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곰소 이야기(4)

2008년 11월 20일

청구원 / 매창뜸 / 稜伽山 來蘇寺, 地藏庵 / 雙仙峰 月明庵 등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 이 가을을 다 보내기 전에, 하루나 이틀쯤 집을 떠나, 산사(山寺)에서 지내보고 싶은 생각에, 용대리에서 시작하여 백담사를 거쳐 내설악의 단풍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면서 하룻밤을 봉정암에서 보내고 대청봉을 올랐다가,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코스의 산행을 계획했었지만, 어쩌다 그만 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만추(晩秋)의 자연 속에 나를 맡겨 볼 기회가 다시 온 것이다. 미국에 살던 친구가 부안(扶安)에 있는 그의 고향 방문을 위해 귀국하였고, 11월 20일까지 머무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 갈 테니, 그 사이 음력 보름을 전후하여 시간을 내서 월명암에 같이 오르자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가볍게 짐을 챙겨, 집을 나선 것은 입동도 지난 11월 12일(음력 10월 보름) 새벽 5시 50분,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6시 50분에 출발하는 부안(扶安) 행 버스를 탈 수가 있어서 나는 설악산은 아니지만, 대신 부안에 있는 능가산(稜伽山)을 향하게 되었다. 

 

차 안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하여 아이들이 읽던 책 중에서 빌 매키밴(Bill McKibben) 이 쓴 자연의 종말을 골랐다.  읽으면서 자연 속으로 사색여행을 떠나는 오늘의 내 목적에 잘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쯤 지났을까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니 이미 가을걷이를 마친 텅 빈 논과,  한창 잎을 떨구어 내면서 겨울의 동면을 준비하고 있는 야산의 활엽수들에서 계절의 쓸쓸함과 더불어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은 허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가끔씩 졸기도 하면서 책을 읽다 보니 9시 50분에 생각보다 빨리 차가 부안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2년 전에도 잠시 귀국했을 때 나를 초청해 주었던 관선헌(觀仙軒)의 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신석정의 고택 청구원의 모습이지만, 그 옆에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신석정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있는 신석정 시인이 살던 고택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 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중나온 친구가 나를  처음 안내한 곳이 청구원이다. 신석정 시인의 고택은 2년 전에 들렸을 때 시인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보수를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다시 들렸는데, 허술한 주변 울타리나 철을 넘기고 있는 코스모스가 가득 채워진 정원은 고치기 전 그대로였고, 흙벽을 다시 바른 위에 벽지를 새로 바른 몸채의 방안과, 새로 지은 현대식 화장실 외엔 그대로인 듯하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가까운 곳에 있는 매창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안 사람들이 매창 묘를 찾아내서 이곳에 매창공원(매창뜸) 을 조성할 당시만 해도 숲속이었을 이곳도 이제 부안읍이 확장되어 부안 교육청과 아파트들이 공원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매창뜸(매창공원)에 있는 이매창의 묘
명창 이중선의 묘도 매창뜸에 있다.
가람 이병기의 시 [매창뜸]이 돌비에 새겨져 있다. 매창의 유희경을 향한 애절했던 사랑을 400년이 더 지난 후에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평생 외도를 모르고 살던 유희경이 부안의 매창이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고 단 10일 동안의 사랑을 남기고 헤어진 후 쓴 시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때문에 30을 갓넘긴 여인의 머리가 반 넘어 세어졌고, 손가락마져 가늘어졌다니 그 심정 알 것 같다.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매창은 달 밝은 밤에 유희경과 함께 월명암에도 올랐다.

매창뜸은 매창 공원을 이르는 말이다. 매창의 묘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옛날에는 이곳이 부안에서 꾀나 떨어진 숲속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시가지가 이곳까지 확장되어 바로 옆에 부안 교육청이 있고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관리되어진 이곳에는 매창의 묘와 그녀가 남긴 시들과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유희경, 10년 동안 우정을 이어갔던 허균 의 시는 물론이고, 그녀를 기리던 많은 후세 사람들의 시가 잘 다듬어진 돌에 새겨 세워 있고, 또 한 사람의 예인 이중선의 무덤도 잘 관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곳 부안 사람들은 그녀들의 시와 노래를 사랑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이 지방의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듯도 하다.

소동파가 노래한 중국의 적벽을 닮았다고해서 붙여진 이름 적벽강.
늦가을 답지않게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몸을 흠뻑 적시고 마음까지 씻어냈다.
채석강 입구에 있는 이 식당은 갑오징어의 먹물을 이용한 오죽을 주요 메뉴로 삼는 이름난 맛집이다.
채석강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의 잔잔한 모습
내변산을 관통하는 도로 변에서 만난 풍성한 가을.
여름 내내 농부들이 땀을 흘려 가꾼 밭에는 역시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외변산의 아름다운 30번 국도를 달려 변산반도를 한바퀴 도는 동안 바다 위에 떠있는 듯한 하섬을 내려다보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새만금방조제를 멀리 바라보며 시원한 바닷바람에 가슴을 씻어내기도 하고, 느긋하게 적벽강, 채석강의 절경을 감상하고, 점심으로 격포의 한 식당에서 이곳의 별미인 오죽을 먹었다. 채석강 바닷물이 식당 창 밑에서 철석거리는 이 식당은 오죽으로 유명한 곳인데, 갑오징어의 먹물을 넣어서 끓인 까만 죽의 맛이 일품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늦가을답잖게 따뜻한 날씨에 채석강의 시원한 바람이 좋아서 우리는 방파제를 따라 걸으며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지서 삼거리에서 내변산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몇 번이고 차를 새워놓고 저물어가는 가을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능가산(稜伽山) 아래의 내소사(來蘇寺) 경내에 있는 지장암(地藏庵) 뒤에 보이는 바위가 지장바위이다.
지장암 뜰에는 아직도 가을이 머물러 있다.

오후 2시 30분쯤 우리는 능가산(稜伽山) 아래의 내소사(來蘇寺) 경내에 있는 地藏庵에 들렸다. 일지(逸智)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관선헌 주인부부가 오래된 불교 신도이기도 하지만, 일지스님과 친구 부부는 좋은 것이 있으면 서로 권하고, 좋은 차(茶)가 있으면 가끔 觀仙軒과 地藏庵을 내왕하면서 다도(茶道)를 같이 즐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그날도 스님은 우리에게 좋은 다과(茶果)를 대접해주셨다. 지장암 뜰에 있는 감나무에서 따 손수 깎아서 썰어 말린 감 과자를 그릇 위에 예쁜 꽃잎을 놓고 그 위에 올려 내놓고, 영주의 한 신도가 보냈다는 맛있는 사과를 깎으시고, 심지어 볶은 은행과 찐쌀(올 예 쌀)까지 맛있다며 내놓으신다. 연신 차를 따르며 권하시는 스님께 담백한 차의 향이 좋아서 무슨 차인지를 물었더니 겨우살이차라며 항암작용(抗癌作用)은 물론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설명까지 해 주신다. 나는 이 차의 향이 어쩌면 일지스님의 자애로운 마음까지 녹아 우러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차를 마셨다.

 

지장암을 나와 내소사(來蘇寺)를 한 바퀴 돌아본다.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작은 개울 건너에 해안(海眼) 대종사(大宗師)의 부도와 부도비, 행적비가 세워져 있다. 나는 예전에 해안(海眼) 스님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스님은 이곳에서 8.15 해방을 전후하여 많은 제자 스님들을 배출하였는데, 그 후 1974년에 스님이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지만, 제자들이 스님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부도를 남겼다는 이야기와, 그 부도비(浮屠碑)의 전면에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 즉 평범한 남자 해안의 비라고 적고 뒷면에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是無生死) 즉 삶과 죽음이 여기에서 나왔으나 여기에는 삶과 죽음이 없다 고 탄허(呑虛) 스님이 그 비문을 적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해안 스님의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탄허 스님이 그런 비문을 적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안스님은 이런 시도 남기신 분이다.  

    

멋진 사람  海眼 스님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친구가 있다면

구태여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香을 사르고

山窓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워도 좋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詩를 쓰는 詩人이 아니더라도 좋다.

 

아침 일찍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 잎에 손질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람을 베개하고

바위에 한가히 잠든 스님을 보거든

아예 道라는 속된 말을 묻지 않아도 좋다.

 

野店斜陽에 길 가다가 술을 사는 사람을 만나거든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 다정히 인사하고

아예 가고 오는 세상 시름일랑 묻지않아도 좋다.

내소사 앞에서 격포쪽으로 가는 30번 국도옆에 관선헌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곰소 젓갈시장에 있는 유명한 식당. 아주 허름한 식당의 외모와 그 안에서 나오는 음식의 맛은 전혀 다르다.

저녁시간이 다되어 우리는 안주인이 없는 관선헌으로 돌아왔다.  친구 부인은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에 머무르고 있어서 우리는 음식점에서 매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로 하고, 간단히 몸을 씻고 곰소 시장에 있는 유명한 식당 우리 장모 집을 찾았다. 외관상 아주 허름한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은 아무도 없고, 80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았다. 격식을 갖출 손님은 이곳으로 안내하기가 좀 그렇다고 말하는 친구는 음식을 먹어보면 누구나 다시 찾게 된다고 은근히 자랑을 했다. 한쪽 벽에 할머니가 모 방송국의 맛 대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겼을 때 진행자들과 찍었던 사진, 유명 연예인들과 정치인이 이 식당을 다녀가면서 남긴 서명을 훈장처럼 붙여놓았다. 할머니 혼자서 준비하여 차려준 식사는 듣던 그대로 모든 반찬이 맛깔스럽고 입에 맞았다. 특히 작은 게로 담근 게젓이 얼마나 맛이 좋던지 밥을 한 공기 더 주문하면서 무슨 게로 담근 젓이냐고 물으니 뽁게라고 일러주셨다. 뽁게라는 이름이 이곳 사투리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맛이 놀라왔다.

 

식사를 마치고 관선헌에 돌아오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져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동쪽 언덕에 벌써 보름달이 밝게 떠올라 있었다. 우리는 앞 뜰 잔디밭을 서성이며 내려다보이는 언덕 아래로 밀려오는 조수(潮水) 위에서 잔 물결 따라 춤추고 있는 달빛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꾀나 긴 시간동안 같이했다. 

다음날 아침 역시 곰소 시장에 있는 식당 우리 장모 집에서 훌륭한 6천원짜리 젓갈백반으로 조반을 마치고, 10시 30분쯤 내소사에서 1.5KM쯤 떨어진 원암 통제소에 차를 세워두고 산행을 시작했다. 가파르지 않은 소나무 숲길을 따라 30분쯤 오르니 관음봉과 직소폭포로 가는 삼거리인 재백이 고개에 다다른다. 잠시 땀을 식히며 쉬고 있는데, 주말이 아닌데도 단체산행을 하는 수십 명의 등산객들이 남여치 쪽에서 월명암과 직소폭포를 지나오는 듯, 우리를 지나쳐 관음봉 쪽 길을 택해서 올라간다. 아마도 그들은 관음봉과 신선봉을 거쳐 내소사로 하산할 모양이다.

 

지장암의 일지스님을 통해 어제 월명암의 주지스님으로부터 오늘 밤을 월명암에서 보낼 수 있도록 승낙을 받은 우리는 직소폭포를 향해서 평지 같은 순탄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간다. 12시가 조금지나 또 다른 무리의 젊은 남녀 등산객들이 직소폭포에서 우리를 지나쳐 간다. 아마도 어떤 회사의 등반 대회이거나 대학의 동아리 모임의 등반이 아닌가 싶었지만, 주중(週中)에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산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 현실의 어두운 단면(주중에 놀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었다.

봉래구곡 앞에 있는 저수지에는 물이 절반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오랜 가뭄으로 물이 떨어지지 않는 직소폭포
분옥담의 모습도 이렇게 변하게 한 가을 가뭄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넘치지 않는 선녀탕의 모습도 별 수가 없다.

 지나친 가을 가뭄때문인지 직소폭포에서는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변산의 명소로 꼽히는 이곳 직소폭포와 이어 연결되는 분옥담 그리고 선녀탕에 맑은 물이 철철 넘쳐 나지 않음이 못내 아쉬워 갈증이 더하는 것 같았다. 길 가 그늘에 앉아 준비해간 과일을 깎아 갈증을 해소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자연보호헌장탑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봉래구곡 앞에 있는 절반정도도 물이 채워지지 않은 저수지를 보면서도 물이 풍족하지 못한 자연을 보는 것 자체도 이렇게 삭막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의 변화로 인한 지구 전체에 물 부족이 심각해진다면 그야말로 자연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봉래구곡을 지나 월명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서 단풍의 아름다움이 떠나려는 가을을 아직껏 붙들고 있다.

 

자연보호헌장탑이 있는 곳에서 월명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땀을 흘리며 한 참을 올라가 중턱쯤에서 쉬면서 내려다 보이는 실상사지와 바라보는 건너편의 관음봉, 신선봉 그리고 봉래구곡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아직 지지않은 단풍이 붉은색과 노란색 그리고 푸른 색깔의 어울림으로 빼어난 능선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다시 땀을 흘리며 올라가다 보니 오후 1시가 넘었다. 길 옆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간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래야 떡과 빵, 그리고 과일이 전부지만 그래도 배부르게 먹고 푹신푹신한 낙엽 위에서 배낭을 베고 누어 한참을 쉬었다.

 

오후 3시 가까이 되어 월명암에 도착하여 주지스님을 찾으니 스님은 출타 중이시라고 하여 공양보살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하니, 주지스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듯 공양보살의 도우미 인 듯한 젊은 여신도를 시켜, 우리를 거처할 방으로 안내하게 하고 사용할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저녁 공양시간과 아침 공양시간을 알려주며 공양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고 당부를 한다.

월명암 대웅전 앞에 있는 감나무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익어가고 있다.

 월명암은 지금부터 1300여년 전 신라 문무왕 11년에 세계불교3대거사로 숭앙 받는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하여, 수많은 선승(仙僧)과 대덕(大德)을 배출한 곳으로 근대에도 용성, 서옹, 고암, 해안, 탄허, 향봉, 월인 등 고승들이 수도했던 곳이라고 하며, 그 풍광 또한 천하제일이라고 하는 둥그런 월출(月出), 칠선 바다에 떨어지는 찬란한 일몰(日沒), 무릉도원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아침의 운해(雲海), 그리고 발 아래 솟아있는 수많은 군봉(群峰)들이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선경강산(仙景江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300여년 전,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거사에 얽힌 전설을 기록한 [부설전]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40호로 지정되었다는 안내문
월명암에서 내려다 보는 군봉들 사이로 펼쳐지는 운해가 선경강산(仙景江山)임을 자랑하고 있다.

 배당 받은 방에 배낭을 내려놓고, 저녁 공양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우리는 낙조대와 쌍선봉에 다녀오려고 절을 나섰는데, 발목까지 파묻히는 낙엽을 헤치며 천천히 낙조대에 오르니, 아직 일몰시간까지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다가, 칠선바다쪽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기대했던 황홀한 일몰은 볼 수가 없을 것 같고, 쌍선봉에 다녀오려니, 저녁 5시의 공양시간을 맞추자면 시간이 모자랄 듯하여, 낙조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쉽지만 그냥 내려왔다. 객실 앞에 임시로 지은 샤워실에는 아마도 객승(客僧)들을 위한 것인지 세탁기도 비치되어있고, 따뜻한 물도 나오는 생각보다 훌륭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낙조대에서 보지 못한 일몰을 월명암에 돌아와서 찍은 일몰 사진이다.

 5시 저녁 공양시간, 선방에서 수도하고 있는 일곱분의 스님들이 공양하는 방은 우리가 공양하는 방과 다른 방이다. 우리 두 사람은 공양보살과 보살을 돕고 있는 젊은 여신도와 같은 방에서 공양을 했다. 스님들이 공양을 마치고 각자의 그릇을 가지고 나와서 개수대에 놓고 나가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감사하게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불가(佛家)에서 음식 공양할 때는 일체 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의 자리와 차례를 지켜야 하고, 수저소리를 내거나 음식 먹는 소리를 내지 않으며, 앉은 자세는 반 가부좌가 좋으며, 고개는 반듯이 하고 눈은 자기의 발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고, 자기가 먹던 음식은 남기지 않고, 그릇은 자기가 깨끗이 씻어 제자리에 놓으라고 가르친다. 서양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즐겁게 하면서 식사를 하는데 이와는 사뭇 다르다.

또 불가의 공양시에는 일정한 의식이 있으며 이때는 오관상념게(五觀想念偈)를 행하는데, 

1. 계공다소 양피래처(計功多小 量彼來處) 즉 이 한 그릇의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무수한 노력과 공을 베풀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 촌기덕행 전결응공(村己德行 全缺應功) 나 스스로 지난 일을 생각하건대 이 음식을 받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를 생        각해봅니다.

 

3. 방심이과 탐등위종(防心離過 貪等爲宗) 마음을 다스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가짐으로 이 공양을 들겠          습니다.

 

4. 정사양약 위요형고(正思良藥 爲療形枯) 보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한 약으로 생각하고 다만 이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이 공양을 들겠습니다.

 

5. 위성도업 응수차식(爲成道業 應受此食) 부처님의 제자로서 바른 일 보람찬 일을 하기 위한 활력소로서 이 공양을 들        겠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이나 일반 신도들이 얼마나 이런 의식을 따르고 있는지는 그들을  자주 접해보지 않은 내가 잘 알 수는 없다. 서양에서도 테이블 매너, 는 그 사람의 교양의 척도처럼 보이 듯이, 우리는 각자의 종교와 전통에 따라 우리의 식탁예의를 나름대로 잘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녁공양을 마치고 6시가 조금 지나, 만월의 음력 보름을 하루 지났지만, 그런대로 둥그런 월출을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준비한 매실주 한 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으나, 갑자기 구름이 달을 가리고 말았다. 2년 전부터 월명암의 밝은 월출을 보면서 술잔을 주고 받는 낭만을 기다려 왔었는데 우리는 어둠 속에서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저녁 범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혹시 타종한 스님이 지나다가 술병을 볼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술병을 점퍼주머니에 가만히 감추었다.

 

밝은 달을 보는 대신 우리는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를 들으며, 이 소리가 진실로 삼라만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물과 지옥의 중생들까지도 제도하고,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서른 세 번의 저녁 범종소리가 끝날 때쯤, 바람이 구름을 살자기 밀어내 달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감추었다 하는 사이 우리는 매실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방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다가 8시가 조금 지나 일찍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 창문이 환한 것을 보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초저녁의 구름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중천의 달이 대낮처럼 밝다. 들어와 시간을 보니 아직 밤 12시도 되지 않았다. 자고있는 친구에게 달이 무척 밝은데 잠만 자고 있을 거냐고 물었지만 잠이 깊었는지 일어나지 않는다. 혼자서 다시 밖에 나와 말 그대로 고요가 겨운 절 마당을 서성이다 들어왔으나 다시 잠이 들지를 않는다.

 

누어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나를 찾는 시간을 갖으려 해도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리 저리 뒤척이고 있으니 친구도 잠이 깬 모양이다. 우리는 다시 인간과 종교에 대하여 긴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3시가 되어갈 때쯤 친구는 세수를 하고 새벽예불에 참여하기 위하여 법당으로 간다. 뒤이어 나도 세수를 하고 방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 법당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목탁과 독경소리를 들으며, 나름대로 참선의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전호흡을 하며 한참 동안 무념 상태를 유지해 보다가, 절에 와서 절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평소 집에서처럼 자기식의 마음 닦음을 고집하려면 왜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에서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다음 템플스테이 할 기회가 있으면 제대로 불가의 가르침을 배워 자신을 비우는 참선을 해보고 싶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친구는 법당에서 스님을 따라 108배를 하며, 머지않아 출산 할 딸 하영이의 순산(順産)만을 빌었다고 한다. 기원 대상의 제일순위는 항상 자식의 평안과 행복,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아침 공양을 6시에 마치고, 하룻밤의 편한 쉼과 두 끼니의 공양에 감사를 표하고,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하산 길에 오르니 다른 때의 산행보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월명암에 무엇을 털어놓고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가을이 지나가고 있는 산은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게 말해주고 있다. 겨울은 옷을 벗은 나무들에게도 낙엽에 덮여있는 대지에게도 쓸쓸한 죽음의 계절이 아니라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인내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