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의 시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붕괴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계승한 헬레니즘 시대의 왕들이 벌인 권력 다툼의 저당물이 되었다. 이 어지럽고 불안한 환경에서 2개의 독단적 철학체계, 즉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 생겨났다.
스토아 학파
스토아 철학체계는 키티온의 제논이 만들었다. 그는 상인으로서 아테네로 가다가 바다에서 재산을 잃어버렸다. 견유(犬儒)학파의 크라테스는 제논을 위로하면서 물질 재산이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제논은 아테네에 머물면서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가다듬은 뒤 스토아 포이킬레(여기서 스토아주의라는 이름이 나옴)라는 공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논은 인간 행복의 기초는 (자기 자신과) '합일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훗날 정식으로 "자연과 합일하여 사는 것"이라고 바뀌었다. 인간에게 유일한 선은 덕을 가지는 것이며, 부나 가난, 건강이나 병, 삶이나 죽음 등 다른 모든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 모든 덕은 올바른 인식에만 기초한다. 즉 자제는 올바른 선택에 대한 인식, 인내는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정의는 '분배'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다. 모든 악의 원인인 정념은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를 잘못 판단한 결과이다. 세계는 신의 로고스(본래의 뜻은 '말' 또는 '이야기'임)가 지배한다. 이 로고스가 세계를 완벽하고 질서있게 유지한다. 인간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이 질서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질서를 교란할 수는 없고 자신을 해칠 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제논과 같은 시대의 에피쿠로스는 제논에 반대한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러 면에서 타당하다. 스토아 학파가 쾌락과 고통은 인간의 행복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친 반면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행복한 생활의 본질로 삼았다. 스토아 학파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었으나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두 철학은 이처럼 대조적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똑같다. 비록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결코 방탕한 생활과 주색잡기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활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주장한 것은 소박한 쾌락이었다.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 카루스(BC 95경~55)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라는 시에서 에피쿠로스가 인류를 모든 종교적 두려움에서 해방시킨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에피쿠로스 자신도 이러한 해방이 자기 철학의 1가지 목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신들은 너무나 탁월하므로 번거롭게 유한한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인간은 신들을 완전한 존재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고 그래야만 완전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주의가 방탕한 생활을 정당화한다고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회의주의와 그밖의 학파
엘리스의 피론이 창시한 회의주의 학파는 아무도 어떤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으며, 자기가 감각으로 지각한 것이 환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피론은 자기 생각의 실천적 결론을 철저히 수행했다. 심지어 그는 거리를 걸을 때 마차나 그밖의 장애물을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실한 제자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그가 다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피론을 지지한 후기 인물인 섹스토스 엠피리코스(AD 2~3세기)는 〈독단론에 맞서 Pros dogmatikous〉라는 대작을 써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는데, 그 덕분에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많은 글이 보존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는 고대철학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서에서 얻었다. BC 4세기에 생긴 아테네의 모든 철학 학파와 분파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교도적 성격을 이유로 AD 529년 폐쇄 명령을 내린 고대 말기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약 1,000년에 걸친 이 기간에 늘어난 새 학파는 신피타고라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뿐이었다. 그중에서 신플라톤주의가 철학의 역사에는 훨씬 더 중요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주로 플로티노스의 연구에서 나온다. 플로티노스는 저서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은 제자 포르피이오스가 그의 글을 정리하여 묶어 내놓은 〈엔네아데스 Enneads〉를 통해 알려져 있다. 비록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을 연구함으로써 나온 것이지만 당시의 종교적·신비적 경향과 일치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철학이다. 플로티노스는 존재에 여러 층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중 가장 높은 층은 일자(一者) 또는 선(善)의 층이며 이 두 층은 동일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는 없다.
신플라톤주의의 이후 역사는 극도로 복잡하다. 포르피리오스는 플로티노스 철학의 윤리적 요소를 강조했지만 그의 제자 시리아 칼키스의 아암플리코스(330경 죽음)는 신플라톤주의를 신피타고라스주의와 혼합함으로써 존재의 층 또는 일자로부터 유출단계를 늘렸으며, 그결과 전통 그리스 신들을 자기체계 안에 통합할 수 있었다. 이 학파의 또 하나의 분파는 아이데시오스가 소아시아 서쪽에 있는 페르가몬에서 세웠다. 아이데시오스는 오르페우스교 같은 고대 그리스 신비종교들을 다시 일으키려고 힘썼다. 유스티니아누스가 529년 아테네에 있는 모든 철학 학파를 폐쇄한 뒤에도 이교 철학은 계속 남아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지만 점차 소멸했다.
중세 서양철학
중세철학은 중세, 즉 4~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철학적 사변을 가리킨다. 이 시기에 철학은 계속 그리스도교 사상 특히 신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주요철학자들은 성직자였다.
중세 초기 서양철학
개요
중세 초기는 12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가 서유럽에 점차 정착했다. 이 어지럽고 어두운 시대에 철학을 키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보이티우스(480경~525경) 등 후기 로마 사상가와 안셀무스(1033~1109) 같은 수사였다.
아우구스티누수(354~430)
이 시대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방법과 이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 세계 너머에 진리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인간정신의 대상이고 인간의 모든 노력의 목표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일시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신의 내부로 향하고 이 정신을 뛰어넘어 진리를 보여주는 지성의 빛으로 나아감으로써 진리와 미의 이신적 세계와 만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두 실체, 즉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서 육체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죽은 뒤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400경)과 〈삼위일체론 De Trinitate〉(400~416)에는 인식·지각·기억·사랑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 De civitate Dei>(413~426)에서 인간 역사의 전체 이야기는 인류가 신의 구원을 받아 결국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진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보이티우스와 교부들
보이티우스는 포르피리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서들과 이에 대한 그의 주석서들은 중세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기초를 전해 주었다. 또 이 책들은 보편자(1개 이상의 특정 사물에 적용할 수 있는 명사)의 성격 등 중요한 철학문제를 제기했다(→ 색인 : 개체). 그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525경)는 인식과 실재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를 담고 있으며, 섭리, 신의 예지, 우연, 운명, 인간의 행복 등도 생생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리스 철학이 중세로 흘러들어가는 또 하나의 흐름은 그리스 교부들, 특히 오리게네스(185경~254경),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경~394경), 위(僞)디오니시오스(500경),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580경~662)였다(→ 색인 : 교부철학).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에리게나라고 불린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9세기에 이 그리스 신학자들의 몇몇 글을 라틴어로 옮겼으며, 신플라톤주의 노선에 따라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상을 종합한 방대한 저서 〈자연의 구분에 관하여 De divisione naturae〉(862~866)를 썼다. 그에 따르면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제일의 단일체이며 이 단일체로부터 다수의 창조물이 흘러나온다.
안셀무스
10세기 카롤링거 왕조가 무너진 뒤 서유럽에서 지적 사변은 점점 쇠퇴했다. 11세기에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세웠고, 세속의 학식과 철학을 신앙에 해로운 것으로 불신한 페트루스 다미아누스 같은 개혁가들이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편 다른 수사들은 변증법과 철학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인 안셀무스는 이탈리아인으로서 프랑스 베크 수도원의 대원장이 되었고 그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안셀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을 모두 사용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이 먼저지만 이성이 반드시 뒤따르면서 사람들이 믿는 것에 이유를 제공한다. 수사들이 성서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그는 〈독백론 Monologium〉(1077)을 썼는데, 이 속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쓴, 신의 존재에 대한 3가지 증명이 들어 있다. 그는 다수의 선한 것은 최고로 선한 것 또는 신에서 생겨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와 아벨라르
시토 수도회 수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같은 수사들은 신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의 학식과 철학을 사용하는 것을 의심스러워했다. 베르나르두스는 당시의 몇몇 사람들이 변증법에 지나치게 빠진다고 불평했다. 그는 신비주의적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전개했는데, 이 교리의 영향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파리의 생빅토르 대수도원 수사들도 신비주의적 명상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유학예와 철학을 명상의 보조수단으로 장려했다.
열렬한 논리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는 후기 스콜라 철학의 방법에 기여한 신학의 방법을 개척했다. 〈긍정과 부정 Sic et non〉(1115~17)에서 그는 신학문제에 관한 정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 반대하는 양쪽의 가장 권위있는 견해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다. 보편자 문제에 관해 그는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즉 보편자는 사실상 정신적 개념이지만, 보편자가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오로지 개체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보편자는 개체들의 공통적 종(種)을 의미하며 이 공통적 종은 신이 개체들을 신의 똑같은 관념에 따라 창조한 결과이다.
스콜라 철학으로의 이행
12세기에는 그뒤 서양철학의 전역사에 영향을 끼친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자유학예를 기초로 삼아 문법과 라틴어 고전을 강조한 낡은 교육양식은 논리학·변증법·과학분야 등을 강조한 새로운 방법으로 바뀌었다. 철학에서는 플라톤주의가 쇠퇴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 후반과 13세기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리스·아랍과 유대교에서 유래한 많은 저작이 당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에 '지식 폭발'을 일으켰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책 가운데에는 이븐 시나(980~1037)의 글도 있었다.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존재로서의 존재(ens qua ens)에 관한 학문으로 보았다는 해석, '존재'·'본질'·'실존' 등 많은 형이상학 용어에 대한 분석, 신 존재에 대한 증명 등은 그리스도교 집단들도 찬성하건 반대하건 자주 인용했다.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관해 주석한 글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교 교사들은 흔히 아베로에스를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공격했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가 영원하고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교리는 개체의 불멸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사상은 중세 유대교 사상이었다. 스페인계 유대인 이븐 가비롤은 〈생명의 샘 Fons vitae〉(1050경)에서 신의 단일성과 단순성을 강조했다. 모든 창조물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질료는 감각세계의 거친 물질적 질료일 수도 있고, 천사와 인간 영혼의 정신적 질료일 수도 있다. 모제스 벤 마이몬이라고도 불린 마이모니데스는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 Dalālat alhā⁾rῑn〉(1190경)에서 이성과 신앙은 모두 신에게서 나오므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으며, 겉으로 보이는 모순은 성서나 철학자들 중 어느 한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양 학자들이 이 새로운 사상 학파들을 융합하고 있는 동안 스콜라 철학의 중심이 된 대학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리대학교(1150~70 창설)와 옥스퍼드대학교(1168 창설)이다. 스콜라 철학이란 이 대학 교수들의 신학적·철학적 가르침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단일한 하나의 스콜라 철학 교리란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각각 자기 나름의 교리를 전개했으며 이 교리는 종종 동료 교수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대
그로스테스테와 베이컨
옥스퍼드대학교의 초대 총장인 로버트 그로스테스테(1168경~1253)는 과학적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개별 사건들을 관찰함으로써 이 사건들을 설명하는 일반법칙, 이른바 '실험적 보편원리'로 나아간다. 실험작업은 한 이론의 경험적 귀결을 검사함으로써 그 이론을 검증하거나 반증한다. 그로스테스테의 제자 로저 베이컨(1220경~92경)은 인간은 추론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고 경험이 없으면 그 지식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베이컨은 모든 과학을 포괄하고 신학에 의해 조직된 보편적 지혜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또 교황의 지도 아래 모든 사람을 연합할 수 있는 단일한 전세계적 사회 또는 '그리스도교 공화국' 건설을 제안했다.
오베르뉴의 기욤
파리대학교에서 오베르뉴의 기욤(1180경~1249)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교사상과 이슬람교 사상의 위협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을 위배한다고 반대했으며, 신과 창조에 관한 견해 때문에 이븐 시나의 개념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세계를 영원히 필연적으로 창조하는 이븐 시나의 신은 세계를 자유롭게 직접 창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 반대였다.
보나벤투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보나벤투라(1217경~74)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에 대한 아랍인 주석가들이 점점 인기를 얻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연 과학자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자로서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더 좋아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최고로 여겼다. 보나벤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가한 가장 큰 비판은 그들이 신적 이데아들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점이었다. 그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데아들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보나벤투라는 철학과 신학을 실제로 구분하는 데 반대했다. 철학은 신앙의 안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신을 보는 데서 절정에 이르는 높은 수준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한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나벤투라의 〈신을 향한 영혼의 여행 Itinerarium mentis in Deum〉(1259)은 신에 이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길을 따르고 있다. 이 길은 외부세계에서 정신의 내부세계로 나아가고 그 다음에는 정신을 뛰어넘어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나아간다. 이 여행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신의 도덕적·지적 조명의 도움을 받는다.
알베르토스 마그누스
매우 박식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은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경~80)는 새로 번역된 그리스-아랍의 과학과 철학 문헌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이 문헌을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속에서 빠져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독창적인 책을 쓰려고 했다. 마그누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13세기에 크게 번성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마그누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25~74)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고대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최근의 아랍과 유대 사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은 똑같은 신적 원천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 당시 보수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그들이 의심하는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아랍인 주석가들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가치있음을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주석서들을 썼다. 아퀴나스의 철학 견해는 그의 신학 저작들, 특히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1265/66~73)·〈이교도에 대한 반론 Summa contra gentiles〉(1258~64) 속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작들 속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과 방법을 구분했다. 철학자는 감각이 제공한 자료를 가지고 시작하여 사물의 제일원인을 찾는다. 신학자의 탐구주제는 신성한 성서 속에 계시되는 있는 신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이보다는 못하지만 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유용한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상들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을 변형하고 심화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부동의 원동자(原動者)가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받아들였으나, 그가 도달한 제일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매우 달랐다. 그 원동자는 사실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이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조화시킴으로써 그 교리의 명예를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충돌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교정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억지로 조화시키지 않고 철학원리, 특히 존재개념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룩했다. 그는 존재를 현실태로 생각했다. 그에게 신은 순수존재 또는 현실태이다. 창조물은 그 본질에 따라 존재에 관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나 본질이 허용하는 정도로만 존재 또는 현실태에 관여한다. 신과 창조물 사이의 기본적 차이는 창조물이 본질과 실존의 실제적 혼합에 의해 구성되지만 신의 본질은 바로 신의 실존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