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繼(출생 미상 ~ 사망 779년)
月落烏啼霜滿天 (월낙오제상만천)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 내리고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강촌과 풍교의 고깃배 불빛 마주 시름 속에 조는데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한 밤에 울리는 종소리는 나그네 배에까지 들려오는구나.
옛날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즉,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주와 항주는 그 풍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미인이 많고 물자가 풍부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나서 많은 풍류객들이 일생동안에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 때에 실크로드를 통해서 당나라 사람들이 서역에 내다 팔던 비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생산했었는가 하면, 동방견문록을 썼던 마르코폴로는 일찍부터 수로(水路)와 산업이 발달했던 이곳을 동양의 베니스라고 유럽에 소개하기도 했다.
장계( 張繼)는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등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한유(韓維), 백거이(白居易),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중당시대(中唐時代)의 사람으로 분류된 것을 보면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그들보다 조금 늦었던 것인가 한다. 당시의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불운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남긴 이 시는 그 사후 1200년이 훨씬 넘도록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니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맞는 듯 싶다.
그는 당나라 양주(襄州) 사람으로 자는 의손(懿孫)이다. 천보(天寶) 12년(753)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오월(吳越) 지방으로 피난을 갔다. 대력(大曆) 초에 입경(入京)하여 시어(侍御)를 지냈다. 나중에 검교사부원외랑(檢校祠部員外郞)으로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충당되어 홍주(洪州)에서 재부(財賦) 관련 일을 맡았다. 시에 등림(登臨)하거나 기행(紀行)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청원자연(淸遠自然)해 조탁을 일삼지 않았다. 서정적인 시를 주로 썼고, 삶의 소중함이나 백성들의 간고(艱苦)한 생활을 소재로 하여 작품 활동을 펼쳤다. 대표작에 「풍교야박(楓橋夜泊)」과 「귀산(歸山)」이 있고, 문집에 『장사부시집(張祠部詩集)』이 있다.
현재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 시(詩)가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고 하니, 중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많은 동양 사람들이 애송하고 있는 시(詩)가 아닌가 한다.
청(淸)나라의 강희(康熙) 황제도 이 시를 읽고, 후에 한산사(寒山寺)에 다녀 갔고, 그의 치세 중에 강촌교(江村橋)를 노았을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