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6일 수요일
1. 파리 도착
9월 6일 13시 35분 인천공항을 출발할 예정이던 대한항공 KE901기는, 관제탑에서 중국 영공을 통과 해야 하는 승인을 대기하느라, 1시간 15분을 더 기다려, 14시 50분에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서해상공을 지나 천진, 북경, 울란 바토르, 이르쿠르크, 노보시비부르스크, 옴스크 등 생소하게 느껴지는 도시들과, 모스코바, 상테페트르부르크를 지나고, 우랄산맥을 넘어 스톡호롬, 헬싱키, 코펜하겐, 암스텔담을 거쳐 총 거리 9,500 킬로미터를 논스톱으로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고도 11,100 미터를 유지하며, 평균 그라운드 스피드 860 킬로미터로, 11시간을 날았다.
비행시간 동안, 아내는 연신 영화를 보다, 음악을 듣다, 하면서도 지루하다고 하지만, 파리에는 초행인 내 설레임은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여, 높은 하늘 위로만 지나온 여러 나라들을 더듬어 본다. 중국, 몽골, 러시아,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네델란드, 그리고 프랑스, 아직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이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 그 나라의 생소한 도시들을 더듬고 있을 때, “여러분은 곧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 공항에 도착하시겠습니다.” 하는 기장의 안내 방송을 듣게 된 것이다.
드디어 내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좋아하던 단편 “별”의 작가 알퐁스 도오데의 나라에 도착 했다. 인천공항에서 짐을 부칠 때, 화물 운송을 담당한 대한항공의 젊은 직원이 “언젠가는 꼭 파리에서 살고 싶다”던 말을 듣고, 막연하게나마 나도 한번쯤 와보고 싶던, 어린 시절의 내 꿈을 생각하며,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격려해 주던 말을 생각한다. 몽테뉴, 볼테르와 룻소, 고호와 고갱, 세잔느, 밀레, 마네, 모네, 퓌셍, 르노와르, 그리고 뒤마, 위고, 스땅달, 지드, 쌩텍쥐베리, 플로베르, 싸르트르 등 수많은 사상가, 화가, 문학가들의 이름을 접했을 때 마다, 그들의 숨결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것 같아, 한 번쯤 와보고 싶어 동경하던 곳에 드디어 도착했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내 시계는 여전히 서울시간으로 9월 7일 새벽 2시 5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파리는 9월 6일 오후 7시 5분이다. 시계의 바늘을 되돌려 이곳 시간에 맞추어 놓으면서, 나는 지나온 7 시간을 되돌아가서 다시 사는 셈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후회 되는 과거의 내 살아온 시간들 모두를 이처럼 되돌려 놓았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짐을 찾아 나오니, 마중 나와 있어야 할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니, 입국 장 정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일찍 나와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다. 예정보다 1시간 반을 늦게 도착하였으니 지칠 만도 하다. 며칠 전에 경미한 접촉 사고로 자동차가 공장에 들어가서 차를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고 택시를 타자는데, 웬 한국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붙인다. 유학생인데 생활비를 보태기 위하여 자가용 영업을 하고 있으니, 택시 대신 자기차를 이용해 달라는 것이다. 불법 영업인 셈이다. 행여 바가지 요금을 요구할까 걱정이 되어 요금을 물어보니 택시요금과 비슷하다고 하여 어려운 유학생을 돕는 셈치고 그의 차를 탔다.
딸아이는 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에서 근무하다가, 4 년 전부터 이곳 파리에서 근무 하며, 자기 발전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는 믿음직스러운 딸이다. 지금도 파리대학에서 다시 학위를 받기 위하여 직장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지만, 시집을 보내 좀 편안한 삶을 살게 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부모의 마음인데, 그 맘을 모르지는 않을 터이지만, 나이 서른 셋이 되도록 일과 공부밖에 모르니 한편 섭섭한 마음도 있고, 안쓰럽기도 하다. 1년 전에 작은 아파트를 사서 수리하고 이사할 때, 나는 직장일 때문에 와보지 못하고, 제 엄마만 와서 이것저것 도와주기는 했으나, 들어와 보니, 제법 정돈된 아담한 집이다. 아내와 딸아이가 짐을 풀어 정리하는 동안 나는 딸아이의 컴퓨터를 인계 받아, 내 메일 함을 점검하고, 인터넷을 통해 서울 소식을 읽다 보니, 벌써 새벽 1시다. 꿈과 낭만의 도시,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운 곳 파리에서, 나는 황홀한 꿈을 꿀 새도 없이, 피곤한 잠 속에 빠져 들어가는 첫 밤을 맞았다.
2006년 9월 7일 목요일
2. 시내 관광(센 강, 파리 국립 도서관, 식물원 외)
아침 8시 딸아이가 출근 한 뒤, 아내와 관광지도 한 장을 들고 시내 산책에 나선다. 아내는 이곳이 초행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나의 관광가이드가 되어, 우선 집 근처의 길을 익혀야 한다며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센 강쪽으로 나를 안내한다. 파리는 오래된 도시치고 도시계획이 잘된 곳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도로며 건축물들의 고도부터가 서울과는 너무 달라서, 거리에 나오면서부터 남의 나라에 와 있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지역 마다 건물의 높이가, 높고 낮음이 없이 일정한 것부터 서울과 다르고, 공공건물이나, 특수한 역사적 유물, 백화점등 대형 매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많은 지역이 주상복합 건물들이다. 서울처럼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7, 8층 높이의 일정한 모양의 건물들의 아래 1 층은 상가, 그 위 층들은 아파트인데, 상가와 상가 사이에 대문같이, 아파트에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고, 엘리베이터는 얼마나 작은지 3인용이라고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겨우 두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다. 비효율적인지? 프라이버시를 극도로 존중하기 위함인지? 알 수가 없다.
서울의 도로는 보통 반듯한 3 거리, 4 거리의 주도로가 있고, 곳에 따라 이면도로가 있는데, 이곳의 도로는 서울의 도로에 비해 대부분의 도로가 좁기는 하지만, 보통 한 광장에서 6 거리, 7 거리로 모든 건물에 진입하기 쉽도록 여러 개로 쪼개어 놓았고, 개선문광장같이 큰 곳은 12 개의 거리로 통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로는 차도보다는 인도가 훨씬 넓은 것이 특이하다. 이러한 도시의 정비는 1850년대 나폴레옹 3세 때 센 지사로 임명된 오스만 남작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도로 가운데 덩그러니 건물이 서 있는 것을 몇 곳에서 보았는데, 그 건물을 살리기 위해서 도로를 갈라 놓기도 한다. 아마도 그 건물의 공공성이나 역사성을 고려했으리라. 도로에 건널목이 많은 것도 도로가 인간중심이지 차량중심이 아니라는 증거다.
아름다움과 낭만의 상징처럼 생각되던 센 강을 보고, 우선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르게 그 강폭이 좁은 것에 실망 했다. 서울의 한강과는 비교가 되지를 않고, 중랑천 정도의 작은 보잘 것 없는 강으로 생각 되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나머지, 나중에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그게 아니다. 파리를 남북으로 흐르는 이 강은, 길이가 장장 776 킬로미터나 되는,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며, 그 폭도 2 킬로미터에서 10 킬로미터까지 되는 곳도 있다 한다. 단지 파리 시내를 흐르는 동안 폭이 좁아졌으나, 상당히 큰 유람선이 늘 왕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수량이 풍부하고 수심도 깊은, 감히 내가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강이 아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센 강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또 그 위에 놓여진 많은 다리에 얽힌 사연과 추억들을,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오래도록 남게 했는지도 모른다.
다리를 남쪽으로 건너 센 강 바로 옆에, 책을 펼쳐놓은 모양의 4 개의 높은 현대식 건물이 넓은 공간을 가운데 두고 직사각형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인데 미테랑이 집권할 때 지었기 때문에 미테랑 도서관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천만 권의 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중앙에 있는 참고 문헌 도서관에는 현재 40만 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십 계단의 층계와 층계 위의 넓은 공간이 모두 시멘트가 아닌 두꺼운 널 판지로 깔려 있는데, 표면은 미끄럽지 않도록 널 판지 하나하나에 가는 골을 파 놓았다. 이 넓은 공간은 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조깅코스나, 산책코스로도 이용되기도 한다. 공연이 없는 날일 뿐만 아니라 비교적 한산한 시간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샌강의 잔잔한 물결을 어루만지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거닐어 본다. 서울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던 여유로움과 낭만이 있다. 여행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 많은 계단 역시 관람석이나, 센 강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될 듯싶다. 높은 계단 반대편 중앙 건물 옆으로 상당히 넓은 수목이 잘 가꾸어진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도서관에서 내려다 보면 신선한 푸르름이 눈의 피로를 덜어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도서관 내부도 구경해 보고 싶었으나, 지금이 여름 휴관 기간이라서 2 주간 쉬고 있다는 설명을, 40대 중반쯤 될 듯한 마음씨 착해 보이는 여자에게서 들었다.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다짜고짜 영어로 물었더니, 다행스럽게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답해 주었다.
다시 센 강을 따라 식물원내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찾아 한 참을 걸었다. 걷는 것 자체가 구경이고, 보는 것마다 배움이라는 생각으로 다리 아픈 것쯤은 참자고 아내에게 다짐 한다. 그러나, 평소 운동량이 부족하던 아내에게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매주 산을 오르던 내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은, 17일부터 부지런히 따라 다녀야 할, 스위스,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등을 돌아오는 단체관광이 예정되어 있고, 그 전까지는 파리 시내 관광으로 계획을 새워놓았기 때문이다. 식물원과 자연사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진화의 그랑드 갤러리와 네 가지의 각기 다른 전시 파트가 있다고 하는데, 두개골의 특징, 다양한 동물의 박제, 척추동물 두개골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진화과정과 식물화석이 있다고 하지만, 아내나 나 또한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숲과 나무들 사이를 걷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곳의 관람은 생략하고, 식물원만 한바퀴 돌기로 하였다.
이곳은 원래 왕립 병원의 정원 주변에 식물학교와 자연역사관, 약국 등을 짓도록 하여 새워졌다고 한다. 코르시카, 모로코, 알프스, 그리고 히말라야에서까지 옮겨온 식물들이 있다. 하나의 거대한 자연 생태공원에다, 아름다움을 가미한 자연 학습장이다. 길 따라 늘어선 거대한 나무들이며, 예쁘게 다듬은 키 작은 관목들과, 형형색색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쁜 꽃들을 가꾸어 놓은 화단이 있고, 여러 가지 잡초를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한 공간도 모두가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많은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직원들을 보면서(그 설명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집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것은, 파리 시내에 숲이 많다는 것이다. 불과 4, 5 킬로미터 반경을 걸어 오면서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지고, 연못이 포함된 넓은 공원을 세 곳이나 가로질러 왔다. 역시 충분한 산소를 공급을 할 수 있고, 시민들의 휴식공간 또한 그 만큼 많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부럽게 생각 한다.
유럽에서 가장 숲이 우거진 도시인 파리는, 서울 면적의 4분의 1이지만, 역사적인 건축물들과 현대식 빌딩 사이로 수많은 정원과 공원 등 녹지대가 조성되어, 도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도시 전체면적의 20%가 숲이라 한다. 전 국토가 우리나라 남북한의 2.5 배 정도인데, 지금의 인구가 6천만 정도이니, 150여년 전에 벌써 오늘의 파리를 생각하면서 도시정비사업을 했을 만큼 여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면서 보니, 베르시 공원의 끝 부분에 높은 제방이 있고, 거기에서 인공 폭포가 쏟아지고 있어서, 다가가서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 물은 센 강에서 모터로 퍼올려서 강가 도로 밑을 지나, 10 미터 정도의 높은 제방을 넘어 공원의 연못에 물을 공급하고, 또한 시각적인 청량감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방 위에는 마로니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산책로가 있는데, 이곳을 산책하면서 센 강의 흐름과 공원 숲의 푸르름을 좌우로 동시에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도시계획 공학자들도 요즘은 신도시를 설계할 때, 이에 못지않은 친 환경적, 인간 중심의 도시설계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비좁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설계를 하여. 이보다 훌륭한 도시가 곧 생겨나기를 기대해 본다.
2006년 9월 8일 금요일
3. 오페라 하우스, 콩코르트르 광장 외
오늘은 오전에는 집에서 5, 6백 미터 거리에 있는 도메니지엘 역 광장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오전에만 반짝 열리는 도깨비 장이 서는 날이라고 하여, 아내를 따라 시장 구경을 갔다. 마치 서울의 아파트 단지 내에서 한 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장이나, 5일 장날에 있는 한국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싸구려 물건들을 쌓아놓고 소리를 질러대며 파는 모습이며, 과일장사가 맛을 보고 사라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도 우리랑 비슷하다. 조리 된 육류 가공 식품과, 야채를 비롯한 많은 식료품에서부터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필품들이 팔리고 있는데, 이들을 사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구경 삼아 나온 관광객들이 많은 듯 하다. 장이 서는 4, 5 시간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어서, 일대의 도로가 차단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였나 싶게 말끔히 정리되고 소방차가 와서 물청소를 한다. 아내는 포도와 토마토를 조금씩 샀는데, 집에 와서 맛을 보니 괜찮았다.
오후에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여행사에 가서, 잔금을 치르기로 한 날 이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꼬르 쌩뜨에밀리용이라는 지하철 역에서 14호선 지하철을 타고 20분쯤 걸려서, 이 지하철의 종점인 쌩 라자르역에서 내려, 딸아이와 만나 같이 여행사에 가는데, 중간에서 오페라 하우스를 볼 수가 있었다. 1862년 나폴레옹 3세 때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하여 공사를 시작했고, 13년 만인 1875년에 완공하였다는, 이 극장은 외부의 화려함 뿐만 아니라, 황제의 관람석과, 2천200 여 개의 관중석이 있는 강당, 그리고 샤갈이 그림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한 천장과, 흰 대리석으로 장식된 발코니가 있는 대연회장 내부의 아름다움은, 늘 화가들의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그 그림들은 상류층 사람들의 장식용 진열 품이 되었다고 한다.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촬영하고, 여행사에 들려 여행경비의 잔금을 계산하고, 콩코르드광장으로 가기 위해, 오페라의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다시 한번 나폴레옹 시대의 과감한 개혁정신을 생각한다. 그때인들 어찌 반대하는 여론이 없었을까 마는, 감히 황제의 권위에 맞섰던들, 그가 한 눈이나 깜짝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자고로 진시황제를 비롯한 많은 독재자들이 위대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으리라.
콩코르드광장은 루이 15세의 동상을 새우기 위하여 건축가 쟈크앙주에 의하여 설계되었는데, 프랑스 혁명으로 왕의 동상대신 단두대가 새워져 2년 반 동안 무려 1,119명이 처형되었고, 그 중에는 루이 16세를 포함하여, 마리 앙투아네트, 샬로트 크로데, 혁명지도자인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피가 피를 부르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피로 물든 이 광장은 1794년 공포정치가 끝난 후, 부드러운 명칭인 콩코르드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광장의 상징물인 오벨리스크는 3,200 년 된 이집트의 룩소르에 있던 것을 이집트 총독이 루이 필리프 왕에게 증정하여 옮겨 왔다고 한다. 병인 양요 때 이 나라 사람들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을 탈취하여 갔던 일을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힘은 곧 정의다”고 생각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을 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힘을 길러 남이 나를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2006. 9. 9. 토요일
4. 개선문, 샹젤리제의 거리 외
오전에 딸아이와 아내가 마른느 라 발레에 있는 할인 매장에 구경을 가기로 해서 같이 나섰다. 그곳은 파리 시내 중심가에서 전철로 약 50분 걸리는 외각에 있는 곳이다. 파리는 파리 시내 중심가와(인구 약 220만), 일드 프랑스라고 불리는 외각지대로 나뉘어 있는데(도합 인구 약 1100만), 마치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쯤 가는 듯 했다. 집 근처 도메니엘 역에서 전철을 타고 10분쯤 가다, 나숑역에서 다시 마른느 라 발레로 가는 차로 갈아타고 또 10분쯤 가니 도심에서 벗어난 시골 풍경이다. 여기 저기 단층집과 2층집들이 빨간 지붕을 하고 초원 중간 중간에 있는 것을 보니, 옛날 중,고등학교의 미술 교과서에서 보던 불란서의 한가로운 시골 풍경 그대로다.
마른느 라 발레역은 오직 할인 매장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역 주변이 온통 매장 건물들이다. 드넓은 주차장에 수천대의 자동차가 주차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많이 몰려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각 유명 브렌드들의 할인매장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대형 건물에는 많은 상품들과 더불어 사람들도 붐비고 있는 것이, 마치 잠실의 롯데 백화점을 방불케 했다. 파리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한 번씩은 다녀가는 곳이라 한다. 아내와 딸아이가 아이 쇼핑을 하고 다니는 동안, 나는 벤치에 앉아 사람구경으로 시간을 보내다, 결국 딸의 생일 선물로 옷 한 벌과, 내 등산화 한 켤레만 샀는데 벌써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점심 후 다시 전철을 타고 개선문 광장을 향한다.
개선문은 1805년 나폴레옹이 이우스틸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장병들에게 “개선문 밑을 통과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다음해 건축가 장 샬그랭으로 하여금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으나, 1814년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의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엘바섬으로 추방당해 권력을 상실함과 함께 그 공사도 중단되는 곡절을 격기도 하다가, 1836년에 드디어 완공 되었다고 한다. 50미터 높이의 이 개선문에는 많은 조각들과, 승리한 전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나, 나는 가까이 가서 보지는 않고, 멀리 떨어져서 사진만 몇 컷 촬영하고 나오는데, 마치 오늘이 무슨 기념일인지 샹젤리제 거리에서부터 군악대와 그 뒤를 따르는 70이 넘어보이는 참전 용사들과, 목발을 짚거나, 한쪽 팔이 없는 상이 용사들과 상당수의 할머니들이 질서 정연하게 개선문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때 전사한 한 무명용사의 무덤을 이 개선문 밑에 만들고, 그 희생을 기려주고 있다니, 이 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가히 본 받을 만하다.
12거리로 나누어진 개선문 광장에서 제일 넓은 거리가 엘리제 궁으로 통하는 샹젤리제 거리 이다. 차도가 왕복 6차선인데 비해, 인도는 가로수가 중간에 한 줄 더 있을 만큼 훨씬 넓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한가롭게 보여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도로변 까페에서 와인 한 잔씩을 놓고 앉아 담소하고 있는 나이든 사람들도 그렇고, 벤치에 앉아 분수와 꽃밭, 누각이 있는 샹젤리제 정원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그것을 느낀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 나폴레옹 3세가 되어 많은 개혁을 단행하여, 오늘날의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했고, 프랑스의 산업혁명을 이끌게 하였다고 한다. 개선문 광장에서 4방, 8방으로 뻗어나간 12개의도로와 그 도로변의 질서 정연한 도시계획이 그 때 단행되었다고 한다.
루이비똥, 구찌, 샤넬, 아르마니, 에르메스 등 그 유명한 명품들이 이곳에 다 모여 있다고 하니, 이 거리야 말로 명실상부한 세계 패션의 중심이 아닌가 한다. 이 명품들의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시간이 없어, 엘리제 궁전, 프티 팔레, 그랑 팔레, 알렉상드르 3세교등 근처의 명소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2006년 9월 10일 일요일
5. 휴식
이틀동안 걸어 다닌 거리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다리, 허리가 아픈 것이, 평소 서울에서 등산 했을 때보다 훨씬 더하다. 오늘은 하루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아내도 하루쯤 쉬는 것이 다음 관광을 위해서 좋다고 찬성이다. 집에서 아내가 특유의 솜씨로 빈대떡을 부쳤다. 와인 한 잔을 들고 편한 자세로 마리 앙뚜아네뜨에 관계되는 책을 뒤적이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어느덧 오후다. 다시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하루가 너무 빨리 가버렸다.
마리 앙뚜아네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로트링겐의 공작 프란츠 1세와 함스부르크의 여제(女帝)이며, 외교에 능한 대단한 정치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열 다섯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1770년 14세의 나이에 당시 왕세자였던 열 다섯 살의 루이 16세와 결혼하였다. 프랑스 혁명당시 꽁시에르쥬리의 독방에서 76일간 갇혀있다가, 10개월 전에 처형된 남편과 마찬가지로 콩크르드르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어린 나이에 시집 보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비로서의 지켜야 할 행동 강령을 하나하나 편지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무능하고 사치에 빠진 남편의 실정은 마침내 프랑스 혁명을 유발하게 만들었고, 그녀 또한 사실과 다른 많은 죄를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사치와 문란한 성의 유희에 빠졌었다는 그녀의 죄과는 사실과 다르다는 후세 사람들의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2006년 9월 11일 월요일
6. 루브르 박물관, 위고의 집, 퐁피두 센터 외
꼬르 쌩떼밀리용역에서 지하철 14호선을 타고 3정거장을 가다가 피라미드역에서 내렸다. 오늘은 루브르 미술관을 비롯한 피카소 미술관, 보주광장, 빅토르 위고의 집, 퐁피두 센터, 시테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요한 23세 광장을 둘러보기로 작정을 했다. 내부를 관람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지도를 보고 찾아가 위치만 확인하고 밖에서만 보기로 했다.
파리를 방문했던 사람치고 루브르 미술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경내에 들어서자 마자 그 큰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190년 필리프 오귀스트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지키기 위해 건설한 성채였던 것을 푸랑수아 1세가 르네쌍스 양식으로 개조 한데다가, 그 후 카드린 드 메디치, 앙리 4세, 루이 12세, 루이 13세,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 등의 왕들이 4백년에 걸쳐 개조하고 확장했고, 가장 최근에는 1969년 부속건물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던 재무부가 이전할 때, 건축가 M 페이가 입구에 금속과 유리만으로 피라미드를 설계하여 새웠다고 한다.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장품들은 추후에 관람하기로 하고, 프룸 데 알 광장과 퐁피두 센터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진 프룸 데 알 광장은, 역사가 오래된 과일과 야채를 파는 시장이었는데, 1979년에 현재의 거대한 복합 상가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하 2층과 3층에는 고급스러운 부띠크에서 부터 대형 상점들까지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지상에는 잘 꾸며진 정원이 사람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 생 와스타슈와, 앙리드 말레가 조각한 커다란 얼굴을 한 손이 바쳐주고 있는 [레쿠트]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그늘의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처럼 도시락을 준비해 와 먹고 있다.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도로 표지판을 따라 10분 거리에 있는 퐁피두 센터를 찾았다. 이 건물은 퐁피두 대통령시절 그의 요구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가장 합리적으로 설계를 하여 지어진 것으로, 세계가 알아주는 건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의 눈에는 외부의 모습이 마치 임시건물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에스컬레이터, 수도관, 가스관, 심지어 건물의 뼈대인 철근까지 모두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미관상 흉물스럽게까지 보였다.
그러나 내부에 전시되고 있는 예술품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가 아끼는 진귀한 작품들이 있어, 입장하는 관람객들의 소지품까지 검사를 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 앞 광장에서는 각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공연도 하고, 화가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내가 갔을 때에는, 한쪽에서는 몽골 사람들이, 또 한쪽에서는 중국여인 한 사람이 전통복장을 하고, 자기들의 전통음악을 연주하며 컴팩트 디스크를 팔고 있었고, 인도사람 또한 그들의 복장을 하고 잡다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주변역시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상점들이 호황을 이루고 있었다.
퐁피두센터에서 나와 지도를 보면서 피카소미술관을 찾느라 좁은 골목길을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가게에 들러 길을 묻고서야 찾았다. 생각보다는 좀 초라해 보이는 곳에 있다. 관람료가 6.5 유로 이니 우리 돈으로 8천원이 조금 넘는 돈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그가 사망하자, 프랑스 정부가 유족들로부터 유산 상속세 대신 그의 작품을 기증 받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200개의 유화, 158개의 조각, 88개의 도자기, 3천 점의 판화와 뎃생, 콜라주 등이 소장되어 있어 피카소의 작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달리는 말은 산을 다 보기도 전에 보주광장과 빅토르 위고의 집을 향해 재촉한다.
파리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보주 광장은 앙리 4세에 의해 만들어진 왕궁 자리인데, 원래 샤를 6세부터 앙리 2세가 머무른 저택이었으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앙리 2세가 궁정에서 열린 마상 경기에서 사망하자 저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광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앙에 루이 13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보주 광장은 한 면에 9채씩, 총 36개의 오텔(Hotel)들로 둘러싸인 완벽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남북의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저택이 있었고, 리슐리의 추기경과 극작가 몰리에르 등 보주 광장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당대의 실력가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마레 지역은 파리 최고의 부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장 6번지의 집에는 <레 미제라블>의 작가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가 살았었는데, 이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게 개방되고 있다. 지금은 내부를 수리하고 있는지 문이 굳게 닫쳐 있고, 시끄러운 작업도구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그의 문패 앞에 서서 사진만 한 컷 촬영하고 발길을 돌렸다.
파리 시청 건물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시테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향한다. 센 강에 둘러 쌓인 시테 섬은 생 루이 섬과 함께 파리시의 시발이 된다. 2000년 전 켈트족이 외침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섬에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파리]라는 오늘의 도시이름도 여기에 살던 [파리시]라는 부족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한 생트 샤펠 대성당, 최고 재판소와, 콩시에르쥬리,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노트르담은 성모마리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노트르담대성당(Notre-Dame de Paris)은 1163년 공사를 시작해 1245년 완성하였다. 13세기 이후 고딕양식의 대표적인 걸작품으로 뾰족한 아치와 교차 돔을 주된 받침대로 두터운 벽체를 떼어 내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색채 미술을 표현하였다. 나폴레옹이 대관식을 한곳으로도 유명하다.
많은 관광객들에 떠밀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를 돌아보는데, 동쪽과 서쪽의 대형 장미 스테인드 그라스 창문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 뒷편에 있는 요한 23세 광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콩시에르쥬리
지금은 잘 단장되어 음악회나 포도주의 시음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콩시에르쥬리는 원래 사에르주 백작의 개인 저택이었던 것을 프랑스 혁명당시 감옥으로 사용 할 때, 마리 앙뚜와네뜨, 살로트 코르테등이 수감되어 있기도 했다고 한다. 밖에서만 돌아보고 내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펠
생트 샤펠
1248년 Saint Louis의 요구에 따라 Pierre de Montreuil가 지은 고딕식 성당으로 시테섬에 위치하고 잇다. 이 성당은, 웅장한 유리창으로 유명하다. 그 스테인드 글라스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13세기 중반 생 루이 왕에 의해 건축된 고딕 양식의 걸작품 중 하나다. 이 예배당 내부에는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표현해놓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는데 햇빛이 비치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매우 아름답다. 파리는 온통 미술관이나, 박물관, 그리고 숫한 역사 유물들로 채워져 있어서, 도시 전체가 역사 유물의 전시관인 듯 하다. 그리고 그 유서 깊은 건물의 외부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조각들과 아울러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조각상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수 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여러 왕조들이 수없이 바뀌면서도, 수도는 변함없이 파리만을 유지해 온 것도, 이들이 얼마나 파리를 사랑하고, 아끼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를 증거로 보여주는 것 같다.
2006년 9월 12일 화요일
7. 에펠탑, 사이요 궁전, 엥발리드 외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오페라 극장과 혁명 기념탑, 오른쪽의 탑에는 혁명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으며, 52미터의 탑 꼭대기에 날개를 단 황금 빛 자유의 수호신이 올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정명훈씨가 이 오페라 극장의 상임 지휘 감독으로 있었던 기억을 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다 바라보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에펠 탑 쪽으로 가면서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시내를 더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내버스를 타니,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 센 강을 건너 50분만에 에펠 탑 앞에 내려주었다. 1889년 혁명 100주년과, 국제 박람회에 때맞추어 새워진 높이 324 미터의 이 탑은, 개선문과 함께 파리의 상징이 되고 있어, 파리를 가 보지 않은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193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새워지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었다는, 이 탑 아래 서서 올려 쳐다보니, 그 어마어마한 규모가 나를 주눅들게 한다. 7,300 톤이나 되는 강철을 사용했다고 한다.
낮은 언덕길을 올라가 사이요 궁 분수 앞쪽에서 내려다 보는 에펠 탑의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양편으로 키 큰 나무들이 반듯하게 늘어선 사이로, 약 8,000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들판인 샹 드 마리스 (3월의 들판)가 끝없이 펼쳐져서 그 끝에 서있는 육군 사관학교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그 광활함을 볼 때, 나는 도시 안에서도 땅을 이렇게 여유롭게 사용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부러웠다. 원래 이 샹 드 마리스는 육군 사관학교의 행군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혁명기간동안은 대대적인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전망이 좋은 이곳에서 아내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나에게 폼을 좀 잡아보라고 하는데, 관광객 한 사람이 자기가 찍어줄 테니 같이 서라고 한다. 나중에 카메라를 되돌려 받으며 고마워서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독일에서 왔다며 미소를 짓는다.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인상이 부드럽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며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서너 시간 후에 알렉산더3세교 위에서 이 사람을 또 만나, 한 번 더 같은 신세를 지게 되었다. 관광하는 사람들의 코스가 비슷해서 만나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나 보다. 서로 인사를 하고, 알은체를 하면, 다음에 만나면 이렇게 반가운 것을, 우리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기를 주저하고 있다.
1769년부터 1772년 사이에 지어진, 나폴레옹이 다녔던 육군 사관학교 건물에는 현재 국방대학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좀 특이하게 생긴 탑이 하나 새워져 있는데, 앞에서 보면 두 탑신 사이로 에펠 탑이 정면으로 보이고, 탑신을 유리로 덧씌워 놓았는데, 거기에는 여러 나라 언어로 글자를 써 놓았는고, 그 중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평화라고 쓴 글자도 있었다. 여기서도 사진 한 컷. 대충 건물만 둘러보고, 늘어선 건물을 돌아, 좁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유네스코에 들렸다. 딸아이가 근무하고 있는 건물에는 피카소의 거대한 벽화와, 후안 미로가 디자인한 도자기, 헨리 무어의 조각들을 비롯한 많은 현대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671년부터 5년에 걸쳐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하여, 노령 상이 군인들의 보호시설을 위하여 새워진 엥발리드에는, 황금으로 도금된 빛나는 돔 지붕의 교회가 유명하다. 이 아래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다. 돔 구조물 바로 아래 붉은 반암 석관으로 덮인 6개의 석관이 있고, 관 속에 또 다른 관이 들어가 있는 식으로 된 이 6개의 관에 나폴레옹의 유해와 유물들이 들어 있는데, 이는 루이 필리프 왕이 1840년 나폴레옹 사후 20년이 지나,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이 유해와 유물을 반
환 받아 옮겨진 것이라 한다. 그의 형제들과 아들의 묘도 같이 있으며, 2차 대전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마샬 포슈도 여기에 묻혀 있다고 한다. 또 이 곳에는 군사박물관과, 해방의 역사박물관이 같이 있는데, 군사박물관에는 주로 나폴레옹시대에 중점을 둔, 프랑스의 승리와 패배를 엿볼 수 있다. 각종 무기와 군복, 박제된 말까지 전시되어 있다. 건물 내부와 밖에까지 각종 대포들이 수없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옛날 로쯔 제독이 함대에 장착하고 강화도 앞 바다에 와서 우리 선조들을 향해 쏘았을지도 모르는 대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촬영했다. 넓은 도로변 공원의 나무 그늘을 따라 걸어 나오다 , 센 강 위에 놓인 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산더 3세교에서도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제휴와1900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건설된 이 다리는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알렉산더’라는 왠지 모르게 화려한 그 이름만큼 이 다리는 많은 금속 장식과 꽃 장식. 그리스 여신 장식들로 볼거리가 많은 다리이기도 하다.
푸티 팔레 미술관으로 간다. 그랑 팔레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다. 파리 시립 미술관이 같이 있으며, 1900년 국제박람회 때 프랑스 미술품의 전시장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개인 소장가들이 기증한 전시품들이 중세, 르네쌍스, 18세기 등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번에 7천200만유로(8천400만달러)를 들여 개.보수 공사를 한 결과 상설 전시장 면적이 65%나 늘어났다고 한다. 재수가 좋은 날인지 재개관 기념일에 맞추어 오게 되어서 공짜로 관람을 하게 되었다. 1층과 지하층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미술품들을 그야말로 달리는 말을 타고 휙휙 지나가는 산을 구경하는 식으로, 한바퀴 돌아 나오니 1시간 반쯤 걸렸다.
엘리제 궁으로 가는 도중 클레망소와 처칠의 동상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었다.클레망소는 의사요, 언론인이며, 정치가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 국민의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전 유럽을 시끄럽게 하였던 드레퓌시 사건의 부당함을,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와 함께 바로잡았던 일화로 해서, 프랑스의 양심으로 통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수상이었지만, 1, 2차 대전을 프랑스와 같이 싸웠기 때문에 여기에 동상을 새운 것이 아닌가 한다. 엘리제 궁은 1718년에 지어져서, 1873년이래 공화국 대통령의 공식관저로 사용되어 왔는데, 나폴레옹시대에는 그의 누이 카를린 뮈레와, 아내였던 조세핀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래층은 집무실이고 2층 을 대통령의 사택으로 사용한다. 경비들이 줄지어 늘어선 정문 앞 좁은 도로 건너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의장대복장을 한 군인들이 정렬해 있었다. 정문에서 사진 한 장을 촬영하고, 무슨 행사가 곧 있을 것 같아, 기다리니 경비가 빨리 가라고 기다리는 관광객들을 재촉 한다. 매년 9월 세 번째 주말에 맞는 “유럽 문화유산의 날” 에는 평소에 경비가 이렇게 삼엄한 궁궐도 개방을 한다는데, 그런 때에 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궁궐 밖으로만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넓은 도로 옆으로는 오래된 정원이 있고 그 옆에 고급 까페들이 있다. 정원에 앉아서 쉬다가 클레망소 역에서 집으로 오는 지하철을 탔다.
2006년 9월 13일 수요일
8. 파리대학, 팡테옹, 뤽상브르그 외
집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 센 강을 건너 꼴레쥬 드 파리 정거장에서 내렸다. 파리대학이 있는 곳이다. 외국 사람들에게는 소르본느대학이라고 해야 쉽게 알 수 있지만, 지금은 파리국립대학의 이름을 공유하는 13개의 대학(Academie de Paris)은 각각 고유 이름이 있으며 파리시내와 근교에 흩어져 있다. 각 대학이 종합대학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여러 학부를 포함하는 형태이다. 예를 들어 파리 제1대학은 라 소르본의 전통과 파리대학의 법·경제학부를 계승했는데, 유서 깊은 역사, 팡테옹 신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법학대학의 건물에서 연유하여 팡테옹-소르본(Pantheon-Sorbonne) 대학이라 불린다. 프랑스와 유럽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꼽히며 4만여 명의 학생들이 법학·정치경제학·인문학·예술학부를 다니고 있다.
파리 제2대학(팡테옹-아싸스)은 법학과 경제학과로 유명하며, 파리 제3대학(소르본 누벨)과 파리 제4대학(파리-소르본)은 예술·문학·인문과학 등을 중심으로 과거 철학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파리 제5대학은 르네 데카르트 의과대학으로 유명하고, 파리 제6대학(피에르, 마리 퀴리 대학)은 이공계열, 의약계열이며 파리 제7대학(쥬시유)은 문학·예술·인문과학·이공계열·의약계열로 유명하다. 그 밖의 파리 대학들은 파리 근교에 위치하며 역시 다양한 학부들로 구성되어 있다. 딸아이는 제6대학에서 학위를 받기 위하여 공부하고 있다. 1253년에 신부인 로베르 드 소르본이 16명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설립했던 것이, 지금은 파리 최고의 상아탑이 되었다.
현재 유서깊은 라 소르본 건물은 파리 1·3·4·5 등 4개의 파리대학이 공유하므로 사실상 캠퍼스가 중복되어있는 셈이다. 처음에 소르본 건물에 들어가면 미로 같은 구조 때문에 헤매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이 서로 강의실 위치를 확인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한다.
세계가 알아주는 명문대학의 정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좁고 높기만 한 철 대문 앞에서, 나는 이 학교(켐퍼스는 다른 곳에 있지만)가 배출한 오직 한 여성, 마리아 스콜로도프스카 라고 불리던, 퀴리 부인이 생각났을 뿐이다. 폴란드의 가난한 교사의 딸로 태어나, 많은 남매들 속에서도 향학열이 특별해, 늘 꿈에 그리던 이곳 소르본느 대학에 와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두 딸을 낳아 행복을 얻게 되고, 그녀 자신은 두 번이나 노벨상을 수상하였으며, 남편과 큰딸과 사위까지 노벨상을 받았고, 둘째 딸 에브 퀴리는 어머니의 전기를 써서, 더욱 유명해졌던, 그녀의 위대한 삶이 내 머리 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가, 아니 세계가 그녀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추앙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건물은1806년 나폴레옹에 의하여 17세기식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파리대학을 돌아 뒷편에 팡테온의 웅장한 건물이 서 있다. 그리스어로 사원이라는 Pantheon 에서 따온 것인데, 그리스나 로마에서 본받아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 지하는 프랑스를 빛낸 볼테르, 룻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마리 퀴라 부부등 80 명의 대리석 관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명 정치인들은 이곳에 무덤을 만들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하는데, 오직 문교부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는 사후 수 십년이 지난 후에야 여기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를 정치인으로 보지 않고, 사상가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이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상을 얼마나 객관적이고도 신중하게 선정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점이다. 건물 오른편에 못생긴 작은 석상이 하나 서 있는데, 쟝 자크 룻소라고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류에 끼친 공헌을 생각 할 뿐, 모범적이지 못한 그의 사생활은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유명한 뤽상부르그 궁전과 공원이 있다. 지금은 상원 의회로 이용하고 있는 마리 드 메디치의 저택과, 저택 앞에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을 누구나 관람하고, 이용할 수 있어서 많은 관광객과, 젊은 남녀의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아 마치 이곳이 도서관 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저택 옆, 아름드리 나무 그늘에 메디치 분수가 있어,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서, 그녀의 화려했으면서도 평탄치 못했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시집올 때, 당시로서는 초유의 엄청난 지참금을 갖고 왔었고, 루이 13세를 비롯한 왕제 가스통 도를레앙, 에스파냐 펠리페 4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 영국의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 사보이 공작부인 크리스틴 등 다섯 자녀를 낳은 어머니로서, 남편의 사망 후에는 루이 13세의 섭정까지 했던 그녀의 말년은, 국외로 추방되어 화가 루벤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갔을 정도로, 너무나 비참했던 것을 생각하면, 한 때의 영화가 풀잎에 맺힌 이슬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녀의 작은 조각상이 정원 가 산책로에 서 있어도, 오가는 산책객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치고 있었다.
2006년 9월 14일 목요일
9. 튈르리 정원
현재 루브르 박물관 옆에 있는 튈르리 궁은 카트린 드 메디치를 위해 필리베르 드로름이 건립한 궁전이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치와 마찬가지로 피렌체에서 4명의 교황을 배출한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앙리2세의 왕비로 남편 사후 3명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고, 섭정 기간 동안, 피로 물들었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던 강렬한 여제였다. (앙리 4세의 첫번째 왕비의 어머니이기도 함)
그 이후 혁명때 베르사유 궁전에 살던 루이 16세 가족이 강제로 이주해와 살았던 궁전으로 파리 코뮌(1871년) 시가전 때 소실되어 그 정원만 남아 있다. 정원은 처음에 이태리의 피렌체식으로 만들어 졌었지만, 후에 프랑스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옆에 있는 오랑쥬리 박물관에서는 20세기 초 회화 작품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