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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Geneva)에서의 日記

운중풍월 2023. 1. 2. 09:29

2012년 11월 3일(토요일) / 루체른(Luzern)

휴일을 맞은 딸이 우리를 태우고 스위스의 지도 한가운데의 중앙고원(미텔란트)에 있는 루체른을 향해 오늘도 고속도로를 달린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눈 덮인 알프스의 준봉들과, 호수들, 노란 단풍으로 물든 숲과 녹색의 초원에 세워진 빨간 지붕의 농가들, 거기에 기분 좋게 느껴지는 깨끗한 공기는 관광국 스위스가 자랑하는 청정한 나라의 상징임에 틀림없다. 가끔씩 눈에 들어오는 도로 표지판도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보다 초행자라도 당황하지 않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용어가 바뀌는 주(칸돈) 마다 바뀌는 표지판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운전자의 몫이란다. 알다시피 이나라는 국토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동쪽 지역의 알프스 산맥과 30%를 차지하는 중앙고원(미텔란트) 지역, 그리고  10%를 차지하고 있는 서쪽 지역의 쥬라 산맥 등 3개 지역으로 나뉘는데,  보통 2,000 미터 이하의 산들은 숲을 제외한 대부분이 거의 초지로 개발이 되어 있어서 국민의 6%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의 주요 소득원이 된다고 한다. 스위스는 국토가 우리나라 남한 넓이의 절반 보다도 좁은 나라 이기는 하지만, 국민소득이 세계 최상위 그룹에 속할 만큼 잘 사는 부러운 나라이다.  우리가 그들의 근면과 성실성을 배워야 할 나라이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풍경이 청정국 스위스를 말하고 있다.
단풍든 숲과 녹색의 초원 농가의 빨간 지붕의 조화로운 색조가 스위스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뇌리에 새겨진다.
저 알프스의 눈덮인 영봉들도 세계 여러나라에서 관광객들을 불러드리는 매력을 갖고 있다.

아침 9시 30분 집을 나와, 로잔(Lausanne)의 외곽을 지나고, 로몽(Romont)과 프라이부룩(Fribourg)을 거쳐 베른(Bern)을 지나, 중간에 급유를 하고 1시간쯤 더 달려 루체른(Luzern)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내내 평균 시속 110 킬로미터로 달렸으니, 어림잡아 총 거리 300 킬로미터는 달려온 듯하다. 이곳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는 시속 120 킬로미터 이라니까 적당한 속도로 운전한 셈이다. 주차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노변 주차장의 빈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고, 주변의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거리의 장터를 구경한 후에, 구 시가지로 가는 길을 찾아 호숫가로 갔다. 루체른 여행에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는 카펠교는 1333년에 세워진 유럽 최초의 목조다리 라고 한다. 지붕까지 있는 이 다리의 트러스에는 17세기에 화가인 하인리히 버그만이 루체른의 역사와 중요 사건들을 112장의 목판에 그려 붙여 놓았다고 한다.  

루체른에 도착하여 처음 만나는 거리의 모습이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나라에서도 거리의 광장이나 공원의 쉼터 같은 곳이 일정한 날은 이렇게 오후 3시까지 시장으로 변한다.
아내를 웃게하기 위해서는 가끔씩은 적절한  조크가 필요하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루체른의 명소인 <카펠교>는 루체른 호수와 연결되는 로이스 강 위에 14세기 초인 1,333년에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204미터의 목조 다리다.  다리 곁에 세워진 수탑은 옛날에 보물이나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던 곳을  지금은 상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1333년에 세워진 유럽 최초의 목조다리 라고 한다.  지붕까지 있는 이 다리의 트러스에는 17세기에  화가인 하인리히 버그만이 루체른의  역사와  중요 사건들을 112장의 목판에 그려  붙여 놓았다고 한다.
다리 중간에서 한 컷
다리에서 바라보이는 이 건물은 무슨 건물인지 모르고 그냥 사진만 찍었다. 무었하던 곳일까? 교회일까? 성당일까?

루체른 중앙역과 호수 사이에 세워진 KKL Luzern. 이곳은 루체른 문화복합센터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매년 봄, 여름, 가을에 열리는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축제 중 하나인 루체른 페스티벌(Luzern Festival)이 열리기도 한다고 한다. 1,800석 규모의 콘서트 홀은 단풍나무 마감재를 사용하여 어쿠스틱 효과를 극대화한 것으로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건물 1층에  'World cafe'라는 곳이 있어서 휴식도 취할 겸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데, 김밥도 있었고, 녹차도 있어서 우리는 케이크에 녹차를 마셨는데, 분위기와 다르게 값은 생각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점심은 집에서 준비한 김밥 도시락과 샌드위치를 관광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먹었기 때문에 배가 부른 상태였다. 

 

월드카페에서 나오면 바로 호숫가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고, 호수에 산 그림자가 드리워질 만큼 가까이에 눈덮인 알프스의 산들이 호수를 감싸고 있다. 해발 2,132 미터의 숲이 깊다는 필라투수(Pilatus) 산,  3,020 미터의 '눈의 천국'인 티틀리스(Titlis) 산과, 1,801 미터의 '산의 여왕'으로 불리는 리기(Rigi) 산 등이 호수 주변에 있는 산들이라고 하는데, 어떤 산이 필라투스이고, 티틀리스인지, 또, 리기 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 다 올라보고 싶은 산들이다.  

 

"골든 라운드 트립(Golden Round Trip"은 유람선을 타고 톱니바퀴 열차와 케이블 카, 곤돌라, 버스까지 타고 해발 2,132 미터의 필라투스 산에 올라가 루체른 호수 주변의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는 코스라고 한다. 미리 알았더라면 예약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호수와 산을 배경 삼아 사진만 남길뿐이다. 

호수와 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카카엘 건물과 월드 카페에서 마신 녹차
<골든 라운드 트립> 티켓을 예약하지 못하고 온 것을 못내 아쉬워 하면서...
1779년 볼프강 괴테가 머물렀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의 사진을 부쳐놓은 호텔도 카펠교 부근에 있다.
루체른의 구 시가지 모습들
노천 카페에는 관광객들이 만원을 이루고 있다.
로이스(Reuss) 강 가에서 카펠교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다.
카펠교 부근에는 예수회 교회 'Jesuit Church'가 있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이 관광온 사람들을 끌어드리기도 한다. 그 안에 들어가면 크리스쳔이 아니라도 실내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경건해진다.
교회 천정에 있는 그림
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

사진을 찍으면서 로이스 강과 카펠교 양편의 구 시가지를 구경하고 다니다 보니 벌써 오후 4시 반이 넘었다.  중간에 베른(Bern)과 몽트뢰의 시옹성을 사전에 답사하였다가, 기회가 되면 시간을 갖고 다시 오기 위해서 귀가를 서둘렀다.

루체른에서 1시간을 달려, 이 나라의 행정수도가 있는 오래된 도시 베른에 도착하여 아래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널 때쯤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여름철에는 오후 10시까지도 밝다는데, 겨울철에는 아침에도 7시가 다될 쯤에야  밝아지더니, 저녁에도 5시만 넘으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주차할 공간을 찾다가 다시 다리를 건너 강 언덕 한가한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아래강으로 내려가 베른의 야경을 잠시 구경하고, 시내의 아케이드가 늘어서 있는 거리를 따라 걷다가 다시 몽트뢰의 시옹성의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밤 9시가 넘었다.

 

2012년 11월 7일(수요일)

프랑스의 시골길 걷는 즐거움

가을을 보내려는 봄비 같은 이슬비가 3, 4일을 오락가락하더니, 오늘은 모처럼 해가 비친다. 흰 눈에 덮여 있던 쥬라산 봉우리들도 언제였던가 싶게 쌓였던 눈이 다 녹아버리고 제 본모습을 보이고 있다.  0도까지 내려갔던 기온은 정상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이상 고온인지는 몰라도 영상 10도가 넘어 온화한 느낌이다. 비에 젖던 창 밖 관목의 노란 잎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 위에 내려와 앉아서는 지난날의 영화를 그리워하고,  듬성듬성 아직도 가지에 남아 매달린 놈들은 제 미모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여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이곳 프랑스의 페르네 볼테르에도 서서히 가을이 가고 있다.

 

운동부족으로 체중이 늘어날까 걱정이 되어, 걷기 운동으로 체중도 조절하고, 이국의 풍경도 즐길 겸하여 오늘도 낯선 길을 걷기 위해 아침 11시 반쯤 집을 나섰다. 북쪽의 쥬라산 쪽을 향해 새로운 길을 찾아, 어제까지 가지 않았던 넓은 도로를 따라 인도와 자전거 길이 마련되어 있는 길을 걷는다. 처음 가는 길을 갈 때는 돌아올 길을 기억하기 위해, 가끔씩 도로 표지판과 주변 풍경도 카메라에 담아 놓아야 한다. 1시간쯤 걷다가 돌아오면 2시간 운동이 될 테니 하루 운동으로는 충분하리라.

도로 표지판에 디종이 188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디종(Dijon)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포도주 보졸레 누보의 생산지인 보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중심도시이다. 지도를 보니 파리의 남동쪽에 있는 제네바와 지척인 이곳 페르네 볼테르에서는 북쪽에 위치한 디종(Dijon)과 서쪽에 위치한 리옹(Lyon)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큰 도시로, 리옹(Lyon)은 120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도로 옆으로 이어지는 마을을 지나니, 단풍이 지고 있는 숲과, 넓고 푸른 초지, 그리고 이제 막 밀과 보리의 푸른 새싹이 돋고 있는 밭이 펼쳐지는 농촌의 풍경에 마음을 사로잡혀 걷다 보니 1시간을 넘게 걸었다. 맑던 날씨가 다시 어두워지더니 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고, 도로는 자전거 길과 인도가 끊긴다.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니 오후 1시 반이 넘었다. 우산도 없이 나선 길인데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집에서 15분만 걸어나오면 젖소가 풀을 뜯는 푸른 목장이 있는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쥬라산을 구름이 가리고 있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울타리 안에는 잎이 진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과 대나무 숲이 어우러진 정경은 어쩌면 우리나라의 시골과도 비슷하다.
농가 정원의 사과나무에서는 떨어진 사과가 수북해도 치우지를 안는다. 풍요로운 농촌의 일면일까? 아니면 먹일 소나 돼지가 없는 탓일까?
마을을 지나는 도로에는 인도와 자전거 도로가 있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갓길도 없는 자동차 도로 뿐이어서 걷기에 위험이 따른다.
숲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겨우살이.  높은 산에서도 낮은 숲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몽트뢰의 시옹성(Chateau de Chillon)

며칠 전 루체른에 다녀오면서 어두워진 후였지만, 사전 답사로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온 시옹성을 보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고 차분하게 집을 나섰다. 시옹성은 보(Vaud) 주의 동남쪽 끝 부분에 위치했으며, 제네바에서 동쪽으로 약 130 km 쯤 떨어져 있는 레만호의 진주라 불리는 몽트뢰의 동쪽 끝에 있다. 

레만호수 가에서 시옹성과 눈덮인 알프스를 뒤로하고
레만호수 건너의 알프스 위로 눈구름이 덮여있다.

1천 년이 넘는 이 시옹성의 역사는 멀리 9세기 로마인들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역사의 변천에 따라 바뀐 그 주인들도 수없이  많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9세기에 알프스를 넘어오는 이태리나 프랑스의 상인들로부터 통행세 징수를 목적으로 레만호의 바위섬에  세워졌다는 이 고성의 역사 또한, 우리나라의 신라 건국 시와 비슷한 시기인  BC 58년 사냥꾼들인 <헬베티아>족들이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부터 시작되는 스위스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변천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시 12세기에는 프랑스 사부아 공국의 소유가 되어, 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1536년 베른이 공격하여 빼앗아 260년 동안을 지키다가, 1798년 보 혁명으로 다시 베른 인들이 물러가게 된 이후, 1803년 보(Baud)가 정식으로 스위스 연방의 주로 승격되면서부터 지금까지 보 지방정부가 이 성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사부아 시대에 건축가 피에르 메니에르가 지금의 형태로 재건한 것인데, 다시 19세기에 대대적인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9세기에 성의 복원공사에 참여했던 건축가들과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복원위원회 회원들>

그러나 정작 이 성이 유명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가였던 프란시스 보니바르(Franncois Bonivard) 수도원장이 사부아 왕에게 붙잡혀서 1532년부터 4년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로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낸 것을 소재로 하여 쓴,  바이런의 서사시 <시옹성의 죄수>가 발표된 이후였다고 한다.

죄수가 되어 지하 감옥의 기둥에 묶여 4년 동안을 지낸 종교개혁가 프란시스 보니아르 수도원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친구 쉴러와 함께 보니아르가 갇혀있던 지하 감옥을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리는 그의 이름표가 감옥 암벽에 붙여 있고, 기둥에는 그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시옹성이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바이런의 시 <시옹성의 죄수>가 발표된 이후였다고 한다. 다시 그의 시 일부를 여기 옮겨본다.

시옹성의 죄수/바이런

쇠사슬을 벗은 영원한 정신!

자유, 너는 지하감옥에서도 환히 밝도다.

그곳에서 네가 머물 곳은 뜨거운 열정

사랑만이 속박할 수 있는 열정이어라.

자유여, 너의 자손들이 족쇄에 채워져

차갑고 습기 찬 햇빛 없는 어둠 속에 내던져질 때

그들의 조국은 그들의 순국으로 승리를 얻고

자유의 영예는 천지에 퍼지리라.

시옹! 너의 감옥은 성스러운 곳

저의 슬픈 바닥은 제단

그의 발자국에 닿은 너의 차가운 돌바닥은

마치 잔디처럼 되어버렸구나

누구도 이 흔적을 지우지 마라.

그것은 폭군에 항거하여 신에게 호소한 자국이니...

성에 도착하기 전 시옹성 맞은 편의 산 위에도 아름다운 단풍과 멋진 건물이 눈에 들어와 자동차 안에서 찍은 것이다.
시옹성 옆으로 기차가 지나다니는 철길이 있다. 주차하고 성으로 가면서 찍은 시옹성의 모습
레만 호수와 몽트뢰 시가지를 안고 있는 산 위 높은 곳에도 집들이 지어 져 있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 기념사진 한 컷.

도착하여 성의 내부를 관람하기 위하여 입장료 12 스위스프랑을 내고 입장권을 샀다. 사부아 공국의 전성기 때는 왕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지하는 포도주의 저장고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종교분쟁 때 개혁자들을 가두는 감옥으로도 사용하였다는 성 내부로 들어가 2시간 이상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도 포도주 저장고로 사용하는 지하실
호수로 이어지는 이 창문이 비상탈출구로도 사용되었지만, 평상시에는 성에서 사용할 물자를 반입하는 문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하 감옥에 햇빛과 공기가 들어올 수 있는 좁은 창이 호수쪽으로 나 있다.
지하 감옥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데, 바닥과 벽은 바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바위섬 위에 지은 성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죄수들을 이곳에서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때 이 성의 주인이었던 성주의 초상화
이 성을 크게 복원하였던 사부아 공국 왕의 사진과 기록이다.
각 방의 창문마다 레만호수와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져 있다.
이런 대포도 준비되어 있었고 ,
이런 총도 있었나 보다.
이런 철갑을 입은 병사들이 무기로 사용하던 창도 있었다.
성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던 장치도 발달되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지역 주민들이 모여 식사를 같이 하면서 와인도 마시며 이웃간에 정을 나누는 특벽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라고 15세기의 복장을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던 관리자들이 포즈를 취해준다.