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27일
새벽 3시 40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어제 밤늦게 갑자기 설악산 쪽에 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설악산 쪽은 전혀 뜻밖이었고, 준비도 없었던 터에, 관악산에 오르기로 한 다른 친구와의 선약을 해지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바뀐 사정을 이야기하고 계획을 미루자는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또 내일은 비가 많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까지 뇌리에 남겨 놓은 채,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
이것저것 간단한 짐을 챙겨 5시 40분 집을 나설 때까지 쉬지 않고 내리던 비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일행이 만나기로 한 하남시 창우동 애니메이션고등학교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7시에 친구들 4명이 승용차를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할 때는 비가 오락가락하여 오후쯤 개일 것 같았다. 이런 비는 늦더위를 몰아내려는 적절한 기상의 변화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지난번 집중 폭우로 엄청난 수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양평 조금 못 미쳐 옛날 완행열차가 정거하던 국수 역 근방의 도로변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양평-홍천-인제-원통을 지나 한계령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잡고 차를 달린다. 한계령을 넘는 도로가 통행 가능한지를 알아본 신 사장이 가능하다는 답을 얻었기 때문에, 새로 개통된 미시령 터널을 통해 돌아가야 할지를 망설이다 결정한 코스인데, 대부분의 차량들은 한계령을 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지, 오고 가는 차가 전혀 없어 도로는 온통 우리 차지다.
홍천까지 가는 동안은 비 피해 상황을 별로 볼 수 없었는데, 인제를 지나면서 원통에서부터 한계령으로 오르는 도로는 수없이 잘려 내려갔고, 임시로 복구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가의 계곡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들이 떠밀려 내려와 쌓여 있어 계곡이 아니라 마치 바위 돌을 쌓아 놓은 야적장 그대로이다. 계곡의 물가에 터를 잡아 살던 집들은 처참한 폐허로 남아 있고, 수 백 년 수령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산사태와 함께 뿌리까지 뽑혀 밀려와 있는데, 아직껏 치우지 못하고 있어서, 그날의 날벼락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수마가 할퀴고 간 폐허의 자리에 복구 작업을 위해 동원된 장비들의 엔진 소리만 인적 없는 산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은 어딘가에 대피해 살고 있을 피해 주민들의 참담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연의 무서운 힘에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생각게 한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를 우리 인간에게 제공하고, 인간은 자연이 주는 혜택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인간이 거기에 더 욕심을 부려, 그 자연을 훼손하거나 변조하게 되면 엄청난 재앙을 받게 된다는 환경보호론자들의 말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참혹한 수해의 현장과 대치되는 비경을 차창 밖으로 동시에 보면서 시속 40km로 천천히 올라가니 11시쯤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한다. 비 그치고 바람에 안개 밀려가는 해발 1003m 높은 한계령 휴게소에서 내려다보는 남 설악의 수려한 절경은 사진으로 보던 그대로이다. 양양 쪽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은 점봉산(1424.2m) 이요, 왼쪽은 대청봉(1707.9m)인데, 두 산 모두가 운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섭섭한 마음은 그냥 거기 남겨 놓고, 굽이굽이 한계령 아흔아홉 고개를 내려가는데, 역시 도로며 산들이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이러한 상처들도 세월이 가면 치유되어 아물어지리라.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 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 가라 내려 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희은이 불러 크게 히트한 한계령이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외치다가, 무자비한 정치군인들의 총칼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면서도,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직장을 뛰쳐나가서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생각되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때가 있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젊은 군인들에게 죄 없는 시민들 전체가 나라를 뒤엎을 폭도들이라는 터무니없는 인식을 시켜, 닥치는 대로 해치는 것이 애국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훗날 젊은 그들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행위를 참회하고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삶을 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못된 정치군인들이 미워서, 또 양식 있다고 생각되던 사람들까지도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정당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싫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가끔 혼자서 산에 올라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껏 한 번도 와 본일이 없이 마음속으로만 연모하고 있던 곳이 바로 이곳 한계령이다.
내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 세월 따라 잊혀 가듯이, 우리 모두가 아끼는 이 아름답고 보배로운 산하의 상처도 빨리 아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역시 수해로 피해를 입은 오색온천호텔을 지나 우리가 머물 산장에 도착한 것이 11시 40분이다. 모두들 아침에 해장국을 너무 잘 먹은 탓인지 시장기가 없다고 하여 점심을 생략하기로 하고, 오면서 도로 가에서 사 온 찰 옥수수 몇 개로 점심을 때우고, 12시 정각에 점봉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입구에 입산을 금한다는 국립공원 관리소의 안내문이 서 있다. 산채나 약초의 채취를 금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산의 피폐화를 막기 위한 휴식 년 제를 시행한다는 신 사장의 설명이다.
입산자에게 벌과금을 부과한다는 경고문을 무시하고, 우리 일행 4명은 그대로 강행이다. 30분을 올라 가파른 고개에서 하산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 마을에 있는 자연학교의 명상 선생인 ‘우’ 선생이라고 신 사장이 소개를 한다. 수련생으로 와 있는 한 부부를 안내하여 점봉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라며 뒤이어 그들이 내려올 것이라고 한다. 곧바로 내려오는 그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헤어져 올라가면서 여러 생각을 한다.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자연 속에 와서 여유롭게 휴식을 겸해서 수련을 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정신과 신체의 수련이 필요한 사람들일까? 아무튼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결정을 한 사람들인 것 같다.
잠시 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또 올라간다. 조금 더 올라가 능선에 이르니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비 개인 뒤의 맑고 깨끗한 바람이며, 건너다 보이는 주전골 뒤에 펼쳐진 기암괴석의 기기 묘묘한 비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름드리 적송의 군락은 어느 유명한 화가의 “노송도”인들 여기에 비견할 수 있을까? 추사가 “歲寒圖”를 그릴 때 이 소나무들의 기풍을 생각하면서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안개가 걷혀 올라가는 이 적막한 산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이 이 순간만은 오롯이 우리들 네 사람의 것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고,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 2시간 30분 만에 다다른 곳은 점봉산 정상을 2km 남겨놓은 갈림길인데,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안개가 앞을 가린다. 비가 그칠까 하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내려갈 시간을 계산해 보니,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고 우중에 각자 우산을 펼쳐 들고 다시 하산하기 시작했다.
다시 적송 군락지에 내려오니 비는 그치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 바람은 우리를 유혹한다. 옛 선인들은 이런 산에 오르면 상투를 풀고 바람에 머리를 빗고, 바지를 내리고 하지에 거풍을 했다 하지 않은가? 우리 네 사람을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 깊은 산속에서, 이도 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흉내를 내본다. 우주의 큰 기운을 다 받은 듯, 몸도 마음도 정신까지 시원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했다는 공민왕의 王師를 지낸 ‘나옹선사’가 남겼다는 禪詩이다.
조용한 산행에서는 가끔 이 시가 생각이 나서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인간사 그렇게 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숙소는 五色川 다리를 건너 민박 마을을 지나 올라와, 산속에 위치한 외딴집이다. 신 사장이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매입해서 작년 가을에 수리해 깨끗하고 조용하다. 샤워를 하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했던 시원한 와인을 한잔씩 마시니 바로 우리가 신선이 되어 仙界 와 있는 기분이다.
저녁 메뉴는 오색초등학교 옆에 있는 식당에 준비시킨 닭백숙인데, 따라 나온 산채가 주 메뉴보다 더 맛이 있다. 식후 다시 산장으로 돌아와 외등을 켜고, 마루 난간에 앉아 하늘을 보니,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별이 총총하다. 과일 주 몇 잔에 취하여 합창으로 가곡을 몇 곡 뽑아 부른 들 방해할 사람이 없다. 오직 산과, 숲과,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에,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있을 뿐, 이미 더위도 이곳에는 없다. 아쉽다면, 그림자 드리워 줄 달빛이 없어 외등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옛날 왕양명은 이런 곳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멋진 시를 남기지 않았을까?
山中諸示生 산중에서 제자들에게
溪邊坐流水 (계변좌유수) 시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 바라보니
水流心共閒 (수유심공한) 흘러 가는 물 따라 마음도 한가롭네
不知山月上 (부지산월상) 산 위에 둥실 달 오른 줄 몰랐더니
松影洛依班 (송영낙의반) 옷자락에 무늬 지는 소나무 그림자
어젯밤에는 12시가 다 되어 잠이 들었는데, 5시에 기상하여 대강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6시에 오색약수터 부근의 산촌 식당에서 ‘황태정식’으로 조반을 마치고, 7시에 ‘오색 주전골’을 향한다. 옛날 엽전을 주조한 곳이라서 주전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도 남설악에서 가장 빼어난 미를 자랑하는 곳이 이 주전골이라고 자랑을 하니, 대청봉 등정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 코스를 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약수터 입구에서 전에는 입장료를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파괴된 진입 도로를 복구하느라고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그 유명한 오색약수를 한 종지씩 마시고 임시로 복구해 놓은 계곡 옆길을 따라 성국사를 지나 용소폭포까지 올라가는 동안 계곡 좌우로 전개되는 비경은 중국의 장가계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여행 전문가인 정 상무가 감탄을 한다. 나야 처음 와본 곳이지만, 다른 친구들은 설악산이 초행이 아닌데도, 이곳은 처음이란다. 설악산은 워낙 방대한 산이기 때문에 몇 차례 왔다 간 사람들도 생소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닌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등산을 인생과 비교하기도 한다. 같은 산을 다녀온 사람일지라도 저마다 출발점이 다르고, 목표하는 목적지가 다르면, 보고 느낀 바가 각기 다르듯이, 살아온 환경과 과정이 다르고, 목표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은 길을 걸어온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혹 느낀다. 혹자는 자기가 체험하고, 느낀 바가 마치 그것의 전부인양 주장하는데,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옛 성인도 “군자는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들과도 조화를 이루지만, 소인은 같은 사람들끼리도 불화한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는 절대 옳은 것도, 절대 그른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용소폭포까지 가는 동안 여기저기에 철재 사다리와 계단이 엿가락처럼 꼬여, 흉물스럽게 버려진 채, 아직은 방치되어 있다. 길은 막혀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어 12 폭포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휴식을 취한 후 내려와 자동차로 연어축제가 열린다는 양양의 남대천을 지나 작은 어항에서 점심으로 시원한 물 회를 먹고, 12시 30분 귀경을 서둘렀다. 어제의 비와 함께 더위는 물러간 줄 알았더니, 오늘도 불볕더위가 이어질 것이라 한다. 가을 햇볕은 곡간을 채워 준다고 하니, 농민들을 위하여 이런 더위쯤이야 기꺼이 참아야지. 대청봉, 백담사 계곡, 낙산사 등 가 보고 싶은 많은 명소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어제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길은, 흥분과 호기심이 사라진 대신, 편안한 안식을 기대하는 나른함으로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