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호 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2022/05/19
박삼중 스님은 효창공원을 자주 찾는다 한다. 그곳에는 백범 김구, 매헌 윤봉길을 비롯 이봉창, 백정기 의사가 모셔져 있어서다. 삼중 스님은 2001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얼과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교외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암장지적' 비석이 세워진 장소로 향했다. 이곳은 윤봉길 의사가 암매장됐던 흔적을 남기고자 1992년 12월 19일 조성됐다. 12월 19일은 윤 의사가 순국한 날. 가나자와에 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 보존회'에 의하면 당시 윤 의사의 유해가 일제에 의해 인근 육군묘지에서 벗어난 언덕 밑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는 통로에 묻혀 있었다 한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던 '박열' 에게 윤봉길 의사 유해 발굴을 부탁했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뜻있는 제일동포들과 같이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 시 노다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 발굴은 아무런 자료도 없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아직 발굴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다행히 교포들을 통해 수소문 끝에 당시 총살형이 끝난 뒤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주변 작은 절 비구니 스님이 수습하여 암매장했다는 정보가 있어 그 비구니 스님을 수소문한 끝에 다행히 윤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한다. 일제는 암장지가 묘지임을 알지 못하도록 아예 묘비나 묘표를 세우지 않았고, 봉분이 없는 평토장 형태로 만들어 행인들이 함부로 밟고 지나다니도록 방치했다 한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임시정부 차원의 유해 발굴단이 조직된 것으로 안다.
노다야마 공동묘지 한쪽 길로 접어들자 계단이 놓인 길옆에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이라 쓰인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꽃이 놓여 있고 '암장 지적 비' 왼쪽 옆에는 윤봉길 의사에 대해 "장렬한 24세 6개월의 짧은 생애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체는 형법의 절차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암장돼 묘비도 없이 많은 사람들 발에 짓밟혔다" 등을 설명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암장지 근처에는 1992년 4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과 윤봉길 의사 의거 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세운 순국기념비도 있다.
당시 삼중 스님은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얼이 서린 현장에서 69주기를 추모하는 추모제를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 그리고 내 일을 돕는 장진용 사무장, 인연 있는 제일동포들과 같이 여법하게 치렀다 한다. 삼중 스님은 윤봉길 의사와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한다. 윤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 씨를 평소 잘 알았다 한다. 40여 년 전 서울 인사동서 자주 만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고 윤봉길 의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동생 윤남의 씨의 기억에 의하면 형 윤봉길 의사가 고향인 충남 예산 수덕사에 주석하신 '만공 스님'께 '처사계'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그날 하루 종일 추모제를 올리면서 일본의 협박과 고문에도 죽는 순간까지 대한 남아의 서슬 퍼런 기개를 보였던 윤봉길 의사의 순국정신을 깊이깊이 새겼다 한다. 삼중 스님이 말하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상해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에는 일본 상하이 파견군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 해군 사령관 노무라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날 무렵 야채상으로 가장했던 윤봉길은 앞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이 즉사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쓰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그 외 많은 인사들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 고 감격했고 무관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 육군 중앙군관학교에 조선인 특별반을 설치 운영하는 등 우리 독립운동도 적극 성원했다. 당시 침체일로에 빠졌던 상해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 의거에 힘입은 바 컸다.
현장서 붙잡힌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때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보였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후 1946년 6월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삼중 스님은 1주에 3번씩 혈액 투석을 받는 중환자이다. “건강이 좀 나아지면 사형수도 만나고 효창공원에 가서 윤봉길 의사를 만나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래는 필자가 쓴 헌시이다.
[헌시] 약속
-장만호 아동문학가-
"윤 동지,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
ㅡ 가슴 속에 피눈물이 고인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멈춰선 매헌,
망부석처럼 손을 들고 서 있는 백범
삼라만상이 침묵 속에 잠긴다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
저는 좋은 시계가 필요치 않습니다
선생님의 낡은 시계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에겐 선생님의 따뜻한 온기가 더
필요합니다.
어서 제 시계를 받으시고
선생님의 낡은 시계는 절 주십시오"
그리고 매헌은 상해 홍구공원으로 떠났다
장렬한 24년 6개월의 짧은 생애
그들은 유체를 형법의 절차를 무시하고
암장해, 많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죽는 순간까지 당당했던 그 의기는
광복의 횃불이 되어 무지갯빛으로 타 올랐고
조국은 광복의 새 아침을 맞았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에 의해
매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6월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편안히 누우셨다
"윤 동지,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
1949년 6월 동포의 총탄에 쓰러진
백범은, 매헌과의 약속을 지킨 것인가
두 분은 효창공원에 누워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아마도 분단된 조국,
분열하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노심초사 밤잠을 설치리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으로 약속을
지킨 매헌 윤봉길 의사
비록 몸은 떠났지만 그 정신은
우리들 혈관을 타고 흘러
영원히 지지 않는 붉은 꽃으로 피어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