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 읽기(예종 1)
예종대왕(이하 예종이라 함)은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8대 왕이다. 그의 생애를 보면 생존시에도 그렇지만 사후에도 역시 남다른 무엇이 느껴진다. 그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과 그리고 그가 승하한 뒤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냐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함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종의 생애를 살피는데 있어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왕실내부의 인적 구조의 측면과 정치적인 배려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데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래 세조의 후사는 그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 추존) 이어야 했었다. 그러나 세자로 정해진 지 2년만에 갑작스런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약관 스물의 나이였다. 또한 그와 소혜왕후 한씨와의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자을산군 두 아들이 남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의경세자의 생애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죽음은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있어 아버지로서의 슬픔과 함께 후사문제에 대한 정치적 공백을 여하히 없앨 것인가를 염려하게 하였다. 또한 원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로서 해양대군 즉 예종이 세자에 책봉되고 있는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경세자에 대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슬하에는 의경세자와 해양대군, 의숙공주가 있었고 근빈 박씨로부터는 덕원군과 창원군이 있었다. 의경세자는 세종 21년 9월 15일에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궁중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왕자 대군의 경우 자식을 볼 때는 궁 밖에서 낳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희왕후와 세조에 대한 아버지 세종과 모후의 사랑이 지극하여 이렇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 후 의경세자는 세종 27년 7살의 나이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배명되어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으며, 1453년(단종 원년) 정월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진계되었고 다시 계유정난 뒤인 10월에는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제배되었다.
이 후 세조 원년 7월 26일에 세자에 책봉되기에 이른다. 빈(嬪)으로는 한확(韓確)의 딸인 소혜왕후 한씨와 소훈 신씨(昭訓 愼氏) · 권씨(權氏) · 윤씨(尹氏)가 있었는데, 다만 소혜왕후로부터 2남 1녀를 얻었을 뿐이었다. 의경세자가 이토록 부인을 일찍이 여럿 두었던 것은 장인인 한확의 조언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세조 3년 9월 2일에 의경세자가 죽었을 때에 원손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성종)의 세수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면서 세조는 장자인 의경세자의 뜻밖의 죽음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강력한 정치력에 의해 정국이 안정을 찾아가는 기세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후사를 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시라도 이를 소홀히 하거나 비워 놓아서는 안되었다.
그 혈통대로라면 당연히 장자인 월산대군이 세손에 책봉되어 왕자로서의 수업을 시작하여야 했다. 그러나 세조와 정희왕후는 이러한 순서를 밟지않고 차남이었던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조 스스로 어린 군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악폐와 혼란을 몸소 겪어봤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여러 대신들도 둘째인 해양대군을 추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점도 참작되었다.
마침내 세조는 이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면서 3년 11월 10일에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정하게 된다. 이 때 해양대군의 나이가 아흡이고 세조는 불혹을 갓 넘긴 상태였다. 세조 자신의 건강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자신이 군국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세자의 왕자 수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면 결코 다른 일은 벌어질 리가 없었다. 어쨌든 해양대군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자에 책봉되어 세조의 승하 후 즉위한 예종인 것이다.
그러면 다시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생애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예종은 세종 32년인 경오년 정월 초하루에 사저에서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왕실은 세조의 부왕인 세종의 병환이 차도가 없는 관계로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또 형인 문종도 정사를 돌보랴 세종의 병간호를 몸소하랴 해서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이러한 차에 자식을 보게 되었으니 세조는 그 기쁨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조용히 차남의 탄생을 자축할 뿐이었고 부인 윤씨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종의 붕어와 연이은 문종의 병환 등으로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좀 허약하긴 하였으나 잘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열살 이상의 나이차가 있는 형 도원군(의경세자)의 우애도 작용했던 듯하다.
단종의 재위기간에는 조선 개국이래 최대의 위기라 할 정도로 권력의 향방을 둘러싼 암투가 치열했다. 특히 세조는 단종의 큰 숙부로서 종친의 우두머리였던 관계로 그의 행보 하나 하나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조는 정치적 혼란기를 바로잡으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가 1455년 윤6월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예종은 형 도원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세조 원년 8월 19일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봉해졌다.
해양대군(예종)은 당시의 유아(幼兒)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창진(瘡疹) 즉 홍역을 앓게 된다. 세조 2년 5월 3일의 일이었다. 지금이야 별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였다. 해양대군이 창진을 앓자 세조는 아버지로서의 아픔과 함께 걱정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세자의 몸도 좋지 못한 상황은 세조에게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해양대군의 창진에 대해 더욱 신경이 쓰이었다. 이 때 세조가 해양대군을 위하여 조치하고 있는 다음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절실함이 보인다.
세조 2년 5월 3일 예조에 전지(傅旨)하길, “경연 · 윤대 · 상참 · 조계 등의 일을 지금 잠깐 정지하겠다.” 하였으니, 해양대군이 바야흐로 창진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대궐 안의 여러 곳에 명령하여 세속에서 창진 때 꺼리는 것을 일체 금단하게 하고 오늘부터 어선(御膳)은 소금에 절인 채소만을 올리게 하라.”고 명하여 어주(御廚)를 중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세조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해양대군의 병세는 큰 차도가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한 해를넘긴 3년 5월 초에 이르러서야 그 병이 낫게 된다. 이 때 세조의 기쁨은 굉장히 컸다. 일본국의 사신이 와서 이들 및 좌부승지(左副承旨) 한계미(韓繼美)와 좌찬성 신숙주 등의 대신들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과를 시험하려는 중이었는데 해양대군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어가를 돌려 돌아온 것이다. 그 기쁨이 이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조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장자로서 그 동안 자신을 보좌해왔고 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미더운 모습을 보여줬던 세자가 세조 3년 9월 2일 갑작스레 세상을 뜬 것이다. 특히 자식을 많이 두지 않았던 세조인지라 아들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그러나 수많은 인맥을 관리하고 거사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세자 장(暲)의 죽음은 아직까지 단종복위의 움직임이 있던 때인 만큼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즉각적인 조치 즉 건저(建儲)를 바로 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양대군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다만 아직 몸을 추스려야하는 때였고, 또 형의 죽음으로 혹 불상사가 이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만사를 조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조는 세자가 죽은 바로 다음날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렸다.
즉, 해양대군 및 원손에게 명하여 처소를 피하게 하고 공궤(供饋)는 전과 같이 하되 사옹방(司甕房)의 선수(膳羞)를 쓰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 해양대군의 나이는 아홉이었고, 원손인 월산대군은 넷이었으며 자을산군 곧 성종은 세조 2년 7월 30일에 태어나 강보에 싸인 아기일 뿐이었다.
세조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만 하였다. 자신의 피와 땀으로 세운 작금의 조정을 잘못 정해진 후사로 인하여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단계를 밟으면서 기반을 튼튼하게 하여야 했다. 세조와 정희왕후 그리고 공신들 및 대신들의 중론은 거의 일치했다.
왕위 계승의 서열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뒷전에 있던 해양대군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먼저 세조는 11월 7일 해양대군의 관례를 올렸다. 이것은 실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즉, 세조 3년 11월 7일 형조에 전지하기를, “해양대군의 관례를 행하였으니, 11월 초 간통과 도둑을 제외한 유형(流刑) 이하의 죄는 모두 용서하여 면죄하라.” 하였다.
관례(冠禮)를 올린 후 곧바로 조정에서는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중지를 보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청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해양대군이 관례를 올린 지 사흘이 지나고 곧바로 11월 10일 이조판서 한명회와 예조참판 구치관을 명나라에 보내어 해양대군을 세자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제 해양대군은 철저한 보호가 따르게 되고 군왕으로서의 치도와 덕,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세조 3년 11월 15일, 세조는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백관과 종실 모두가 참석한 자리에서 새로운 왕위 계승자로서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때의 분위기는 매우 엄숙하면서도 장중하였다. 근정전의 하늘 높이 치솟은 치미와 기왓장은 인왕산의 턱과 이어지면서 새로운 세자의 책봉을 떠받들고 있었다. 근정전 넓은 뜰에 가득한 만조 백관은 비록 어리긴 하지만 위엄이 깃들어 있는 세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어린 지존(至尊)의 모습 속에는 그만큼의 고귀함과 위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선포되고 있는 책문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즉, 책문에 이르길, “내가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조석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길이 천지와 종사를 생각하여 마땅히 국본을 세워야 하므로 이제 너 황(晄)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일찍이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이를 멀리 할 것이며, 스승을 존중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원량(元良)의 덕을 이루고 여망(輿望)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라고 하여 국본으로서의 왕세자가 힘써야 할 것에 대해 그 대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세자는 이러한 부왕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이를 몸에 익도록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달 18일에 세자는 인륜의 근본을 담고 있는 <효경>을 읽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때 세자에게 진강(進講)하였던 대신은 이조 참의 이극감과 예문관 직제학 한계희였다. 특히 이극감은 예종의 평생 스승으로서 학문의 길을 넓혀주었으며, 세조는 특히 그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처음으로 세자에게 <효경>을 진강하는 영광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술을 먹이게 하고 또 표리(表裏) 각기 1투(套)를 하사하였다.
이 후 예종은 많은 정치적 파란과 혼란의 과정을 겪는다. 숙부들과 고모들, 형과 동생들의 죽음이 그에게도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은 아니었고 또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천리에 맡기는 수 밖에는 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기다림 없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한 시라도 놓칠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세자의 지위에 있던 예종에게 있어서는 더욱 귀중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가 누리는 일다경(一茶頃)의 시간은 범인의 십년에 해당하는 순간일 수도 있었다. 지위는 사람을 그만큼 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정성과 공을 들이는 것은 부모된 입장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 점만을 놓고 본다면 세조도 또한 열성 부모 중 하나에 끼일지도 모른다. 세자의 공부 진도에 대한 관심과 아들의 마음가짐 및 행실 등과 관련한 법도에 대해 자상히 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조는 이를 위해 저 유명한 <훈사(訓辭) 10장>을 예종에게 내리고 있다. 그 서문에는 세조와 정희왕후가 세자를 아끼는 마음과 당부의 뜻이 잘 표현되어 있다. 즉,
“부모가 너를 위하여 교육하고자 생각하는 바가 한 가지가 아니나 네가 외로운 몸으로 장차 종사를 부탁받게 되면, 사람과 하늘에서고 가엾게 여길 것이니, 마땅히 이 뜻을 본받으라. 오늘 아침에 너의 모친이 나와 더불어 세상일을 논하다가 참소(讒訴)의 두려움에 이르러 말하기를 `참소하는 사람은 반드시 앙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옳은 말씀이요. 다만 참소를 당한 사람을 용서할 뿐이오. 공자도 또한 이에 불과하오' 하니, 너의 모친께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옳습니다. 모름지기 이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므로 내가 곧 마음속으로 감동하여 `나는 어려움을 당했으나, 너는 태평함을 만나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일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만약 네가 나의 선례(先例)에 구애되어 변통(變通)하는데 이르면, 이는 곧 이른바 원착방예(圓鑿方쵷)인 바 그러므로, 간략하게 훈사(訓辭)를 지어서 너에게 주어 종신토록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으로 삼게 하니, 너는 모름지기 잊지 말라.”라고 하여 참소(讒訴)를 조심하며, 사리에 맞게 행할 것에 대해 신신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열 가지의 일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1.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덕을 가질 것.(恒德)
1. 신을 공경하여 섬길 것(敬神).
1. 간언을 받아들일 것(納諫).
1. 참소를 막을 것(杜讒).
1. 사람을 쓰는데 대한 일이다(用人).
1. 사치하지 말 것(勿侈).
1. 환관을 부리는 일이다(使宦).
1. 형벌을 삼가야 할 것(愼刑).
1. 학문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힐 것(文武).
1. 부모의 뜻을 잘 좇을 것(善述)이다.
군주가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닦아야 할 덕목인 항덕(恒德)으로부터 인사(人事)와 학문,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선술(善述)에 이르기까지 훈계하고 있다. 군주가 되기 위해 닦아야할 수업의 대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세조는 세자의 나이가 열 하나가 되자 성혼을 시키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통을 이을 아기씨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세자빈이 간택되고 가례를 올림으로써 이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나이인 세자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인륜을 올바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바로 세조 5년 8월 10일,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 ·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 · 도승지(都承旨) 윤자운(尹子雲) 등에게 명하여 사제에 돌아다니면서 처녀를 간택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세자빈의 간택을 명한 뒤에도 세조는 세자의 학문의 진전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쏟았다. 세자가 어떠한 책을 읽고 있는가, 그리고 그 습득 정도는 어떠한가, 다음 차례로 접하고자 하는 책은 있는가 등에 대해 부왕으로서의 배려를 자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세조의 마음은 다음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6년 3월 28일의 일이었다. 세조가 이극감에게 이르기를, “<대학>은 성리(性理)의 학문이니, 초학이 깨우치기 어려운 것이어서 나는 세자가 그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렵다. 대체로 공부를 하는 자는 성인의 글을 많이 읽으면 자연히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는 이러한 뜻을 알고 세자로 하여금 속히 <대학>을 읽도록 하고, 그 다음에 <논어>를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틀 전인 26일에는 전년도에 세자빈 간택을 명한 일이 정해지게 되었다. 바로 병조판서 한명회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세조는 형조에 교지를 내리어, 간사한 도적 이외에 유형(流刑) 이하의 죄는 모두 용서하여 면죄토록 하였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세조 6년 4월 18일 왕세자 당시 국속에 따라 빈씨(嬪氏)를 그 집에서 친영(親迎)하였다. 세자의 나이 열 둘, 세자빈의 나이 열 여섯이었다. 세자빈의 간택은 정략적인 면도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각각 혼인시키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력과 세조의 지도력이 합해지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었다.
이렇게 친영하는 날 세조는 중궁인 정희왕후와 더불어 광화문(光化門)까지 전송하고, 이어서 누각 위에 나아가서 세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왕세자가 혼례를 치르기 전에 왕비로부터 경계의 말을 듣는 초계의(醮戒儀)를 베풀기 위해 내시부(內侍府)에서 세조와 중궁의 어좌를 궁중에 설치하고 의장을 전정(殿庭)의 동서에 설치하고 사옹방(司饔房)에서 찬탁을 준비하였다.
가례를 치르고 난 뒤 세자의 용태는 더욱 밝아지고 학문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또한 이제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찾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열셋이 되던 세조 7년 2월 6일에 자신이 직접 오공신(五功臣) 및 그 친자(親子)와 적장자(嫡長子) 등을 거느리고 회맹(會盟)을 올리는 것을 주관한 것이다. 회맹이란 본래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산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며 신명(神明)에 서로의 충정(忠貞)과 권애(眷愛)를 맹세하는 의식이다. 가령 회맹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 이는 훈신들의 마음을 격려하여 대대로 그 충정을 돈독히하여 왕실을 도움으로써 더불어 무궁한 기쁨을 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무릇 우리 동맹인은 이제부터 이후로 각기 스스로 채찍질하고 연마하며 더욱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하여 오직 충성과 신의로써 의심하지 않고 여간하지 않아서 자손만대까지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며, 혹시라도 어김이 있으면 신명(神明)이 위에 계심을 명심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 · 정사공신(定社功臣) · 좌명공신(佐命功臣) · 정난공신(靖難功臣) · 좌익공신(佐翼功臣) 및 그 자손들과 함께 이를 맹세한 뒤 희생물을 바치고 그 피를 서로 나누어 마셨던 것이다. 이른바 삽혈(챍血)의 의식이 그 절차였다. 그리고 이들을 회맹공신(會盟功臣)이라 하여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자궁(資窮)한 자는 아들 · 사위 · 아우 · 조카 · 손자 중에서 1인을 택하여 대신 그 품계를 받게 하였다.
이러한 회맹제를 치름으로써 세자의 지위는 확고부동해졌고 차기 왕권의 계승자로서의 권위도 또한 의연하였다. 세자는 이러한 대소사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신료를 쓰는 방법, 그리고 일의 처리과정 및 처리 후 상벌의 시행 등에 대해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이즈음 세자에게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사실 세자뿐만이 아닌 세조 부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세자빈 한씨가 원손을 잉태한 것이다.
이러한 동안에도 세자는 더욱 학문의 수양에 힘써 부왕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한다. 즉, 7년 6월 29일 세조가 사정전에 나아가 호조 참판 이극감에게 “지금 세자의 글씨를 보니 나의 글보다 낫고 또 문리도 터득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한다. 대저 학문을 하는 길은 종일토록 한 장을 외워서 의지와 기개를 손상시키는 것보다 책 전부를 널리 읽어서 말과 기개를 더 잘하게 하는 것이 좋다. 경이 그것을 힘써서 세자로 하여금 많이 읽어서 널리 알게 하고 삼가 세자로 하여금 글 읽는 것만 부지런히 하여 의지와 기개가 손모되어 마침내 썩은 선비가 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렇게 칭찬과 더불어 혹 모자란 부분에 대해 이극감으로 하여금 잘 가르치도록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손을 잉태하고 있는 세자빈은 산날이 가까워지고 있어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17세이고 첫 아이인지라 그만큼의 위험은 컸다. 그리하여 왕실에서는 세자빈의 심신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사가(私家)로 옮겨 몸조리를 하게 하였다. 이 때가 12월로 막 접어들기 전이었다. 마침내 11월 30일에는 그토록 고대하던 아기씨가 녹사 안기(安耆)의 집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난산이고 세자빈의 몸도 허약해져 있던지라 마냥 기쁨에 차 있을 수 없었다.
12월 5일에 세자빈은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로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세자와 세조, 정희왕후, 아버지인 한명회 등에게 많은 슬픔을 남겼다. 이듬해 2월 경인(庚寅)에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에 따라 세자빈의 상례를 치르도록 정하였고 파주(坡州)의 보시동(普施洞)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장순빈(章順嬪)이라 하며 능호는 공릉(恭陵)이라 하였다. 그녀는 예종이 왕위에 오른 뒤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되었다.
세조 8년 2월 11일에 세조는 왕비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동궁의 터를 잡았다. 세자의 거처는 일단은 인지당(麟趾堂)이었지만 세자궁으로서는 협소하고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세자궁을 새로 짓기를 결정하였다. 세자궁은 세조 8년 12월 10일에 마침내 완성되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 새로운 마음으로 거처하게 된 것이다.
세조는 세자로 하여금 평상심을 되찾고 왕도를 깨치도록 하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8년 5월 3일에 세자에게 이르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에는 진한 부정(父情)과 군왕으로서의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저 인주(人主)의 도리란 백성을 사랑하고 절약하고 검소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만약 근본이 위태하면 나라도 곧 위태한 것이므로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도 편안하다'고 하였다. 무릇 눈 앞에 보이는 물건은 백성의 고혈(膏血)이 아닌 것이 없으니, 너는 비록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그 근원을 찾아서 백성의 폐해(弊害)를 덜어주면 그 근본이 편안할 것이다. 또 임금은 일이 많아 매우 바쁘고 힘들여 수고하는 것이 막심하더라도 안일(安逸)한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본성(本性)이 바르면 곳곳의 일마다 모두 안연(安然)하여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비록 몸은 수고로워도 편안하게 될 것이다. 너의 종신(終身)토록 행할 바는 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인주의 도리가 백성을 사랑하고 절약하며 검소하게 하는 데 있으며, 본성을 바르게하여 안연(安然)할 것을 밝히고 있다. 세조는 “예악(禮樂)은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나, 어버이를 섬기는 예(禮)는 더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무릇 예(禮)라는 것은 몸의 엄숙함이니, 엄숙함은 나약(懦弱)함을 바루는 것이다. 악(樂)이란 것은 동작의 화함이니, 화함은 포학(暴虐)함을 바루는 것이다.”라고 하여 예악의 의의를 말하고 이에 대한 어찰(御札)을 내려 간직하여 잊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악을 통해 군도(君道)를 이루는 것은 마치 성인(聖人)이 물(物)에 인연하여 교화(敎化)를 베풀어 백성의 뜻을 미리 안정시키고 천하의 형세를 굳게 하여 태평한 교화를 이루는 소이(所以)와 같다고 밝혔다.
세조의 세자에 대한 가르침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세조 8년 10월 9일에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상참(常參)을 받고, “내가 세자로 하여금 항상 상참(常參)과 조계(朝啓)에 따르도록 하여 군신(君臣)간의 일을 알게 하고자 한다. 세자는 무예(武藝)에는 능함이 있으나 학문에는 진전이 없으니, 이것이 내가 걱정하는 바이다.”라고 한 것과 11월 20일에 “너는 궁중(宮中)에서 나서 부인의 손에서 자랐으므로, 가난한 백성의 일을 알지 못하니 심히 불가(不可)하다. 모름지기 백성의 일도 알아야 가하다.”하고, 어찰(御札)로 “세자에게 문무(文武)의 도(道)를 가르쳐서 세상의 법을 갖추어 맛보게 하는 것은 상(上)이 되고, 몸소 노고(勞苦)를 맛보게 하는 것은 중(中)이 되고, 옛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하(下)가 된다.”라 하고, 곧 재추(宰樞)들로 하여금 출제(出題)를 지어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군부(君父)로서 자식을 가르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세조는 12월 4일 사정전(思政殿) 상참(常參)에서 2품 이상이 입시(入侍)하고, 왕세자가 술을 올린 뒤, 서연관(書筵官) 윤필상(尹弼商) · 이극기(李克基)를 불러 <맹자(孟子)>의 `군자는 천하 때문에 자기 어버이를 (장사지내는 데) 검소하게 하지 아니한다. [君子不以天下儉其親]'를 강(講)하게 하였다. 세조가 이에 말하기를, “너는 이 글에서 주해 외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하고, 드디어 세자에게 이르기를, “임금은 천하가 자기 한 몸을 받들기 때문에 사치하기는 쉬우나 검소함을 숭상하기는 어렵다. 옛 사람은 세탁한 옷을 입는 것을 임금의 미덕(美德)으로 삼았으니, 무릇 세탁한 옷을 입는 것이 어찌 덕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러나 미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검소함을 숭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라고 자상하게 풀이 하면서 그 정수를 말하여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검소하게 생활하여야 할 것에 대해서 세조는 세자에게 끝없이 강조하였다.
불사(佛事)를 일으키거나 그 숭상함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9년 10월 11일 사정전(思政殿)에 이어(移御)하여, 여러 종친(宗親) · 재추(宰樞)를 인견(引見)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병서(兵書)를 강(講)하게 한 다음 술자리를 베푸는 자리에서 왕세자(王世子)가 술을 올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부처를 숭상하지 아니하는 바가 아니므로, 사사(寺社)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많이 하지 아니한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다. 달마(達磨)가 이르기를, `부처를 만들고 탑(塔)을 만들면 반드시 공덕(功德)이 없어진다'고 하였으니, 너는 반드시 네 아비가 부처를 숭상한 것을 다 본받을 것이 없다.
또 네가 입은 목면(木綿)의 옷은 지극히 심히 질박(質朴)하고 누추(陋醜)하나, 사람들이 부지런히 수고하여서 만든 이 의복과 같은 것이 없다.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북돋우어서 목화(木花)를 따고 베를 짜서 이를 만드니, 너는 마땅히 옷을 보거든 여자의 공력(功力)이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라.
음식을 보거든 농부(農夫)들이 심히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하라. 항상 이로써 마음을 먹고 생각이 여기에 있으면 게으르고 소홀하고 사치(奢侈)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여겨 우매한 것을 너는 마땅히 검소(儉素)하여서 자봉(自奉)하고 혹시라도 태만하지 말라. 용도(用度)를 절약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여 백성들을 제때에 부려야 한다.” [<세조실록> 권31 9년 10월 11일(병신)]
이와 같은 가르침과 함께 세조는 지금의 대신들이 자신의 친구들이고, 또 국가의 중대한 일을 책임지는 신료들인 만큼 공경을 다하고 소홀해서는 안된다고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세조의 세자 교육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고, 세자 또한 그 가르침을 행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편 세조는 세자의 성정(性情)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훈(昭訓)을 들이었는데 같은 해 6월 11일에 군기판관(軍器判官) 최도일(崔道一)의 딸을, 9년 윤7월 6일에는 사옹 별좌(司饔別坐) 한백륜(韓伯倫)의 딸을 맞아들여 왕세자(王世子)의 소훈(昭訓)으로 삼았다. 소훈 최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소훈 한씨와의 사이에는 2남 2녀를 두었다. 하지만 1남 1녀는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1남은 제안대군(齊安大君) 현(탺)이고, 1녀는 현숙공주(顯肅公主)였다.
세조 9년 10월 23일 이제 세 살이 된 원손(元孫)이 풍질(風疾)을 앓으니, 명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 임원준(任元濬)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전순의(全循義)를 불러서 약(藥)을 쓸 것을 의논하게 하였지만 이미 손을 쓸 시기가 지날 정도로 갑자기 악화되었고 이튿날 할아버지인 세조와 아직도 미소년의 티가 남아있는 예종의 곁을 떠났다. 특히 세조로서는 장자인 의경세자와 장손인 원손을 일찍 잃게 되었으니 그 슬픔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원손의 휘(諱)는 분(糞)이었고, 이 때 나이가 3세였다.
원손이 죽자 왕실에서는 대신들과 시호(諡號)를 줄 것을 의논하니, 구치관(具致寬) 등이 올린 “시호법(諡號法)에 자혜(慈惠)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고 하니, 청컨대 시호를 효소(孝昭)라고 하소서.” 라고 한 것에 따라 효소라 하고 왕자(王子) 제군(諸君)의 예에 따라 인성군(仁城君)으로 추봉(追封)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10월 25일에 의경세자 묘 영역 안에 원손을 위해 땅을 고르게 하였고 11월 6일에 그 묘의 동쪽에 장사를 지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세자는 정해진 군왕 교육을 밟았다. <효경>, <논어>, <시경>, <통감> 등의 경사(經史)와 그 외 시무(時務)에 관련된 일을 배웠다. 그리고 세조 10년 1월 12일에는 비로소 문종이 세자이던 때의 고사에 따라 조계(朝啓)에 입참하였다.
조계(朝啓)란 중신(重臣)과 시종신(侍從臣)이 편전(便殿)에서 관원의 죄를 논하고 단죄 내리기를 임금에게 아뢰는 것으로서 바로 관리의 고과와 출척이라는 인사와 관련되는 일이다. 이때의 세자 나이가 열다섯이었으니 나이로만 보더라도 이러한 일을 하기에 충분한 때였다.
세자인 예종은 열다섯의 나이가 되면서 왕세자수업을 일단락짓고 실제 정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후 명나라 사신의 전별연을 주체적으로 행한 일이라든가 대군청의 북쪽에 집을 지어 사인(私人)을 만나고 있는 일, 상참과 조계에 참여하고 있는 일 등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세조 10년 4월 6일에 벌어진 서연에서 세자가 친독(親讀)하게 된 이유가 그의 학문이 크게 진전된 데에 있었다고 한 사실은 학문적 능력이 향상되었음을 엿보게 한다. 세조 11년 10월 1일에는 문소전(文昭殿)의 제사를 세자로 하여금 행함으로써 상징적인 면에서도 그의 후계 체제를 표면화시켜 나간 것으로 보이며, 11월 6일에는 세조가 신숙주에게 세자의 보필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세조 12년 한 해 동안 세자는 거의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빴고 또 그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바로 소훈 한씨가 2월 13일에 왕손을 낳은 것이었다. 왕손의 탄생은 그 동안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있던 왕실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기도 하였다.
세조 12년 열일곱살이 되는 때를 기점으로 해서 세자인 예종은 점차 정치 운영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것은 세조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아마도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그대로 쥐고 있었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종의 즉위와 세조 자신의 정치장악력을 토대로 왕권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안정적인 후계 체제의 확립을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한 기획은 이미 이때쯤이면 세워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가 상참이나 조계에 참석하여 신료들을 접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일에 관여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한 바 있고, 문소전에 대한 제사집행, 왕도(王道)에 대한 교육 과정의 운영과 세조 자신의 직접적인 가르침 등에 의해 세자인 예종은 국가 운영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은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신숙주 · 한명회 · 양성지 · 홍윤성 · 정인지 · 구치관 · 이극감 등의 대신들과 예종의 관계는 존중과 보필이라는 상호협력의 고리를 형성하여 정치 세력의 분산을 막았다. 또한 탄력적이면서도 신축적인 정치 운영을 위해 용관(冗官) 혁파와 기구의 축소 및 폐지, 군제의 효율적인 개편 등은 세조 자신의 재위시의 합리적 운영뿐만이 아닌 다음 대를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계획과 실천은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세자가 국정을 장악할 수 있는 기초 작업으로 문 · 무과의 과거 시험을 주관하게 하였다. 세조 12년 5월 12일에 있었던 무인을 시험하여 금휘 등 43인을 뽑은 일과 13년 7월 15일에 세자가 사정전에 나아가 유생과 제학인이 학업하는 바를 강한 일, 14년 2월 12일에 문과의 초 · 중시를 강한 일, 같은 달 15일에 무과의 초 · 중시를 감독한 일 등이 그 내용이었다.
새로운 인재를 뽑는 과거를 주관함에 있어 세자가 직접 참여한다는 것은 문과 무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신하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유능하고 덕이 있는 인재를 뽑음으로써 어찌보면 처음하는 일이랄 수 있는 임무를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다음 세자가 직접 정무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세조 12년 10월 5일에 6승지(六承旨)로 하여금 세자에게 일을 아뢰고 그의 결정을 받도록 한 것과, 13년 2월 18일 세조에게 환후(患候)가 있자 세자가 신숙주 · 한명회 등과 의논하여 서사를 결단하도록한 일, 3월 7일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서사를 의결한 일 등은 세자인 예종을 중심으로 후계 체제가 정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예종과 신숙주 · 한명회 · 정창손 등 원로 대신의 협력을 통해 정사가 의결되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조 말년의 정치사에서 등장하는 `원상제(院相制)'였다.
예종은 특히 이러한 관계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세조 7년 2월에 행한 바 있는 회맹례를 13년 10월 27일에 다시 개국(開國) · 정사(定社) · 좌명(佐命) · 정난(靖難) · 좌익(佐翼) · 적개(敵愾)의 6공신들과 함께 행하여 동지의 의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예종은 녹양 · 소격동 · 장의동에 주둔한 군사를 사열함으로써 명실공히 가장 강력한 통치 기반인 군사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세조 12, 13, 14년간에 이루어진 일련의 왕권 이양 작업은 큰 무리없이 이루어졌고 어떠한 정치적 혼란도 일지 않았다. 다만 13년 5월에 일어난 전(前) 회령절제사(會寧節制使)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하여 신숙주와 한명회가 수감되는 등의 한 차례 파란이 있었다. 그것은 이시애의 정치적 술수로 인한 것이었는데 8월 13일 이시애가 잡혀죽은 뒤에야 그들의 누명은 벗겨질 수 있었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의 집권 체제에 대한 반발과 함경도 일대 토호들의 반발이 연결되면서 발생한 것이었지만, 강력한 방어 체제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세조의 토벌로 말미암아 발생한 지 석달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세조는 함경도를 남북도로 나누는 행정 조정을 시행하였고 지방의 소요를 막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게 된다.
이즈음 8월에 세자는 세조로부터 제왕으로서 행해야 할 일에 대한 교시를 받게 되는데 세조의 전위의 결심은 보인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뒤 조정은 다시 안정을 갖게 된다. 이후의 변방 문제는 10월 10일에 강순(康純) 등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정벌하여 그 추장 이만주(李萬住)부자를 죽이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시기 세조의 건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그리하여 세조 14년 7월 19일, 세자는 사정전 월랑(月廊)에 앉아서 신숙주 등과 더불어 서사를 의논하여 정하고, 군국의 대사는 세조에게 계품(啓稟)하였다. 세조는 세자에게 전위할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직 세조의 병이 위독하지 않고 또 세조의 세수도 52세에 불과한 지라 아직은 때가 아니라하여 이 논의는 그치게 되었다. 세자는 또한 부왕의 병환이 낫기를 기도하기 위해 종묘와 사직, 명산대천에 빌도록 하였다.
22일 세조는 여러 종친과 재추들이 문안을 드리러 온 때에 전지(傳旨)하여 대신들을 4번으로 나누어 대궐에 들어와 세자와 더불어 서사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정인지 · 구치관 · 홍윤성 · 김질을 1번으로, 정창손 · 심회 · 조석문 · 김국광을 2번으로, 신숙주 · 박원형 · 홍달손 · 노사신을 3번으로, 한명회 · 최항 · 강순이 4번이 되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세조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세자는 12일 조신을 나누어 보내어 사직과 소격전(昭格殿) 및 명산대천의 여러 영험한 곳과 원각사(圓覺寺)에서 기도하게 하였다. 14일에는 창덕궁 후원에 신전을 세우도록하고 김개(金漑) · 김국광 · 노사신 · 이극증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이를 무일전(無逸殿)이라 하였는데 세조가 전위를 한 뒤 휴양을 즐기기 위한 까닭이었지만 이 역사는 25일에 정지되었다. 15일에 세조는 효령대군의 집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9월에 접어들면서 경상도에 황충이 일었는데 그 모양이 매미 같기도 하고 모기 같기도 하였다. 또한 계속해서 혜성이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더불어 세조의 병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7일에 세조는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을 불러 들여 전지하였는데 “장차 세자에게 전위하겠으니 그에 대한 모든 일을 판비(辦備)하라.” 는 내용이었다.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조는 “운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환관으로 하여금 면복(冕服)을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세자인 예종에게 내려주면서 즉위하게 하였다.
세자는 이러한 세조의 뜻을 받들어 수강궁(壽康宮) 중문에서 즉위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은 뒤 즉위 교서를 반포하였다. 그가 바로 예종인 것이다. 이것은 세조가 전에 “생각하건대 널 앞에서 즉위를 한다면 곡읍(哭泣)하는 사이에서 길흉이 서로 섞일 것이니 심히 불가하다.”
고 한 말을 실천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태상왕인 세조는 수강궁의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부왕의 죽음은 온순하면서도 효성스러웠던 예종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는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쳤다. 기록을 보면 이러한 상황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에 있어 한 잠도 못잔 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연려실기술> 권6 예종조 고사본말]
이때가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9월 7일에 즉위하여 이듬해 11월 28일에 경복궁의 자미당(紫薇堂)에서 승하한 것이다. 세조가 그토록 정성을 기울여 자신의 어려웠던 시기를 극복하면서 성군(聖君)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랐던 예종이었지만, 예종은 오히려 그러한 부왕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예종의 예상치 못한 승하는 왕실의 승계 구조를 다시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아들인 제안대군이 이제 겨우 네살 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 대신들과 당시 왕대비인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여 왕으로 즉위하게 하였고, 자신이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당시의 안정된 정치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