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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행기(민족의 성지 마니산)

2008년 4월 6일

역사의 땅 강화도 민족의 성지 마니산 

4월 6일 강화도 마니산으로 정해진 54산악회의 정기산행 현지답사를 위해서 3월 23일 아침 8시10분, 지하철 2호선 당산 역에서 만난 구정모, 최통성, 이휴재 우리 세 사람은  봄비 내리는 경인고속도로를 승용차로 달렸다. 봄 가뭄을 걱정하던 터에 내리는 이 단비가 현지답사를 오늘로 예정했던 우리에게는 적잖은 불편을, 특히 차를 운전해야 하는 구정모 회장에게는 큰 불편을 주고 있었으나,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내리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불편쯤이야 감내할 수 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40분을 달려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45년쯤 전에 고등학교시절 전등사로 봄 소풍을 갈 때 우리가 탔던 버스를 배에 싣고 건너던 야기를 하며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세상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자신들 또한 세상만큼이나 변해 있음을 깨닫는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 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제주도를 제외한 다른 섬들은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섬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강화도를 흔히들 지붕 없는 박물관, 또는 살아있는 역사의 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를 찾고, 민족의 성지로 불리는 마니산에 오르는 것은 그 동안 잊고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의 榮光(영광)과 恥辱(치욕)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 봄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해 삶의 자세를 정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9시 10분쯤 초지대교를 건너 우측으로 초지진과 덕포진을 바라보며 광성보를 둘러보기 위하여 들렸다. 외지에서 강화도의 유적지를 보기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눈에 띄는 명칭이 墩臺(돈대)와 堡(보), 鎭(진)이다. 돈대·보·진은 둔전병(평시에는 경작을 하고 전시에 동원되는 병사) 들이 주둔하던 군사지역이라고 한다. 돈대(墩臺)는 돌을 원기둥형으로 쌓아 곳곳에 총구나 포대 등을 설치하고 10명 내외의 소규모 병력이 외침을 막던 곳으로, 지금의 해안초소 정도의 의미다. 보(堡)는 돈대가 서너 개 모여 이룬 것으로 요즘 군대로 치면 중대, 진(鎭)은 그 상위 개념인 대대라 보면 된다.

  

서기 1232년 고려의 고종 19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수도 개경을 버리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와 삼별초 군의 애국적인 활동과 성 안 백성들의 충정을 합하여 외성과 내성을 쌓고, 12 개의 鎭(진), 堡(보)와 53개의 墩臺(돈대)를 설치하여 끝까지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도를  제외한 육지에서 몽고군의 수탈과 살육의 피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1270년 고종의 아들 인종이 몽고에 항복을 함으로 고려의 수도는 38년간의 강화도 피난 시절을 마감하고, 원나라의 부마 국이 된 고려의 굴욕시대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성을 조선시대에 와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 효종 9년(1658)에 완성한 광성보에는 이런 돈대가 세 곳 복원돼 있다. 숙종 5년(1679)에 만들어진 광성돈대는 사거리 700m의 홍이포 등이 설치돼 있다. 광성보 오른쪽에는 1871년 4월 23일(신미양요), 48시간 동안 미군과 사투를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200명 장병들의 혼이 서려있는 손돌목돈대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설치된 용두돈대가 있는데, 용두돈대로 가는 길목에 당시의 흰옷 입은 우리 병사들의 전사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그날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한 어재연, 어재순 형제와 다른 지휘관의 전몰 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고, 전몰장병들의 무덤은 같은 묘역에 5,6기의 봉분 아래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9시 50분 다시 전등사를 향해 광성보를 출발할 때 가끔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137년 전 그들의 장렬한 전사를 애도하여 흘려주는 하늘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세웠다고 하는 정족산(鼎足山) 삼랑성(三郞城)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를 연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고려의 고종 때는 경내에 궁궐을 지었다는데, 지금은 그다지 넓지 않은 궁궐터만 남아 있다. 절 이름이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바뀌게 된 것은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불전에 옥으로 된 등잔을 올린 뒤부터 전등사 (傳燈寺)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이 절의 경내에 정족산 사고가 있어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초기에는 내사고(內史庫)가 춘추관에 있었고, 외사고(外史庫)는 충주, 성주, 전주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어 전주의 실록을 강화도로 옮겨와 이를 복인(復印)하여 마니산에 원본을 보관케 하고, 4부의 사본을 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그리고 묘향산에 각각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 사고각(史庫閣)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정족산성) 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옮겨져 있었는데, 병인양요 때 일부를 프랑스인들이 약탈해다가 지금 루우불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을 우리 정부가 되찾아 오려고 얼마 전에 외교적인 노력을 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일제에 의하여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고(史庫)를 둘러보기 위하여 대웅전 뒤로 올라가보니, 옛날에는 잠겨 있었다고 하던 대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 보관된 실록이 없어서인지 보전상태가 허술하였다. 별관인 취향당(翠香堂)은 새로 짓고 있음인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 담장도 없이 마치 한복 입은 사람이 두루마기를 입지 않은 것처럼 어울리지않게 서 있다.

 

10시 40분쯤 우리는 산행 기점으로 잡은 정수사(淨水寺)를 찾아간다. 아직도 이슬비가 그치지를 않고 있는데, 함허동천 주차장에는 대형 버스들이 많이 주차해 있는 것을 보니 오늘도 단체 등산객이 많은 모양이다. 정수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정수사에 들리니 빗속에도 절을 찾은 신도들이 많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회정(懷正) 대사가 창건할 때 정수사(精修寺)라 했었는데 지금의 淨水寺(정수사)로 고쳐 쓰게 된 것은 무학대사의 제자인 함허 대사가 세종 8년에 중창할 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 고쳐 부른 것이라 한다. 함허동천이라는 부근의 지명도 대사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우리도 그 정수(淨水)를 한 종기 씩 마시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11시 8분 우리가 목표로 하고 올라가는 해발 468미터의 마니산은 국조 단군께서 나라를 열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塹星壇)으로 인해 우리나라 최고의 성지로 손꼽히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백두산 신단수 아래서 나라를 세우신 3년 후에 왜 이곳까지 내려오셔서 참성단을 쌓으시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혹자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때문이라고도 하고, 우리나라의 어느 산보다 우주의 기를 많이 발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우주의 기가 제일 많이 발산하는 것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으나,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강화도에서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지석묘 등의 유적이 있음을 볼 때,  나라의 중심부에서 그중에도 인구가 많은 이곳을 택해 백성들을 종교로서 통합시키고자 하는 통치 목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에 오른다.

 

비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진 것보다도 오늘따라 등산객이 많은 것이 산행을 더디게 한다. 광성보, 전등사, 정수사 등 몇 군데의 유적지를 다녀오느라 산행을 조금 늦게 시작했기 때문인지 하산하는 사람들과 길을 양보하면서 소모한 시간이 많다.

1시간 10분 동안 쉬지 않고 올라 칠선녀교를 지나 정상에 올랐다. 참성단(塹星壇)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는 마니산 정상보다는 1.4미터가 더 높은 초피산(469.4M)이다. 헬기장이 있는 것은 참성단에서 행해지는 행사에 참석할 땀 흘리고 올라올 수 없는 귀하신 분들이 헬기를 타로 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8분을 더 가니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여기가 마니산의 정상 해발 468미터이다. 철 울타리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참성단 바로 밑에 비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바위가 있어 비로소 휴식을 취할 장소를 잡았다. 우산을 펼쳐놓고 그 아래 각자 준비해 간 음식들을 꺼내놓는다. 딸기, 토마토, 포도, 배, 찐 고구마, 찹쌀 인절미, 쑥 부침개 등 우리 세 사람이 도저히 다 먹어치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빗방울이 그치지 않은 속에서 30분 동안 거의 다 먹어치운 것이다. 모두들 체력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오후 1시, 하산 길은 단군로를 택하기로 했으나 아무래도 빗길에 미끄러울 것 같아 지루하기는 하지만 계단 길이 안전할 것 같아 그 길을 택하였다. 다음 54산악회의 하산 길은 물론 단군로가 되겠지만…  

 화도면 마니산 관광단지 주차장에 내려와 택시를 타고 차를 주차시켰던 정수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2시 40분이 지났었다. 다시 선수포구 쪽으로 차를 달려 횟집에 들어가 배가 부른데도 밴댕이회를 시켜 먹는다.  

 

돌아오는 길에 고려 왕릉을 보기로 하고 능내리에 소재하고 있는 가릉(嘉陵)에 들렀다.  묘는 발굴하여 유리문을 통하여 내부의 석관을 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어 놓았다. 석관에는 유골이 진토가 되었음 일까? 보이는 것은 흙뿐이다. 강화도에는 고려의 피난 수도로서 38년을 유지하는 동안 4곳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21대 희종의 능인 석릉, 22대 강종의 황후가 묻힌 곤릉, 23대 고종의 홍릉, 그리고 이곳 가릉은 24대 원종의 황후이며 25대 충렬왕의 모후인 순경태후의 묘이다.  다른 능에는 가본 일이 없지만, 이 가릉을 보고 조선왕릉과 비교했을 때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피난지에서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간소하게 조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며 비에 젖고 있는 가릉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차를 세워두었던 곳까지 걸어오면서도 생각이 이어진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외침을 받았음에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여 서양에 그 앞선 문화를 자랑하던  동양의 작은 나라 고려가 지금 세계에 당당히 설 수 있는 KOREA라는 우리의 국호를 물려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없어 들리지는 못했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의 판각지인 선원사지를 우리는 아직도 정확하게 찾지를 못하고 30년 가까이 엉뚱한 곳을 4차에 걸쳐 발굴하면서 엄청난 예산만 낭비하였다고 한다. 향토 사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위치가 잘못 고증되었다고 한다니 하루빨리 정확한 사적지를 찾아 복원해서 우리의 자긍심을 세계에 알려야 할 때이다.

 

강화도는 고려왕조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여러 왕들과의 인연도 많은 곳이다. 지금 한창 텔레비전에 방영되고 있는 “왕과 나”에 등장하는 연산군의 유배지,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이 농사지으며 살던 곳 또한 이곳이다. 근대에 들어서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요호 사건(1874년)을 치르면서 급기야는 1876년 일제 식민지 역사의 첫 장을 여는 병자 수호조약을 체결하기도 한 아픈 역사의 땅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후 6시 해 저문 경인고속도로를 찾아 강화도를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