철저한 논리학자였으며, 모든 연구의 기능은 의심을 뿌리뽑는 것이고 한 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실천적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 Will to Believe, The〉(1897)와 그밖의 저서에서 퍼스의 실용주의적 의미론을 실용주의적 진리론으로 변형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철학이 지닌 독특한 색깔은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강조였다. 헤겔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도전을 받았다. 덴마크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55)는 헤겔 체계의 논리적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는 비합리적인 것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헤겔에 맞섰다.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등은 19세기를 위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비합리적 관점을 마련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주의가 인간의 실존과 이 실존의 주체적·생동적·정서적 성격을 전혀 모른 채 무심하게 객관적·추상적으로 이론을 세우고 체계를 구성한 완벽한 본보기라고 비꼬았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가 아니라 그의 정서생활의 실존 조건, 즉 불안과 절망 속에 담겨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3가지 저서 〈공포와 전율 Frygt og baeven〉(1843)·〈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1844)·〈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oden〉(1849)의 제목은 그가 이전의 철학적 관심과는 아주 달리 의식상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는 과학 자체만으로는 현상 뒤의 진짜 세계를 꿰뚫어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진짜 세계는 강력하고 맹목적이며 분투하고 보편적인 우주 의지가 지배하며 이 우주 의지는 인간 본능의 변덕, 성적 충동, 모든 동물 행동의 거친 불확실성 등에서 나타난다. 이성적 과정이나 지적 명료함보다는 투쟁, 갈등, 불분명한 충동 등이 인간과 궁극적 실재의 참된 접촉이다. 독일의 문헌학교수 프리드리히 니체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체계적이지 못한 작가였으며, 철학자의 과제는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이상을 만들며 이 이상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삶과 권력에 봉사하는 데서 본능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몽상은 진리만큼이나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원한·죄의식·불쾌감·자기경멸 같은 상태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개요

정치적으로 19세기는 나폴레옹의 통령정부로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60주년 기념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철학적 중요성을 가진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지적·사회적 변화들이다. 19세기초의 낭만주의 운동은 감성을 받들고 이성에 반대한 문예 반란이었다. 산업혁명은 사회에 엄청난 불행을 낳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파리·독일·빈에서 일어난 혁명은 계급의 분화를 상징했으며 유럽인의 의식 속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심었다. 마지막으로 다윈은 생물과학에 격동을 일으켰고 생물학적 진화관념을 도입했다.

 

독일 관념론

19세기초의 뚜렷한 특징은 철학에서 형이상학 정신의 부활이었다. 독일 관념론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사변적 주장을 최고수준으로 되살렸다. 이러한 전환은 주로 철학이 종교와 새로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이 종교적 제휴의 결과 철학적 관심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학을 설명하려 했고 형이상학에서 확실한 인식을 얻을 가능성을 부인했음)에서 〈실천이성 비판〉(이 책에서는 도덕적 자아의 본성을 탐구했음)과 〈판단력 비판〉(이 책에서는 전체로서 우주의 합목적성을 제안했음)으로 옮겨갔다. 절대적 관념론은 다음의 3가지 전제를 기초로 삼았다. 첫째, 철학의 주요사항은 인간의 자아와 자기의식이다. 둘째, 세계는 전체로서 정신적이며 사실상 우주 자아와 비슷한 것이다. 셋째, 자아와 세계에서 지성보다는 의지와 도덕성이 더 중요하다.

요한 피히테(1762~1814)는 인간의 자기의식이 1차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이고, 이 사실을 통해 철학자는 '절대자'인 우주의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의식의 명료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식의 최고단계는 철학자가 성취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만이 '마음' 또는 '정신'을 실재의 중심원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이러한 사유노선을 더 밀고 나갔다. 칸트가 이성을 정신이 세계에 부과하는 형식으로 본 데 반해 헤겔은 이성을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것, 즉 정신이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이 발견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피히테가 의식을 정신에서 현실로 투영했다면 헤겔은 이성을 투영했다. 그결과로 나온 헤겔의 주장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와 "진리는 전체이다" 등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논리학과 형이상학,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 사이에 설정한 통상적 구분을 희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절대자 또는 전체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며 정지해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중요한 발전을 거친다. 헤겔은 이 진화를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이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이성 자체가 영원하지 않고 '역사적'임을 지적했고 인간 사회의 변화하는 역사 상황에 새로운 의미와 관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헤겔은 철학이 이전에 지니지 못한 문화적 차원을 철학의 과제에 추가했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자의 사명은 의식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하고, 절대자를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정신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이 정신적 존재의 본질이고 자기 확대가 그 존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성과 문화의 다양한 분야, 즉 심리학·사회정치학·미학·종교·철학 등은 세계정신이 펼쳐지는 단계들이 된다.

 

실증주의와 사회이론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1798~1857)는 위대한 철학적 과학사인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42)를 썼다. 콩트는 자기 철학을 '실증주의'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과학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도출되지 않은 어떤 '인식'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부인하는 좁은 과학철학을 의미했다. 콩트는 과학철학에서 반(反)종교적·반형이상학적 경향을 일으켰는데, 이 경향은 20세기로 이어졌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경험론 전통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은 존 스튜어트 밀(1806~73)이었다. 밀의 인식론은 모호한 형이상학에 대한 불신, 인식에서 선천적 요소의 거부, 모든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한 단호한 반대 등을 보여주었다. 밀의 중요성은 인식론보다는 윤리학과 정치이론에 있었다. 그의 사회이론은 산업혁명의 해악에 맞서 싸운 시도였다. 〈공리주의 Utilitarianism〉(1861)에 표현되어 있는 그의 윤리학은 사회 구성원의 최대 행복을 산출하고 개인의 도덕적 자아를 발달시키는 것이 사회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다른 저작들에서 밀은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사상과 토론의 완전한 자유를 지지하는 논증을 제시했다. 대의 민주주의 원리를 전형적으로 변호했고 계급지향적 입법이나 특수한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입법의 위험을 지적했다. 밀의 자유주의 이념을 근본적으로 견제하는 이론을 독일의 혁명적 정치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1818~83)가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이어받은 소외개념(헤겔은 이 개념을 형이상학적 의미로 씀)을 사용하여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을 누리지 못하는 소외현상, 인간의 노동을 단순한 상품으로 형편없이 취급하는 현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 등을 지적했다. 유명한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에서 마르크스는 기존 질서의 폭력적 전복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든 역사는 착취하는 소수의 부르주아지와 밑바닥에 있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을 세워 권력의 장악과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수립을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일깨우자고 역설했다( 색인 : 계급투쟁).

마르크스의 혁명 열정은 서양에서 그의 철학적 명성을 위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몇가지 철학적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는 사회가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반대세력들의 유동적인 균형체(변증법)라는 생각, 엄밀한 경제결정론과 혁명 계획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는 생각, 관념은 그것이 생겨나는 사회질서의 성격에 의존한다는 생각 등이다.

 

독자적 비합리주의 운동

19세기말에는 많은 독자적 철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헤겔의 영향이 영국에 퍼져 T.H. 그린, F.H. 브래들리, 버나드 보즌켓 등이 새로운 헤겔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관념론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 찰스 샌더스 퍼스와 윌리엄 제임스의 주도로 실증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퍼스는 철저한 논리학자였으며, 모든 연구의 기능은 의심을 뿌리뽑는 것이고 한 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실천적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 Will to Believe, The〉(1897)와 그밖의 저서에서 퍼스의 실용주의적 의미론을 실용주의적 진리론으로 변형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철학이 지닌 독특한 색깔은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강조였다. 헤겔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도전을 받았다. 덴마크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55)는 헤겔 체계의 논리적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는 비합리적인 것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헤겔에 맞섰다.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등은 19세기를 위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비합리적 관점을 마련했다.

키에르케로르는 헤겔주의가 인간의 실존과 이 실존의 주체적·생동적·정서적 성격을 전혀 모른 채 무심하게 객관적·추상적으로 이론을 세우고 체계를 구성한 완벽한 본보기라고 비꼬았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가 아니라 그의 정서생활의 실존 조건, 즉 불안과 절망 속에 담겨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3가지 저서 〈공포와 전율 Frygt og baeven〉(1843)·〈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1844)·〈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oden〉(1849)의 제목은 그가 이전의 철학적 관심과는 아주 달리 의식상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는 과학 자체만으로는 현상 뒤의 진짜 세계를 꿰뚫어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진짜 세계는 강력하고 맹목적이며 분투하고 보편적인 우주 의지가 지배하며 이 우주 의지는 인간 본능의 변덕, 성적 충동, 모든 동물 행동의 거친 불확실성 등에서 나타난다. 이성적 과정이나 지적 명료함보다는 투쟁, 갈등, 불분명한 충동 등이 인간과 궁극적 실재의 참된 접촉이다. 독일의 문헌학교수 프리드리히 니체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체계적이지 못한 작가였으며, 철학자의 과제는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이상을 만들며 이 이상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삶과 권력에 봉사하는 데서 본능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몽상은 진리만큼이나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원한·죄의식·불쾌감·자기경멸 같은 상태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