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걸어보지 못한 길

 

걸어보지 못한 길

 

Robert Frost (1875-1963)

노년의 프로스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두 길 다 가볼 수는 없어

서운한 마음으로 나 오랫동안 그 곳에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더 나은 듯도 했습니다.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긴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도 발자국이란 없고

두 길은 마침

똑 같은 그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 길은 한번 가면 그만이기에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 흐른 뒤

나는 한숨 지며 이야기 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라고

프로스트는 휘트먼과 함께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일상적 언어와 리듬으로 한가하고 평범한 일상의 풍물을 담담하게 묘사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시를 썼다.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아름다운 자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으며, 깊은 성찰을 통해 평범하고 단순한 문장과 일상적인 소재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4차례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61년 J.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 시인으로 시를 낭송하면서 전 국민에게 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미국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는 1874년 3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프레스콧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남북전쟁 때 남군에 복무한 인물로,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 이사벨 무디 프로스트는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교사였다. 프로스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0세 때 음주와 도박에 빠졌던 아버지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폐결핵으로 객사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가져오고자 어머니와 함께 매사추세츠에 갔다가 돈이 떨어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성실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녔으며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어머니는 교사로 일하면서 프로스트와 여동생을 키웠다. 프로스트에게 문학적으로나 인생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프로스트는 어린 시절 독서나 학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야구와 축구 등의 활동적인 일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아이들이 학업을 끝마칠 수 있게 노력한 어머니 덕분에 뉴햄프셔 세일럼 문법학교를 졸업했다. 프로스트는 로렌스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학업에 진지하게 열중해서 우등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다트머스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방황을 계속하다가 한 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고, 학교 교사, 방적공, 신문기자 등의 일을 전전했다. 21세 때에는 고등학교 졸업 당시 함께 졸업생 대표를 했던 엘리너 화이트와 결혼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사립학교에서 아내와 함께 일을 맡아 보았다. 그런 한편 틈틈이 시를 써서 잡지에 투고했다.

 

23세 때 프로스트는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결핵으로 의심되는 병을 얻은 데다 아내와 어머니마저 건강이 좋지 않아 2년 만에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에게 받은 뉴햄프셔 지역의 농장에 정착하고 생활 습관을 바꾸었다. 그는 농사, 양계 등을 했으나 처음 해 보는 농부 생활은 쉽지 않았고, 결국 5년여 만에 지역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농부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프로스트는 스스로를 농부로 소개하곤 했고, 특히 식물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아마 농사보다는 식물을 관찰하면서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농사일에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때로는 혼자서 산책 나가기를 즐겼고, 이웃 농장까지 걸어서 놀러다니곤 했다. 그리고 산책길에서 마주친 식물들과 풍경들을 꾸준히 시로 노래했다. 그의 걸작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였으나, 당시에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1912년, 프로스트는 농장을 팔고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런던 외곽의 시골집을 임대한 뒤 그곳에서 그동안 썼던 시들을 정리해 런던의 데이비드 너트 출판사에 보냈고, 이듬해 첫 시집 《소년의 의지》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이 호평을 받으면서 그다음 해에 두 번째 시집 《보스턴의 북쪽》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 두 시집에는 대표작인 〈풀베기〉, 〈담장 고치기〉, 〈고용인의 죽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프로스트는 에즈라 파운드를 알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많은 작가,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예이츠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가했다. 이때 친분을 나누었던 시인 W. W. 깁슨과 L. 애버크롬비의 권유로 전원생활을 하며 시를 쓰고자 글로스터셔의 시골 마을로 이주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무렵 영국에서의 호평을 토대로 미국에서도 《소년의 의지》가 출간되어 시인으로서 제법 이름을 얻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먼저 뉴햄프셔 지역 프랭코니아에 작은 농장을 사서 농사를 짓다가 2년 후 앰허스트 대학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했다. 이후 프로스트는 죽을 때까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미시간 대학, 하버드 대학, 다트머스 대학, 앰허스트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또한 농사일을 직접 하지는 못했으나 농장을 구입하고 시간이 날 때면 그곳에서 지냈다. 그의 시들은 스스로를 농부로 여기고 싶은 욕망과 농장에서 지낸 시간들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23년에는 《시선집》과 《뉴햄프셔》,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이듬해 《뉴햄프셔》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28년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 1930년에는 《시선집》을 출간하고, 이듬해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4번이나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록을 세웠는데, 1937년 《저 너머 산맥》으로 세 번째 퓰리처상을, 1942년 《표지목》으로 네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이 외에도 신과 대결하는 인간의 고뇌를 그린 시극 《이성의 가면》, 현대를 배경으로 성서의 인물을 등장시킨 시극 《자비의 가면》을 펴내기도 했다.

 

1950년대에 프로스트는 미국의 국민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점하였으며, 75세와 85세 생일에는 미 상원이 생일 축사를 보내기로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말년에는 하버드 대학 명예 문학박사, 앰허스트 대학 문학박사, 다트머스 대학 법학박사, 영국 옥스퍼드 및 케임브리지 대학과 아일랜드 국립대학에서도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영국을 방문했다. 또한 1948년에는 T. S. 엘리엇, 헤밍웨이 등과 함께 1946년 전범으로 지목된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1961년 J.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 〈아낌없는 선물〉을 낭송하는 등 강연과 외부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1962년에 마지막 시집 《개척지에서》를 펴냈으며, 그해 케네디 대통령 문화 특사로 모스크바를 방문,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와 회담했다. 1963년에는 볼링겐 시학상을 받았다. 그해 1월 29일 폐색전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버몬트 베닝턴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