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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소 이야기(3) 磻溪隨錄의 産室 磻溪書堂

全羅北道 扶安郡 보안면 磻溪路 山 128-7番地 닭기봉 중턱에 磻溪隨錄의 執筆地인磻溪書堂이 있다. 한국 실학의 鼻祖로 일컬어지는 磻溪 柳馨遠先生이 그의 나이 32세 때인 1653년(孝宗 4년)에 世宗 때 議政府右議政을 지낸 8代祖 柳寬(1346-1433)의 賜牌地인 愚磻洞으로 내려와 學問硏究와 著述을 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필자가 2008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올라오는 길도 좁았고, 1970년대에 복원했던 건물도 많이 낡아 있었는데, 5년이 지나 다시 와보니 입구에서부터 길도 넓게 잘 다듬어졌을 뿐 아니라 실사구시의 돌 비도 세워져 있는가 하면 건물도 새로 지어서 문화재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공리공론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의 돌비가 서당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새로 세원져 있다.
반계서당으로 올라가는 길 가에 안내 표지판이 새롭게 세워져 있다.
닭기봉 중턱에 있는 반계서원이 1970년대에 복원되었는데, 너무 낡아서 2010년대에 새롭게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반계수록의 산실 답게 깨끗하게 복원된 모습
1653년에 선생이 직접 물길을 찾아 팠던 샘물은 지금도 깨끗한 물이 솟아나고 있다.
전에는 없던 '반계정'이라는 정자도 새롭게 복원하면서 서당 입구에 지어졌다.
선생은 1653년에 조상의 사패지가 있는 이곳 우반동 내려와서 20여년 동안 후학을 가르치고 많은 집필을 하다가 1673년 병환으로 타계하여 경기도 용인시 백암변 석천리 산 28-1번지에 있는 선영으로 이장하기 전까지 서당 바로 뒤에 있는 이곳에 묻혀 있있었고, 그 자리는 묘터로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유형원 (柳馨遠 16221673(광해군14현종14)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흠이고, 어머니는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며, 부인은 부사 심은(沈誾)의 딸이다. 외숙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하였다. 선생은 일체의 관직을 사퇴하여 오직 향리의 농민들을 지도하고 그들의 구휼(救恤)에 전념하였다. 당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후의 어려운 국정을 회복하고자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였다. 호조참의, 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배향되었다.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관료들은 당쟁에 몰입해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양반 지식인, 유형원은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1653(효종 4) 선대의 사패지지인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였다. 그의 호 반계(磻溪)는 그 동리 이름이다. 그에게 있어서 귀농은 민초(民草)들의 삶 속에서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회를 개혁할 필생의 대작인 '수록(隨錄)'의 집필을 위한 대반전이었다. 그는 부안으로 갈 때 전적(典籍) 1만 여권을 가지고 갔다.

 

165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칩거하여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1665,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저축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제도개편을 위한 [반계수록] 집필에 몰두한지 18년 뒤인 1670년에 26권을 집필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52세로 유형원은 세상을 뜬다. 일상의 삶과 생각을 적어나가는 수필(隨筆)처럼 반계선생의 [수록]은 단지 겸손한 표현이지 사실상 정치, 경제, 군사, 정부 등 국가 전체에 대한 개혁안이다. 제도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함에 역대 문헌과 사상가의 견해를 자세히 고증하고 현실에 근거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론과 개혁 사상은 가히 실학의 아버지라 칭송할 만한 것이다.

 

[반계수록]에 나타난 그의 사상적 특징은 부강한 나라, 부유한 백성을 지향하면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토지는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경지를 나누어주는 균전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그밖에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강조하였다. 또한 과거제의 폐지, 관료제의 개선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재야 지식인들의 이상론이 되었으며, 후학자 이익(유형원의 외삼촌 이원진-하멜 표류당시 제주목사-의 당질)과 안정복 등으로 이어진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뒤에 정약용 등에 이르러 실학이 집대성 되는 계기가 되었다선생의 묘소 바로 옆 곡장 안에 아버지 유흠의 묘소가 있다.

반계선생 연보

1622년 광해군 14년 한성의 소정릉동(지금의 정동)에서 태어남

1623년 부친 유몽인의 옥사에 연루 옥사(부친 사망 후 외숙과 고모부에게 사숙)

1642년 인조 20년 경기도 지평으로 이사 (21)

1649년 인조 27년 경기도 여주로 이사 (28)

1653년 효종 4년 전라도 부안으로 이사 (32) 반계수록 집필 시작

1654년 효종 5년 진사과에 합격 (34)

1670년 현종 11년 반계수록 26권 집필 완료

1673년 현종 14년 타계

 

부안으로 낙향한 선생이 남긴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