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중세 후기에도 이전의 철학하는 방식들이 계속되었고 특정의 사상학파들로 형성되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철학)를 항상 엄격하게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주의가 공식 가르침이 되었다. 프란테스코 수도회는 중세 후기 내내 토마스주의와 경쟁한 새로운 양식의 신학과 철학을 개발했다.
둔스 스코투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1265경~1308)는 철학이 인간의 지식욕을 채우기에 충분하고 적합하다는 이성주의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순수 철학자는 인간의 타락과 은총·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을 진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둔스 스코투스가 보기에 우주의 제일원동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은 그의 철학의 뚜렷한 한계였다.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제일원동자나 존재 자체라는 개념보다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완전한 개념이었다.
오컴
14세기 후반에는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를 '낡은 방식'의 철학이라고 불렀고, 반면 오컴(1285경~1347) 등이 시작한 철학을 '현대 방식'이라 여겼다. 오컴은 그리스-철학의 숙명론에 맞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며 창조물은 우연적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신의 자유는 창조의 긍정적 모형으로서 신의 이데아가 있다는 점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와 반대로 신은 창조할 때 미리 생각해둔 이데아를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우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결과 창조물들은 공통적인 본성이나 본질이 없다. 실재는 없고 개별 사물만 있을 뿐이다.
오컴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자유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은 열을 내지만 차가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또 도덕 질서도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신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인간에 대한 미움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데 인간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오컴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신의 존재를 확립할 때처럼 개연적 논증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신앙만이 이 문제와 그밖의 중요한 문제에 확실성을 제공한다. 오컴이 내놓은 또 하나의 원리는 가설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이 사유의 경제성 원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라 불린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경~1327/28)는 그리스도교와 신플라톤주의 양쪽에서 영감을 받은 사변적 신비주의를 발달시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이 신에게 상승하는 과정을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로 묘사했다. 즉 영혼은 육체에서 자신을 점점 순화함으로써 존재와 인식을 초월하여 결국 일자에 흡수된다. 그때 영혼은 최상의 지점 또는 '아성'(牙城)에서 신과 통일된다. 신 자신은 존재와 인식을 초월해 있다.
니콜라우스
쿠사의 니콜라우스(1401~64)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보다 신플라톤주의자를 더 좋아했다.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정신이 신에게 올라가는 데 장애물이 된다. 왜냐하면 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대립물의 양립가능성을 부정하는 모순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대립물의 일치'이다.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통일하여 포괄한다. 신은 극대이면서 동시에 극소이다.
이와 같이 중세 말기에 이르자 매우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몇몇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버리고 더 새로운 사유양식에 기울고 있었다. 다양하게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여전히 대학에서 강의되고 있었지만 그 생명력과 창조성을 잃어버렸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다시 한 번 신플라톤주의에서 영감을 얻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주의는 중세의 플라톤주의와 직결된 것이었다.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 서양철학
개요
유럽의 르네상스는 동양에서 3가지 기계 발명품이 들어온 직후 일어났다. 첫째, 화약은 봉건체제의 요새를 폭파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결과 교회의 지배를 위협한 민족주의라는 새 정신의 촉진제가 되었다. 둘째, 인쇄술은 학문을 널리 퍼뜨리고 세속화했으며 교회 상류층의 지식 독점을 줄였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철학·고전을 복원했다. 셋째, 나침반은 서반구를 개방한 신대륙 탐험여행을 일으켰으며 육체적 모험의 새로운 정신과 자연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관심을 상징했다.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
르네상스가 교회의 군림, 권위, 스콜라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시민사회·인간·자연에 초점을 맞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 이 3가지 관심은 르네상스 철학의 유력한 3갈래, 즉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으로 정확히 재현되었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민족적·국제적 문제가 새롭게 관심의 초점이 되자 유럽에서는 정치철학이 성장했다.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principe>(1512~13)과 그밖의 저서에서 '국가이성'을 도덕성보다 높이 평가하는 듯한 시각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기법을 연구했다. 마키아벨리의 연구 동기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려는 애국적 희망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낮은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덕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신념이었다. 17세기 영국에서 토머스 홉스는 문명에 앞선 '자연상태'에서 삶은 "힘들고 잔인하며 수명이 짧고",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적대한다"는 생각을 내놓았다(→ 색인 : 법철학). 홉스에 따르면 그래서 사람들은 전반적 보호와 법적 통치제도의 대가로 모든 사적 권리를 한 사람의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사회계약'에 동의했다.
17세기에 번성하고 종교적으로 관대한 상업국인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위대한 법학자 휘호 그로티우스(1583~1645)에게 교역권과 해상의 자유로운 출입을 변호하는 글을 써달라고 의뢰했다. 그결과 나온 그의 논문 2편은 국제법을 처음으로 성문화한 뜻깊은 것이었다. 이 논문의 독창성은 그로티우스가 '자연법' 개념의 원천과 타당성을 선구적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에 있다. '자연법' 사상은 자연적 정의와 도덕적 책임에 관한 절대적 신조들이 본래 인간의 이성 속에 있으므로, 이것은 주권국가의 횡포에 의해서도 바뀔 수 없으며 오히려 막강한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는 억제책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문주의는 과학에 대한 의심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에서 생겨났다. 인문주의가 인간의 개인적 책임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자신을 창조할 가능성을 강조한 것은 대부분 여러 주요고전 원문들을 재발견한 결과였다. 이 고전 원문들은 중세 학문의 흐름을 뒤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플라톤에 대한 열광은 메디치 가문이 지배한 피렌체와 그 주변에서 부활했다. 도덕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르네상스 교육의 요구에 들어맞았으며 관료와 신사에 대한 르네상스의 이상을 새롭게 뒷받침했다. 또 플라톤은 수학의 철학적 중요성을 강조했고 수와 정확한 계산으로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려는 피타고라스의 시도를 다시 보여주었다. 플라톤주의의 이 측면은 인문주의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영역으로 넘쳐 흘러들었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좁게 정의하여 종교·과학과 구분하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초점을 좁힌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야 이루어졌으며 그 시기는 적어도 18세기 이후였다.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초창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리세계에 대한 이론가들이었지만 철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이 폭넓은 생각을 유지했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는 수학자·물리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그리고 물리학은 적어도 아이작 뉴턴 경이 1727년 죽을 때까지는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까지 우주는 위계적·유기적이며 신이 정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우주는 다원적이고 기계 같으며 수학적 질서를 가진 것이었다. 중세에 학자들은 의도, 목적, 신의 의향 등의 견지에서 생각했고,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힘, 기계적 동인, 물리적 원인 등의 견지에서 생각했다. 이 모든 점은 15세기말에 이르면 뚜렷이 나타났다.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가·과학자·인문주의자이자 역학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 Notebooks〉 속에는 다음의 3가지 명제가 있다. 첫째, 경험은 누구든 좋은 글을 쓴 사람의 정부(情婦)였으므로 나는 경험을 나의 정부로 삼아 모든 문제에서 그것에 호소한다. 둘째, 도구과학 또는 역학은 가장 고귀하고 다른 어떤 과학보다 더 쓸모있으며, 움직이는 모든 활기찬 물체는 이 과학을 바탕으로 작용한다. 셋째, 수리과학이나 수리과학에 기초한 과학 중 어떤 것도 적용할 수 없는 곳에는 확실성이 없다. 이 3가지 명제를 통해 표현된 것은 첫째로 경험론의 원리, 둘째로 기계론적 과학의 옹호, 셋째로 수학적 설명에 대한 신앙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과 철학은 바로 이 3가지 정식을 기초로 삼았다.
16세기 중엽 벨기에 의사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해부절개와 그 소묘를 위해 새로운 도구를 발명했고, 인체의 혈관계·신경계·근육조직계를 밝혔다(→ 색인 : 해부학). 이러한 절차는 경험적 방법, 생리학 실험, 정확하고 숙련된 감각적 관찰 등의 장점을 증명하는 듯이 보였으며, 그 덕분에 베살리우스의 증명은 귀납절차의 고전이 되었다. 조금 뒤 이탈리아 물리학자 갈릴레오는 인체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베살리우스의 연구방식을 이용하여 지구와 별의 움직임을 파악하려 했다. 갈릴레오의 연구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매우 독창적인 경향들이 모두 무르익었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리아 수학의 부활, 실험에서 렌즈와 망원경 같은 새로운 도구의 사용, 수학이론을 틀림없이 응용할 수 있는 기초를 가진 물리학에서 확실성의 추구, 운동하는 물질이 수학적 단순성을 가진 모형과 일치하기 때문에 과학에서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일은 정당하다는 기본적 신념 등이었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등장
베살리우스의 엄밀한 관찰기법과 갈릴레오의 수학이론에 대한 의존 사이의 과학적 대조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과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 사이의 대조로 다시 나타났다. 경험론과 합리론 사이의 이 대조는 17~18세기의 철학논쟁을 지배했다. 르네상스 경험론의 탁월한 주창자인 프랜시스 베이컨 경(1561~1626)은 철학이 자연과학을 굳건한 토대 위에 재건해야 할 새로운 추론기법이라고 생각했다. 〈신 오르가논 Novum Organum〉(1620)에서 "철학의 참된 작업은 지성을 구체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조사에 응용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의 특징에 대한 그의 핵심 주장은 철학이 바로 이런 조사를 위한 기법이라는 점이었다.
베이컨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의식과 관찰의 우선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법칙과 일반명제를 이끌어냈다. 또 형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비플라톤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형상은 본질이 아니라 영원한 기하학적·역학적 구조였다. 그러나 철학의 역사에서 그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은 경험을 타당한 인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철저하게 옹호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는 철학의 방법에 대한 베이컨의 관심과 운동하는 물질에 대한 갈릴레오의 흥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노력은 같은 시대의 이 두 인물보다 더 폭넓고 완벽했다. 그는 근대 초기의 가장 체계적인 철학들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으며, 기계론적 유물론의 교의에 따라 자연·인간·시민사회를 매우 일관성있게 기술했다. 홉스는 규약주의의 관점에서 언어를 설명하여 마치 베이컨이 특수자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과 같은 양식으로 보편자(일반개념 또는 공통개념)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유명론(唯名論)의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홉스는 모든 인식의 기원이 감각인상이고 모든 감각은 외부의 물체가 감각기관에 작용함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했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의 영향들을 결합하여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면서도 당시 과학의 경향에 맞는 사상을 종합했다. 그뒤 모든 역사가는 마음 속으로 그를 현대 철학정신의 창시자로 꼽는다. 데카르트의 종합 속에는 과거부터 신에 관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론, 로마인들의 스토아 철학에 대한 깊은 공감, 고대 회의론자들인 피론과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에게서 간접적으로 얻은 회의적 방법 등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고, 많은 물리학적·해부학적 실험을 했으며, 갈릴레오의 연구를 잘 알고 깊이 존경했다.
데카르트는 베이컨처럼 감각과 개연성이 아니라 절대적 확실성 원리를 자연과학의 기초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러므로 그의 형이상학은 본질면에서 3가지 원리로 구성되었다. 첫째, 의심할 여지가 없는지에 대한 시험을 거치지 않은 모든 생각을 배제하기 위해 완벽하고 체계적인 회의 절차를 채택한다(회의주의). 둘째, 명석판명하지 않고 모순이 없지 않은 어떤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수리주의). 셋째, 모든 인식을 자기의식의 확실성이라는 기반 위에 세우고,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의심하여 흔들 수 없는 유일한 본유관념이 된다(주관주의). 데카르트는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고 연역했다. 그리고 완전한 존재는 틀리거나 속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 불어넣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념들도 틀림없이 참이라고 추론했다. 이와 같이 자연세계에 관해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신의 완전성과 신의 선물인 명석판명한 관념이 보증했다.
대륙 합리론의 전통은 2명의 철학자, 즉 네덜란드 유대인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77)와 같은 시대의 박학한 라이프치히 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이어받았다. 스피노자는 철학이 삶의 지혜를 얻고 인간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도덕적 탐구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기본 도구 중 많은 것을 빌려 썼는데, 특히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Stoicheia〉에 나온 기하학적 본보기를 사용하여 철학 지식을 연역체계로 바꾸려는 수학적 방법을 빌려 썼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통해 우주를 전체로서 인식할 때 철학이 찾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라이프니트는 수학자·법학자로서 미적분을 창안하고 마인츠 법전을 편찬했다. 또 근대 초기에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논리철학에서는 훌륭한 개혁가였고 형이상학에서는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합리론에 이어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라이프니츠는 논리학을 수학적 계산법으로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별했고, 논리학과 수학에 나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타당한 '필연적' 명제와 과학에 나오는 특정 존재조건에 대해서만 타당한 '우연적'(또는 경험적) 명제를 구분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데카르트·스피노자와 공유한 극단적 합리론에 있다.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171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추론은 필연적 진리 또는 영원한 진리에 의존하며, 이러한 진리는 관념들의 의심할 수 없는 연관과 틀림없는 결론을 확립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