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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행기(雉岳山)

雉岳山 비로봉 등정기

2007년 3월 15일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미루어 오던 치악산 등반을 원주에 있는 동문 김 명환 교수와 같이 하기로 결정하고, 어제 밤에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자리에 들기도 했었지만, 마음이 들떠 있었던지 새벽에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4시가 아직 되지 않았다.  다시 잠을 청 할 수도 없어 일어나 배낭을 챙기고, 입고 갈 등산복과 양말을 찾느라 부산을 떠는 바람에 아내도 덩달아 일어나 아침준비를 한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5시 30분 아직 밝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지하철 강변 역에서 내려 동부 버스터미널에서 6시 37분에 출발하는 원주 행 버스를 탈 수가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꽃샘추위가 오는 봄을 방해하는 듯 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기온이 예년과 같은 정상적인 봄 날씨가 될 것이라는 예보는 집에서 듣고 나왔지만,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어제아침과는 전혀 다르다.

 

서울을 빠져 나가면서 천호대교 밑으로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에 엷게 드리운 물 안개를 본다. 앙상하게 메말랐던 가는 가지에 어느새 수액이 차올라 푸른 빛을 띄고 있는 가로수에서 봄을 보기도 한다.  차내에는 열 명 정도의 승객이 띄엄띄엄 앉아서 눈을 감고 저마다 사색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지 봄이 오고있는 창 밖의 풍경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때로는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 수 있다면 혼자서 하는 여행도 즐거울 수가 있겠지만, 오늘 나는 8시 조금 지나서 버스가 원주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아침 안개가 산과 들에 일렁이며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들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40 여일 전 2월 4일 정기 산행 때  桂芳山에 가면서 보던 같은 풍경인데도 느낌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원주 버스터미널에는 김 교수가 마중 나와 있어서 구룡사 입구까지 그의 차로 가는데 30분 가량 걸렸다. 주차장에 차를 새워두고 사찰 입장료를 지불한다. 금년부터 국립공원 입장료 징수가 폐지 되었지만 사찰을 통과하려면 사찰에서 징수하는 입장료는 1인 당 2,000원씩 지불하여야 한다.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면서 다리를 건너고 울창한 나무 숲길을 10 여분 걸어가는 구룡사 들어가는 길이 참 좋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龜龍寺는 원래는 九龍寺로 불리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못을 매워 절을 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전설과, 아홉 九자를 거북 龜자로 바뀌게 된 것은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 사용할 山菜를 채취하는 책임을 이 절에서 맡게 되었고, 그 작은 권력을 이용해서 승려들의  부패가 심해졌다고 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느 도사가 승려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하여 절을 보호하고 있는 돌 거북상을 없애도록 하여 마침내 절은 폐쇄 직전까지 이르게 되자, 다시 정신을 차린 승려들에게 이 도사가 나타나 거북상을  복원시키고 절 이름도 龜龍寺로 바꾸도록 하여 절은 다시 융성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재로 여러 번 소실되었던 이 절은 지금 많은 증축을 하고 있음을 볼 때 전설처럼 이 돌 거북상이 절을 융성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 앞의 맑은 구룡소에는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들이 바닥에 널려있어 깨끗한 환경을 훼손시킨 것 같아 보기에 좋지 않았다. 세렴 폭포 아래 다리를 건널 때 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지만,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급경사가 이어지고, 사다리 병창 길의 절벽을 양쪽으로 내려다 보면서 바위를 건너 뛰어 넘는 짜릿한 묘미는 심장이 약한 사람은 아예 겁에 질려 맛보지 못하고 되돌아 내려가야 할 것이다. 원주에서 23년을 살았다는 김 교수는 이 길을 수없이 올라 다녔다지만, 초행인 나로서는 치악산을 오르는 많은 등산로 중에서도 제일 힘들고 경사가 가파르다는 이 길을 선택하여 오르게 된 것이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잔설이 쌓여있는 가파른 경사 길을 아이젠도 장착하지 않은 채로 숨이 차게 오른다. 철 계단길 못 미쳐서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쉬면서 과일과 물로 목을 축인다. 우리를 보고 멧새들이 날아들어 먹이를 달라고 짹짹 보챈다. 김 교수가 빵을 부스러뜨려 손 바닥에 들고 있으니 새들은 손에 날아와 먹이를 물고 간다. 등산 하는 이들에게 길들여진 모양이다.  다시 계단을 따라 40여분 오르니 12시 30분 드디어 1,288 미터 비로봉 정상이다. 

 

땀을 식히며 발 아래 펼쳐지는 남대봉(1,181 미터), 향로봉(1,043미터), 그리고 매화산(1,085 미터) 을 뿌듯한 마음으로 휘휘 둘러본다. 돌탑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컵 라면을 안주 삼아 약주를 두세 잔씩 하고 나니 허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진다. 평소의 산해진미에 미주가 이 맛보다 나을까? 이런 맛에 정상에 오르는 것을! 올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리라.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오르던 길보다 훨씬 수월하다. 세렴 폭포 아래 다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계곡 길을 돌아 온 시간이 오후 3시다. 정상에서 보낸 시간을 감안하면 내려온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계산이다. 다리 아래서 세수를 하고 깨끗하게 흐르는 물을 손으로 퍼 마시니 어떤 감로수가 이만 하랴 싶다. 물맛이 너무 좋아 약주를 마신 빈 병에 하나 채웠다. 주차장까지 내려와 차를 타고 다시 원주 시내에 돌아온 것이 오후 4시쯤 되었다. 

 

원주 시청 옆에 있는 가정집 같은 식당의 간판이 산정식당 이었던가? 밖으로 보이는 식당의 외모 보다 제공되는 메뉴는 고급스럽고, 정성을 들인 담백한 맛을 자랑으로 대를 이어 운영 한다고 한다. 이 집의 특별 메뉴 중에 말이 고기 안주가 있는데, 엷게 썬 소고기를 적당한 길이의 파에 말아 철판에 약하게 익혀서 먹는데, 한 입에 먹기 좋도록 만들어진 음식이다. 이 안주에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김 교수는 저녁시간에 강의가 있어서 한잔만 하고 내가 나머지를 다 마시다 보니 취기가 돈다. 저녁 6시에 떠나는 서울행 고속버스에 오르니 적당한 취기와 가벼운 피로가 나른한 행복 속으로 나를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